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고 청아한 목소리로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소프라노 신영옥. 그녀가 시크릿 가든과의 협연을 위해 지난 5월 초 고국을 방문했다. 공연을 이틀 앞두고 신라호텔 커피숍에서 만난 그녀는 시차 때문에 힘들어하면서도 시종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인터뷰에 응했다.
“크로스오버는 제게 흥미로운 작업이에요”
유난히 비가 잦은 봄이다. 소프라노 신영옥을 만나던 날도 시원하게 봄비가 뿌리고 있었다. 그녀가 머무는 신라호텔에 도착하자 잠시 후 약간 졸린 표정으로 그녀가 나타났다. 하늘색 니트에 면바지 차림의 그녀는 무대에서 보던 화려함과는 달리 소박하고 청순해 보였다.

통유리창에 빗물이 흐르는 걸 뒤늦게 보고서 깜짝 놀란다. “비 오는 날을 무척 좋아한다”면서 졸린 기색도 잠시, 이내 표정이 밝아진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 시크릿 가든과 함께 발표한 새 앨범 「The Ultimate Secret Garden」도 비에 젖은 듯 촉촉한 곡들로 가득하다.
지난 5월 8일, 신영옥은 세계적인 뉴에이지 듀오 시크릿 가든과 함께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무대에 올랐다. 시크릿 가든은 노르웨이 출신의 키보디스트 롤프 러블랜드와 아일랜드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 피오뉼라 셰리가 만든 뉴에이지 연주 듀오. 그들의 음악은 ‘젊은이의 양지’ ‘애인’ ‘신데렐라’ 등 드라마와 각종 CF의 배경음악으로 쓰이면서 우리 귀에 친숙해졌다. 그들은 국내에서도 이미 뉴에이지 애호가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북유럽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그들의 연주는 단조 위주의 차분한 선율로 서늘하면서도 아름다운 곡을 만들어낸다. 시크릿 가든과 함께 만든 새 앨범에서 신영옥이 부른 노래는 세 곡으로, 시크릿 가든의 아름다운 연주곡에 영어 가사를 붙여 부른 노래들이다. 이 노래들은 시크릿 가든이 세계적인 소프라노 신영옥에게 헌정한 곡들이기도 하다. 공연에서는 음반에 수록된 ‘Swan’ ‘Hymn To Hope’ ‘Song From A Secret Garden’ 외에도 네 곡을 더 불러 관객의 뜨거운 환호를 이끌어냈고, 이에 감동한 신영옥은 잠시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클래식 음악가로서 크로스오버에 편견 없이 다가가고 있는 그녀의 음악과 일상에 관한 솔직하고 담백한 대화.
「My song」 앨범을 비롯해서 시크릿 가든과 함께 한 최근 앨범과 공연까지, 요즘 부쩍 크로스오버에 관심이 많아지신 것 같습니다. 클래식 음악가들의 크로스오버 움직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재미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오페라 가수가 크로스오버를 한다는 건 일종의 모험이에요. 중요한 건 본인이 그걸 감당할 수 있느냐 하는 거죠. 기꺼이 즐겁게 참여할 수 있다면 장르는 중요한 게 아니라고 봐요. 단, 너무 성악적이면 안 되겠죠. 제 경우는 그다지 드라마틱한 소프라노가 아니라서 그런지 뉴에이지 음악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질 수 있는 것 같아요. 어렸을 때 리틀엔젤스 단원으로 있으면서 뮤지컬 음악을 했던 것도 도움이 되구요. 어차피 랩이나 록을 하는 게 아니잖아요.
시크릿 가든과는 어떤 인연으로 앨범 작업과 공연을 함께 하게 됐나요?
전 유난히 비 오는 날을 좋아해요. 그래서 비 오는 날의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단조 위주의 음악을 좋아하죠. 시크릿 가든의 음악이 그렇잖아요. 게다가 시크릿 가든과는 음반사가 같아요. 공연이나 음반을 통해 제 팬이 됐다면서 함께 작업하자고 먼저 요청을 하더군요. 저 역시 시크릿 가든의 음악을 평소에 즐겨 들었어요. 듣다 보면 소름 돋을 정도로 좋을 때가 있어요. 특히 비 오는 날 창 밖을 보면서 들으면 가슴 한 곳에 꽂히는 느낌이 들어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맺히기도 하죠. 그런데 들을 때는 더없이 편한데 막상 노래로 부르자니 힘이 들더군요. 바이올린을 들어내고 내 목소리를 얹는 셈이니 아무래도 음이 너무 낮더라구요. 시간이 너무 촉박해서 음반엔 세 곡밖에 못 넣었지만 곡들이 다 좋아서 모두 부르고 싶었을 정도예요.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알고 있는데, 뉴에이지 음악에 대한 거부감은 없는지요.
