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분자분 맞장구칠 땐 계모임에 나온 동네 아줌마 같은 미소년. 벌써부터 노래 부르는 행복과 두려움을 말하는 애 늙은이. 줄리어드 예비학교를 거쳐 이탈리아 피렌체의 산 벨리체 음악원에 합격했고 미국, 일본, 이탈리아, 대만 등을 오가며 노래하는 열아홉 소년. 임형주를 만날 때마다 작은 설렘이 인다.

임형주를 처음 본 건 텔레비전에서였다. 지금은 막을 내린 `이소라의 프로포즈란 심야 음악프로에 한 소년이 등장했다. 초등학생이라고 했는데 나이에 안 어울리는 하얀 양복을 입고 `돈 크라이 포미 아르헨티나를 불렀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소년인지 아이인지 구별하기 힘든 목소리였고 꼬마 주제에 카메라 앞에서 떨지도 않는 게 징그러울 정도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변성기 전의 목소리가 너무 예뻐 기념으로 음반을 만들었고 그게 소문나서 출연했단다.
그로부터 2년 후 난 그를 직접 만났다. 사업가인 그의 어머니와의 점심식사 자리에 따라나온 것이다. 중학생 남자아이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컴퓨터게임? 몰래 본 성인 사이트? 나로선 공통의 화제를 못 골라 막막하기만 했다. 그렇다고 “어른들이 얘기할 테니 넌 밥이나 먹어라”고 아예 말문을 막아야하나. 그러나 그건 완전히 기우였다. 솜털이 보송보송한 이 소년은 마치 계모임에 참석한 아줌마처럼 자분자분 이야기를 잘도 했다. 직접 만난 연예인들에 대한 인상도 묻고, 소문의 진상도 묻고 맞장구도 잘 쳤다. 얼마 후 임형주는 미국 줄리어드 음대 예비학교에 입학해 뉴욕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2002년 겨울에 다시 만났을 때 그는 아주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앨범을 내려고 해요. 제 목소리가 좀 독특해서 팝페라에 어울릴 것 같아 분위기에 맞는 곡들을 모아 내려구요. 그런데 아직 한국에서는 시도하지 않은 분야여서 어떨지 걱정이 돼요”
여드름 하나 없이 매끈한 우윳빛 피부의 소년은 진짜 우유를 마셔가며 팝페라에 대해 열심히 설명했다. 서울 예원학교 성악과를 수석 졸업하고 전국 청소년 음악 콩쿠르에서 1등을 한 정통 성악가 지망생인 그가 `팝페라 가수가 되겠다니 걱고개가 갸우뚱해졌다. 음반 시장이 꽁꽁 얼어붙어서 유명한 스타들의 앨범도 잘 안 팔리는 상황에 무명의 16세 소년이 그것도 팝페라란 엉뚱한 장르에 도전한다니 걱정이 되기도 했다.
친구였다면 “너 혹시 점은 봤니? 대박날지, 망신살 뻗칠지 좀 물어보지”라고 말했겠지만, 그래도 어른인데다가 명색이 신문사 부장인지라 우아하게 말했다.

