영화 ‘엄마 없는 하늘 아래’의 주인공 김재성

영화 ‘엄마 없는 하늘 아래’의 주인공 김재성

“슬픈 영화처럼 힘들었던 내 인생, 이젠 훌훌 털고 ‘제2의 배우 인생’ 살겠습니다!”

많이 달라졌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옛말이 무색할 만큼. 웃을 때 보이는 눈가의 잔주름이 세월이 흐름을 말해줄 뿐니다. 단 한 편의 영화로 사람들의 뇌리에 깊숙이 자리한 후, 반짝였던 화려함보다 몇 갑절의 좌절을 맛본 김재성이 컴백을 선언했다. 뿌리 없는 나무처럼 흔들리며 살아온 지난날에 대한 회상, 그리고 앞으로의 희망에 관한 이야기는 잊혀졌던 그를 다시 떠올리게 한다.

떠날 때 그랬던 것처럼 돌아오기를 결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국으로 돌아오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그가 미국에서 보낸 10년이 바람과 함께 사라질 것 같았다. 세탁소, 비디오 가게, 편의점, 피자 가게, 한국 식당… 힘들게 지나온 시간들을 부정하고 싶진 않았다. 옳은 선택이든 아니든, 그는 지난 10년간 미국에서 살았다. 현실을 도피하듯 떠났던 고국, 그러나 그때 그의 가슴속에는 ‘다시 사는 삶’에 대한 희망이 있었다. 그것이 이루기 힘든 꿈이라는 걸 깨달은 건 시카고에 도착한 후였다.

김재성(39)은 본명보다 영화 ‘엄마 없는 하늘 아래’의 주인공으로 더 유명하다.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77년 개봉된 이 영화는 전국에서 11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한반도를 눈물바다로 만들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이 영화를 관람하고 큰 감동을 받아 전국의 초등학교에 단체 관람을 지시했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을 만큼 ‘엄마 없는 하늘 아래’는 최고의 히트작이었다. 덕분에 현재 서른 살 즈음의 성인은 대부분 “아~ 그 영화” 하며 어렵지 않게 기억해낼 수 있을 것이다.

열세 살 화려하던 그 시절

열세 살 때의 일이다. 김재성씨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엄마 없는 하늘 아래’ 아역배우 선발대회에 참가했다. 영화에 출연하기 전부터 아동복 모델 등으로 활동해온 그는 아역배우 중에서 꽤 유명한 편이었다. 그래도 영화 출연을 위해 오디션을 봤다. 그리고 수백 명의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당당히 주인공으로 선발되었다. ‘엄마 없는 하늘 아래’는 가난과 역경을 혼자서 헤쳐나가는 13세 소년의 이야기다. 엄마는 하늘나라로 갔고, 아버지는 정신착란을 일으켜 젖먹이 동생까지 책임져야 하는 열세 살 소년의 삶이 얼마나 고단했을지는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영화는 시작되기 전부터 전 국민의 눈물샘을 자극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영화 시사회 때 어머니, 아버지는 물론이고 고모, 이모, 할머니까지 온 식구들이 눈물, 콧물 흘려가며 우시던 게 아직도 기억나요. 특히 고모가 많이 우셨어요. 이런 영화인 줄 알았다면 출연시키지 말 걸 그랬다고 하셨죠. 영화 속에서 젖먹이 동생으로 출연한 아이가 바로 이모의 아들이에요. 그 녀석은 미국 버지니아에서 살고 있어요. 컴퓨터 관련 일을 해요. 아주 잘 자랐죠.”

당시 열세 살 꼬마 주인공 김재성이 출연한 영화는 3편까지 제작됐다. 그 만큼 ‘엄마 없는 하늘 아래’는 충무로의 이슈 메이커였고, 그 역시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유명 인사(?)였다.

