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타’로 유명한 탤런트 송승환(49). 그가 MBC 간판 라디오 프로그램 ‘여성시대’ 진행자로 나섰다. 소박한 사람들의 담백한 이야기를 담아내는 이 프로그램 때문에 그 또한 요즘 마음이 설레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 보았다.
COOKIN’1
8살부터 DJ 시작하다

“KBS 라디오 ‘은방울과 차돌이’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어요. 제가 ‘차돌이’였죠.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의 어린이 디스크 자키였던 셈이죠. 신청곡도 틀어주고 재미있는 사연도 읽어주면서 아이들의 세계를 표현하는 프로그램이었어요. 당시 은방울은 최연희씨가 맡았는데 그 분과 연락이 안 돼요. 그때도 지금처럼 떨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스튜디오에 들어가면 편안한 느낌이 들었거든요.”
40년이 흐른 지금, 그는 변함없이 마이크 앞에 앉는다. 따끈한 커피 한 잔으로 복잡한 일상사를 스튜디오 바깥에 던져둔 채 방송을 시작한다. 휴대폰도 없다. 전화도 받을 수 없다. 이 시간, 그는 세상과 완벽하게 차단되는 자유를 누린다.
1981년, ‘밤을 잊은 그대에게’에서 젊은 팬들과 호흡하던 그는 이제 ‘여성시대’에서 아줌아 팬들과 호흡을 같이한다. 스타와 팬으로서가 아닌 함께 세상을 짚어보는 동무로서 도란도란 인생을 나누고 있다.
“장애아를 키우는 부모님의 사연이 기억나요. 휠체어를 타고 다녀야 하는데 누군가가 휠체어를 훔쳐갔나 봐요. 물론 훔쳐간 사람 마음은 오죽 답답했을까 싶지만 순간 화가 나더라구요. 그 방송이 끝나자마자 게시판에 휠체어를 보내주겠다는 사연이 수십 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잔잔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70~80년대에는 관제엽서로 온 사연을 읽어 내려갔다. 빼곡이 적은 사연을 기다리면서 느끼는 설렘과 긴장감이란…. 그러나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청취자와 DJ 사이가 더욱 가까워졌다.

“진행 파트너인 양희은씨와는 손발이 착착 맞아요. 어색한 게 거의 없다고 봐야죠. 편하고 구수하고 시원하다는 느낌이 강합니다. 게다가 둘다 ‘앵벌이’ 출신 MC라구요. 어린 시절부터 가장 노릇을 해야 했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 친구들은 제가 부잣집 아들인 줄 알고 있더라구요. 제 외모가 고상한가 봐요. 요즘 말로 하면 그때당시 잘 나가던 ‘꽃미남’인 거죠. 2004년에 송승헌이 있다면 그 시절엔 송승환이 있었죠(하하) 송승헌 이상 가는 인기를 누렸다니까요. 종이학이 방안 가득 찰 정도였답니다.(하하)”
양희은과는 80년 유학 시절, 미국에서 만났다. 결혼 후 미국에서 살고 있던 그녀를 가끔 만나 음악과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생각해보니 훨씬 이전에 만났군요. 엄밀히 따지면 70년대 ‘밤을 잊은 그대에게’에서 DJ와 팬으로 만났죠.”