국내 최초의 팝페라 음반이란 역사적 자료가 된 임형주의 첫 앨범 「샐리가든」은 그야말로 돌풍을 일으켰다. 2003년 발매되자마자 클래식 판매 차트 1위를 차지했고,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에 초대받아 애국가를 선창해 또 화제를 모았다.
그후로 그의 활약상은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각종 방송에 출연하고 수없이 많은 신문 잡지에 인터뷰를 하고 단독 콘서트도 가졌다. 그해 6월에는 뉴욕 카네기홀에서 남성 성악가로서는 최연소 데뷔 기록을 세우며 콘서트를 열었다. 미국, 일본 등 해외에서도 초청 공연을 가졌고 그 와중에 2집 앨범 `「실버 레인」도 출시했다.
지난해 말,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그의 송년 음악회에서 난 또다른 임형주를 발견했다. 평소엔 마냥 얌전하고(?) 조용하고 내성적인 그가 무대에선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꽉 들어찬 관중 앞에서 그는 초대 손님 한 명 없이 완전히 혼자서만 2시간을 노래하고 춤추고 이야기했다. 열일곱 살의 소년이 클래식, 팝송, 가곡, 동요를 넘나들며 관객들을 쥐락펴락했다. 너무 넉살이 좋고 대담해 보여 “쟤가 임형주인가”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좀전에 분장실에 찾아갔을 때는 무대의상을 갈아입기 전이라 헐렁한 러닝셔츠에 지친 모습이어서 건강을 걱정했는데 배신감을 느낄 정도였다.
“저도 저한테 놀란다니까요. 내 속에 이렇게 많은 감정이 스며 있는지, 이토록 다양한 얼굴과 생각이 있는지 신기해요. 그래서 곡마다 그 곡을 표현해내는 또다른 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 노래를 부르는 게 너무 행복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해요.”
4월 초에 3집 앨범인 `「미스티 문」을 발매할 예정인 그는 마지막 마무리 작업을 하느라 밤을 꼬박 새우면서도 뿌듯한 표정이다. 이 앨범에서 그는 클래식 곡뿐만 아니라 로미오와 줄리엣의 주제곡과 나미의 ‘슬픈 인연’까지 불렀다. 아니, 그 곡은 내가 노래방에 가서 열창하는 노래가 아닌가.

10대부터 50대까지의 전국적인 팬을 갖고 있고 그의 팬카페엔 3만 명의 회원이 가입되어 있다. 일본에서도 그의 데뷔앨범 「샐리가든」이 발매되자마자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줄리어드 예비학교를 거쳐 이탈리아 피렌체의 산 벨리체 음악원에 합격했고 미국, 일본, 이탈리아, 대만 등을 오가며 노래하는 열아홉 살 소년. 그런 그에게 지금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뭐냐고 물었더니 한숨을 포옥 쉬면서 이렇게 말한다.
“고등학생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가보고 싶어요. 그리고 학교 근처 분식점에 들어가 떡볶이랑 오뎅도 먹고 싶고 친구들과 수다도 떨고 싶어요. 그런데 이런 이야기하면 친구들이 막 화낼걸요? 지금 친구들은 고3이거든요. 대학 입시를 앞두고 있어서 연락하기도 미안해요. 참, 또 하고 싶은 일 있어요. 여자친구 사귀는 거요. 심은하 같은 청순 가련형이 좋아요. 그런데 심은하씨는 언제 컴백하나요?”
수십만 장의 앨범이 팔리고 수만 명의 팬들이 환호하며 세계를 누비고 다녀도 그는 10대 소년이었다. 키가 덜 자라 고민이고, AB형답게 너무 꼼꼼하고 소심해서 인터넷에 올려놓은 안티팬들의 글에 상처를 받고 몰래 눈물을 흘린다는….

“지난 1년간 너무 마법처럼 일이 잘 풀려서 겁이 나기도 해요. 그래서 요즘은 욕심을 덜고 마음 비우는 훈련을 하는 중이에요. 늘 처음 시작할 때의 마음, 초심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아기처럼 순진한 미소를 지으며 노인 같은 말을 하는 임형주. 그래서 그의 노래는 수많은 이들의 가슴을 울리나 보다.
Profile
경향신문사 여성팀 부장인 유인경 기자는 MBC-TV ‘아주 특별한 아침’, KBS 2FM 대행진 ‘해피 먼데이’ 등에 고정 출연하고 있다. KBS-1TV ‘아침마당’, ‘100인 토론’ 등의 프로그램에도 얼굴을 내밀고 있으며 인간미 넘치는 입담으로 꽤 많은 아줌마 팬들로부터 환호를 받고 있다. 물론 아저씨 팬들도 있다.
글 / 유인경(경향신문 여성팀 부장) 사진 / 지호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