첫번째 연기 활동 중단 그리고 은퇴…

중학교에 진학한 후에도 김재성의 연기 생활은 계속됐다. 그러다 중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연기 생활을 중단했다. 이유는 ‘공부가 하고 싶어서’였다. 자식이 공부를 하겠다는데 말릴 부모가 있을까? 그의 부모님도 연기가 아닌 평범한 인생길로 접어든 아들을 위해 물심양면 정성을 쏟았다. 김재성은 어려서부터 미술에 남다른 재능이 있었다. 그래서 연기를 그만둔 후에는 본격적으로 미술 공부를 했다. 고등학교도 미술을 특기로 선화예고에 진학했고, 대학 역시 추계예대 서양학과에 입학했다. 그런데 대학 2학년 때 다시 연기가 하고 싶어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공부가 하고 싶어서 포기한 연기인데 어느 순간부터인지 막연히 ‘공부보다 잘할 수 있는 건 연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충무로 영화판(?)을 기웃거렸다.

“제가 다시 연기를 하겠다고 하니까 감독님들은 좋아하셨어요. 그때까지도 ‘엄마 없는 하늘 아래’의 아성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았거든요. 당시엔 성적 코드로 포장된 영화들이 대부분이라 저도 사회적인 흐름에 따를 수밖에 없었죠. 그때 출연한 작품들은 ‘팁 2’ ‘벌거벗은 분노’ ‘핸드백 속 이야기’ 등이에요. 91년과 92년에는 ‘내가 성에 관해 알고 있는 몇 가지 이야기’와 이정국 감독의 ‘두 여자 이야기’에도 출연했어요. 근데 이 작품이 저의 마지막 출연작이 되었죠. 그후에 연기 활동을 중단했거든요.”

김재성은 성인이 되어 다시 시작한 연기 생활에서 성공보다 좌절과 절망을 더 많이 느꼈다. 사람들은 그에게 많은 것을 요구했다. “예전에는 잘했는데 왜 지금은 그것밖에 못하니” “네 연기는 왜 늘 제자리니” “발전이 없다”는 등의 이야기들. 열세 살의 어린 나이에 스포트라이트를 경험한 그에게 한꺼번에 쏟아지는 질타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 대한 깊은 상실감을 안고 연예계를 떠났다.

꿈을 안고 떠난 미국, 그러나 꿈은 깨어지고…

연기 활동을 중단한 김재성은 신학 공부에 매달렸다. 난생처음 종교라는 것을 가진 후 삶에 대한 희망도 보였다. 연기를 하지 않아도 하루하루가 신나고 즐거웠다. 그러나 그런 시간도 잠시뿐이었다. 독실한 불교 신자인 할머니는 하나뿐인 손자가 열성 교회 신도가 된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것은 아버지도 마찬가지. 종교로 인한 가족간의 불화는 생각보다 깊었다. 급기야 그는 가출을 했다. 후배의 작업실에 얹혀살던 중 평소 알고 지내던 목사님에게서 ‘함께 미국으로 가 신학 공부를 해보자’는 제의를 받았다.

“처음 도착한 곳은 시카고예요. 그런데 미국에 도착한 후 함께 간 목사님과 의견 충돌이 생겼어요. 낯선 땅에 도착한 지 한 달 만에 목사님의 집을 나와서 외톨이가 됐죠. 그때부터 고생이 시작됐어요. 안 해본 일이 없을 만큼 별일을 다 했어요. 청소, 설거지, 점원 등 돈이 되는 일은 뭐든지 했어요. 얼마나 힘들게 일했는지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죠. 그때 가난이 뭔지도 알았고, 인내심을 키우는 것과 외로움을 이기는 법도 알았어요.”

시카고에 살 때 그는 좌골신경통으로 오른다리 마비되었다. 10달러로 한 달을 버틸 만큼 힘든 상황이 극에 달했을 때였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다리에 감각이 없고 움직일 수도 없었다. 순간 ‘이렇게 죽는 거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난방은 물론, 전화까지 끊긴 상황에서 자신의 처지를 알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집 밖으로 탈출(?)한 그는 공중전화를 통해 친구에게 SOS를 쳤다.