저는 뉴에이지 음악을 배척하지 않아요. 사람마다 자기 기준이라는 게 있잖아요. 음악이란 건 좋고 자신에게 맞으면 되는 거지, 종교적 색안경을 끼고 음악을 보는 건 맞지 않다고 생각해요. 앞으로도 뉴에이지 음악과의 크로스오버는 제게 계속 흥미로운 작업이 될 거예요.
스스로 생각했을 때 자신의 목소리가 갖는 매력은 무엇인가요?
음… 글쎄, 저는 제 목소리니까 잘 모르지만 많은 분들이 말씀하시는 건 아무래도 맑은 음색이죠. 맑은 소리인 ‘두성’은 보통 어릴 때 잘 나오는 소리인데 저는 아직도 두성이 잘 나오는 편이에요. 비브라토가 절제된 스트레이트 톤으로 노래하기 때문에 더 청아하게 들리기도 하구요. 이번 앨범에 실린 ‘Hymn To Hope’라는 곡에서 그런 창법을 구사해봤어요.
그동안 출연했던 오페라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무대는 어떤건가요?

아무래도 갑작스럽게 무대에 올라가야 했던 경우가 기억에 오래 남죠. 언젠가 메트로폴리탄에서 밤 10시가 다 돼서 전화가 왔어요. 바로 다음 날 있을 오페라 ‘청교도’ 무대에 오를 수 있겠냐구요. ‘엘비라’ 역이었는데 오리지널 캐스트와 언더 캐스트 모두 사정상 무대에 설 수 없는 급박한 상황이었죠. 아침 10시까지 연락을 달라고 해서 전화를 끊었는데, 마침 7개월 전에 ‘청교도’를 무척 즐겁게 공연한 적이 있었어요. 그 뒤로 샤워할 때나 청소할 때 곧잘 그 노래들을 부르곤 해서 기억에 많이 남아 있었죠. 결국 공연 1시간 전에 방에서 동선을 맞춰보고 공연 10분 전에 무대에서 최종으로 동선을 짠 다음 곧바로 무대에 올랐어요. 공연은 물론 아주 성공적이었죠. 그런 일은 자주 있는 일도 아니고 스릴도 있어서 대단히 재밌었어요.
세계적인 소프라노이면서도 평소에 꾸준히 레슨을 받는다고 들었습니다. 당신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내가 보는 나는 객관적일 수 없어요. 그래서 다른 누군가가 고쳐주는 것이 필요한 거죠. 계속해서 레슨을 받고 소리를 가다듬어야 좋은 음색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주로 뉴욕 매니스 음대 교수님께 레슨을 받고 있는데, 사실 메트로폴리탄의 많은 성악가들이 그렇게 하고 있어요. 보이스 레슨은 물론이고 발음을 교정받는 코칭도 따로 받고 있죠. 이번에 노래한 ‘스완’도 미국에 있는 코치에게 전화를 걸어 코칭을 받았어요. 무대에 오른다는 건 그만큼 엄청난 투자가 집중되는 일이에요.
클래식 이외에 즐겨 듣는 음악은 어떤 것들입니까?
한국 음악을 자주 듣는 건 아니에요. 가요는 가끔 들어요. 언젠가 나갔던 인터뷰 기사에서 제가 이효리의 ‘10 minutes’를 자주 듣는다고 나왔는데, 아이고 그건 아니구요.(웃음) 가요는 종종 한국어 라디오 방송을 들을 때 듣는 정도예요. 뉴에이지 음악은 전부터 꾸준히 들어왔어요. 특히 피아니스트 마이클 호페를 좋아합니다.
노래 외에 특히 관심 있는 분야가 있나요?
패션이나 인테리어 디자인 쪽에 관심이 많아요. 언젠가 직접 공부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해요. 책방에 가면 특히 인테리어 관련 서적을 많이 봐요. 뉴욕의 제 집도 제가 나름대로 인테리어를 해놨죠. 어디에 가든 작고 귀여운 소품들을 보면 꼭 사오는 편인데, 그런 소품들로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았어요. 향수도 모아요. 그날 그날의 기분에 따라 베개에 향수를 뿌리고 혼자 좋아하기도 하고.(웃음) 사람들이 우리집에 오면 딱 저 같다고 말해요.