COOKIN’ 2
오프 브로드웨이, 원하는 건 다 이뤘다
광화문에 있는 그의 사무실. 복사기 앞에는 깔끔하게 정리된 서류함이 놓여 있다. 서류함에는 정갈하게 정리된 서류들이 보인다. 몸에 배인 습관인 것이다. 그들에게 당연한 모습이 방문객에겐 놀라움으로 다가선다. 튼실한 회사를 만들어가는 데는 곳곳에 숨은 정답이 있다.
그의 집무실로 들어서면 확 트인 창문 너머로 보이는 전경에 먼저 감탄부터 나온다. 인왕산을 배경으로 청와대가 고스란히 시야에 들어온다. “전망이 좋다”는 기자의 말에 그는 웃음으로 대응한다.
“첫 날만큼의 감흥은 없죠. 그건 무슨 일을 하든지 그런 것 같아요. 반복적으로 같은 일을 하면 당연한 일이 돼버리니까요. 제가 요즘 그런 것 같아요. ‘난타’ 제작으로 숨가쁜 나날이지만 그런 만큼 고민도 늘고 해결해야 할 과제도 쌓이게 됩니다.”
3월 7일. 브로드웨이에 난타 전용관이 오픈하던 날이다. ‘명성황후’ 등 국내 굵직한 공연들이 브로드웨이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오프 브로드웨이 공연으로는 난타가 국내 최초이기도 하며 아시아 최초다. ‘난타’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외국인들을 위해 ‘cookin’이란 제목으로 공연을 시작한 지 5년 만의 일이다. ‘cookin’의 첫 공연은 성공적이었다. 연일 매진은 물론 선 채로 공연을 관람하는 관객들도 눈에 띄었다. 공연이 끝나면 브로드웨이 관례에 따라 공연을 기념하는 리셉션도 열렸다.
“미국 유학 시절, 외국의 선진 공연을 보면서 막연히 꿈을 꿨습니다. 언젠가는 국내 무대에서도 저런 공연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그걸 내가 직접 하겠다는 결심을 하진 못했어요. 그만큼 엄청난 일이니까요. 그런 꿈 같은 일들이 하나 둘 내 손으로 이뤄질 때 마다 정말 살맛 납니다. 평생 바라던 꿈을 이뤄 너무나 기쁩니다. 제가 원하는 건 다 해본 셈입니다. 앞으로 10년 이상 장기 공연을 한다면 연간 6백만 달러의 수익을 올릴 수 있습니다”
전용극장 설치에 맞춰 공연도 색다르게 꾸몄다. 대형 철판을 놓고 무대 위에서 직접 불고기 요리를 한다. 솟구치는 불꽃과 지글지글 타는 고기 냄새, 무대에서 직접 만든 불고기를 배우들이 관객에게 맛보게 하는 등 볼거리를 더욱 다양화한 것. 공연이 끝나자 모든 관객이 일러나 박수로 열광했다. 6주간의 공연 티켓이 전부 팔려나가며 오프 브로드웨이 예매율 2위에 오르는 등 초반 반응이 뜨겁다.
현재 공연 팀은 뉴욕에 아파트 5채를 얻어 생활하고 있다. 3개월이 지나야 롱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점쳐볼 수 있기 때문에 긴장감을 늦출 순 없다.
“3개월이 지난 후에도 똑같은 반응을 얻게 되면 새롭게 팀을 구성할 예정입니다. 현지에서 대대적인 콘테스트를 통해 아시아계 미국인으로 구성할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의 홍보용 이벤트로 활용할 수 있을 거예요.”
COOKIN’
소문만 요란하다
‘최초’라는 단어를 열거하자면 그는 10여 가지가 넘는 기록을 세웠다. 전세계 120여개국을 돌며 순회공연을 했다. 난타 전용극장이 미국에 세워졌다. 송승환은 명예와 돈을 동시에 거머쥔 사나이인 것이다. 예상치 못한 돈다발이 생기게 되면 넓은 침대가 놓인 방에서 하늘을 향해 흩뿌린다. ‘돈서리’를 맞으며 기뻐하는 두 주인공. 그에게 “이런 경험이 있느냐”는 다소 뚱딴지 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는 아내와 단 둘이 살고 있다. 영화, 연극도 보고 운동도 같이 하면서 친구처럼 사는 이들 부부.
중학교 시절, 아버지의 사업 실패는 그에게 ‘돈’에 대한 개념을 바꿔놓았다. 빚쟁이들이 들이닥쳐 방에 드러눕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들을 설득하고 다독거려 집으로 돌려보내는 날이 이어졌다. 당시 방송 활동을 하던 그의 출연료는 고스란히 탕감하는 데 나갔다. 불평도 없었다. 하루 빨리 집안을 다시 일으켜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아버지가 화병으로 쓰러지면서 소년 가장이 된 그는 ‘철 든’ 어린이가 되었다. 쌀이 없어 굶는 날이면 방송국 선배들이 돈을 모아주기도 했다. 고등학교 시절엔 CF로 학비를 벌었다. 3년 내내 엘리트 학생복 모델을 한 덕분에 학비 걱정은 하지 않았다. 속내를 털어놓지 않는 그의 성격 때문에 그의 가정 형편을 자세히 아는 친구는 거의 없었다. 미아리 산동네는 그 당시 전화 있는 집을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약국에 가야 구경할 수 있는 텔레비전과 전화. 방송국에서 출연 섭외 전화가 오면 약사는 슬리퍼를 끌고 달려왔다.
“그때만 해도 방송국에서 전화 오는 게 드물잖아요. 그러다 보니 청와대에서 전화 온 것처럼 야단이었죠. 살던 동네에서 나 모르면 간첩이었다구요. 지금도 그때 도움을 준 분들에게 한없이 고마워요. 그 분들은 지금 제 모습을 굉장히 대견스러워하세요. 신기하게도 고통스런 기억보다 따뜻했던 기억만 남게 돼요. 나이가 들면 여유로워진다는 말이 맞나봐요. 무엇보다 다행인 건 부모님께서 건강하게 살고 계시는 겁니다”
1년에 한두 편의 작품은 꼭 한다. 좋은 시나리오를 받으면 무대에 서고 싶은 건 여전하다. 그는 라디오 진행도 연기의 연장이라고 생각한다.
“해보고 싶고 원하는 건 운좋게도 다 해봤어요. 단 하나 못 이룬 꿈이 있어요. 영화감독입니다. 좋은 시나리오 작업을 위해 준비 중이긴 한데… 또 ‘난타’의 맥을 이을 수 있는 작품도 구상 중입니다. 하는 일마다 대박난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하지만 그건 욕심이고 바람이죠. 노력한다고 되는 건 아니더라구요. 사람들은 첫 작품이 ‘난타’인 줄 알지만 그 전에 실패한 작품도 많았어요. 실제로 ‘난타’도 일주일 동안 관객이 들지 않아 접으려고 했어요. 지금도 난타 공연이 이러지던 그날을 생각하면 가슴 뭉클합니다”
글 / 강수정(객원기자) 사진 / 박남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