“미국 생활 중에서도 제일 힘들었던 시간이에요. 시카고에서 그렇게 3년을 버틴 후 12월 31일 밤 7시에 뉴욕행 버스에 몸을 실었어요. 지긋지긋한 시카고 생활을 털고, 새날은 뉴욕에서 맞고 싶었거든요. 뉴욕 생활도 힘들긴 마찬가지였어요. 한인을 대상으로 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앵커로 활동했지만, 워낙 없이 시작한 미국 생활이라 기반을 잡기는 역부족이었죠. 라디오 방송국에 출근하면서도 비디오 숍 매니저, 페티큐어 아티스트 등 다양한 직업도 아울렀어요.”

10년 미국 생활 접고 한국으로 돌아오기

떠날 때는 꿈이 있었다. 종교로 시작된 집안과의 갈등, 다시 시작한 연기에 집착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회의 … 이 모든 것을 잊고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미국에서 10년을 살고 난 후에도 ‘이 땅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야’라는 생각만 들었다. 시카고에서 살 때보다 뉴욕으로 이사한 후 살림살이도 많이 좋아졌다. 갑부는 아니지만 이민에 성공한 한국인의 딸과 결혼을 전제로 만남을 갖기도 했다. 그러나 자란 환경이 다른 탓에 두 사람은 의사소통을 원활히 할 수 없었다. 일상적인 이야기를 할 때는 어려움이 없었지만 조금 진지한 이야기를 하려면 그의 영어 실력이 모자랐고, 그에 버금갈 만큼 상대 여자의 우리말 실력도 짧았다.

“그때 결혼했다면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았겠죠. 하지만 결혼은 조건보다 사랑인데 의사소통이 안 되니까 특별한 감정이 생기다가 없어지더라구요. 그렇게 뿌리 내리지 못하는 나무처럼 불완전한 미국생활을 하다가도 2002년 10월에 돌아왔어요. 미국에 있을 때 교회에서 준비한 연극 무대에도 섰고, 단편영화에도 출연했어요. 그럴 때마다 ‘문화와 관계된 일을 하고 싶다’는 걸 느꼈어요. 제가 직접 연기를 하는 게 가장 좋겠지만 공백기가 너무 길어서 … 사람은 소중한 것에서 떨어져 있을 때야 비로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다고 하잖아요. 제가 그랬어요. 연기와 떨어져 살다 보니 제가 가장 하고 싶은 일이 연기라는 걸 알았죠.”

김재성은 현재 서울 상계동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다. 올 가을에는 결혼도 할 예정이다. 그의 예비신부는 서른네 살, 그와 다섯 살 차이다. 두 사람은 지난 2002년 겨울, 교회에서 만났다. 평소 살가운 성격이 아닌 탓에 그녀에게 못 해주는 게 많다는 그는 올해 첫날 그녀와 강릉 경포대를 찾았다. 그곳에서 함께 해돋이를 바라보며 희망찬 미래를 소원했다고 한다.

영화 ‘엄마 없는 하늘 아래’에 대한 추억

한국으로 돌아온 후 그는 오이도까지 지하철이 들어간다는 것을 알았다. 오이도… 그에겐 남다른 추억이 있는 곳이다. 바로 ‘엄마 없는 하늘 아래’의 촬영 장소가 그곳이었던 것. 지난 77년 오이도는 배를 타고 들어가는 깡촌이었다. 허허벌판에서 촬영팀은 ‘털보식당’이라는 곳에 짐을 풀었다. 몇 달 동안 숙박을 하다 보니 ‘털보식당’의 아주머니, 아저씨와 정이 들기도 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 오이도에 갔었어요. 가슴이 벅차더라구요. 지하철을 타고 오이도 종점에서 내렸는데, 너무 많이 변해서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더라구요. 제가 영화를 촬영한 곳은 지하철역에서 좀더 들어가야 했기에 택시를 탔어요. 근데 마침 택시운전사가 오이도 토박이인 거예요. 그래서 ‘옛날에 여기서 영화를 촬영했고 제가 그 주인공’이라고 이야기했더니 어찌나 반갑게 맞아주던지 … 그 사실을 알고 있더라구요. 또 ‘털보식당’이야기를 했더니 “그 집은 지금 횟집으로 바뀌었다”며 식당 앞에 내려줬어요. 꼭 고향에 온 기분이었죠. 그래서 식당 문을 열고 들어서며 “털보 아저씨~’하고 불렀더니 이제는 할아버지가 된 털보 아저씨가 나오시는 거예요. 그때 ‘잘 돌아왔다. 내 집에, 내 땅에, 내 고향에 잘 돌아왔다’고 생각했어요.”