아직 미혼이신데 혼자 지내는 것이 외롭지는 않나요?
외로울 때도 많죠. 게다가 울보라서 좋은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다가 감동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곤 해요. 돌아가신 엄마 생각나면 또 눈물이 나고… 커플 친구를 만나면 부럽기도 하구요. 전혀 외롭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죠. 하지만 싱글이라서 좋은 점도 많아요. 친구도 폭넓게 사귈 수 있구요. 나이 먹어가면서 점점 더 그렇게 되는 것 같아요. 열두 살 위도, 열 두 살 아래도 친구가 되더라구요. 너도 친구고, 나도 친구고… 웃음) 근데 참 습관이라는 게 무서워요. 혼자 오래 살아서 그런지 어디를 놀러 가도 누구를 만나도 조금 지나면 어서 집에 가고 싶어져요. 어서 내 자리, 나만의 공간으로 돌아가야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만큼 혼자 지내는 것에 익숙해진 거겠죠.
음식은 잘 해서 드시나요?
그럼요. 요리하는 것을 굉장히 좋아하고 또 잘 해 먹어요. 주로 한식을 해 먹는데 아침에도 꼭 밥을 먹어요. 20년 외국 생활하면서 아침부터 밥 챙겨먹는 사람은 아마 저밖에 없을걸요.(웃음) 평소에 한식 재료들을 알뜰하게 챙겨놔요. 제가 좋아하는 미역이랑 고기, 파, 고추 등 재료별로 분류해놓고 언제든지 꺼내 쓸 수 있게 냉장고에 넣어두죠. 특히 된장찌개를 제일 좋아해요.
역시 노래 하시는 분이라 감성이 굉장히 풍부한 것 같아요.
나이만 먹었지 아직까지 에너지는 많은 편이에요.(웃음) 귀엽고 예쁜 거 보면 너무 좋아하고… 그렇다고 공주는 아니에요. 정장이나 공주 옷은 잘 안 입거든요. 평소에는 늘 캐주얼 차림으로 다녀요. 가끔 아버지가 와서 보시고는 미국거지 따로 없다고 말씀하실 정도예요.
아버님이 무척 멋쟁이라고 들었어요. 시집가라고 잔소리는 안 하세요?
맞아요. 우리 아버지 같은 멋쟁이도 없을 거예요. 칠순이 넘으셨는데도 매일 거르지 않고 운동을 하셔서 50대 정도로밖에 안 보여요. 우리 부녀는 정말 친해요. 전화도 엄청 자주 하는데 둘이 통화하다 보면 한 시간은 훌쩍 지나가죠. 통화하다가 너무 재밌어서 서로 뒤로 넘어간다니까요.(웃음) 아버지는 이북 분이라서 그쪽 사투리가 있으세요. 막내딸인 저를 항상 ‘야 야 이쁜아’라고 부르시죠. 세 딸 중에 아버지가 특히 저를 예뻐하시는데, 서울 집에 가보면 온통 제 사진으로 도배를 해놓으셨을 정도예요. 그래서 두 언니들이 ‘우리는 자식도 아니냐’며 불평할 때도 있어요. 당신 딸 나이 먹은 것은 생각 안 하시고 저더러 세상 물정 너무 모른다며 마냥 애기처럼 보세요. 말씀으로는 어서 좋은 짝 만나야 한다고 하시지만 아마 제가 결혼한다면 세상에서 제일 서운해할 사람이 우리 아버지일 거예요.
성악가로서 신영옥의 철학, 음악적 신념은 어떤 건가요?
예전에는 무조건 깐깐하게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고 연습도 그렇게 했어요. 스스로를 굉장히 채찍질하고 괴롭히는 성격이었죠. 만족을 못하는 스타일이고… 그런데 한해 한해 무대에 서면서 다행히 많이 느긋해졌다는 걸 느껴요. 지금은 나 스스로를 고달프게 하고 싶지는 않아요. 여유 있게 즐기면서 노래하는 것이 저 스스로를 위해서도, 듣는 이를 위해서도 가장 좋다는 것이 지금의 제 생각이에요.
글 / 박연정 기자 사진 제공 / 빈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