드라마, 다큐멘터리 제작으로 분주한 요즘

김재성은 얼마전 충무로에 둥지를 틀었다. 드라마와 다큐멘터리 등을 제작하며 신인 연기자들을 위한 학원도 운영 중이다. 지난해 4월 시작한 회사는 현재까지 아홉 작품을 완성했다. 이중에는 국군 홍보 영상물과 MBC ‘심야 스페셜’도 포함돼 있다. 오는 추석에는 ‘장모’를 소재로 한 드라마를 제작할 예정. 여권이 신장되면서 시어머니만큼이나 파워(?)를 갖게 된 장모와 네 명의 사위를 둘러싼 이야기가 이 드라마의 기본 줄거리. 그는 이 작품에서 사위로 출연해 직접 연기도 선보일 예정이다.

“제 어린 시절은 아주 우울했어요. 아픔도 많았고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사건도 있었어요. 우리 가족들은 ‘엄마 없는 하늘 아래’를 보며 제 인생이 떠올랐대요. 제가 너무 불쌍해서 영화가 상영되는 내내 눈물을 흘렸다고 했어요. 그렇게 우울한 영화인 줄 알았다면 출연시키지 않았을 거라는 고모의 말씀은 진심이었어요. 그래서인지 저는 평범한 인물을 연기하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제 인생이 평범하지 않았기 때문에 단란한 가족 분위기를 연출하고 아버지, 어머니와 정다운 모습으로 웃고 떠드는 연기를 하는 건 정말 어려웠죠.

한창 연기를 할 때 많은 들은 말은 ‘야, 재성아 집에서 어머니한테 하듯이 그렇게 편하게 해. 연기말고 진짜 말이야’였어요. 하지만 저한테는 그런 기억이 없거든요. 새어머니가 잘 해주셨지만 저는 마음을 붙이지 못했고 아버지와도 잘 지내지 못했어요. 어머니와 관련된 연기를 할 때면 불행하게 생을 마감한 어머니 이야기가 떠올랐어요. 그래서 평범한 상황이 제게는 유난히 힘들었던 거 같아요.”

10년의 미국 생활은 그에게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워줬다. 현재 그는 부모님과 함께 상계동에서 살고 있다. 일이 바빠지면서 퇴근이 늦는 아들에게 그의 아버지는 자주 전화를 걸어 오랜만에 품으로 돌아온 아들을 챙긴다고.

“저는 인생의 화려함도 경험하고 좌절도 맛봤어요. 화려함 속에 있을 때는 인생이 화려한 줄만 알았고, 좌절 안에 있을 때는 인생을 포기하고만 싶었죠. 근데 이제는 산다는 게 좀 쉽게 느껴져요. 인생은 머리 싸매고 공부하면서 사는 게 아니라 흐르는 강물처럼 자연스럽게 사는 것. 그걸 알기까지 참 많은 세월을 보냈어요.”

불혹을 눈앞에 둔 나이에 ‘제2의 연기 인생’을 시작하는 김재성. 그는 이제야 평범한 가족의 이야기를 자연스레 연기할 수 있을 거라고 한다. ‘엄마 없는 하늘 아래’의 소년가장은 십수 년이 흐른 지금에서야 인생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있다고 한다. 넉넉하고 편안해진 웃음에서 그의 요즘을 느낄 수 있었다.

글 / 경영오 기자  사진 / 황정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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