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Pont’(알포인트)에서 다시 만나다 지적인 카리스마 감우성

‘R-Pont’(알포인트)에서 다시 만나다 지적인 카리스마 감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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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건이 힘들수록 영화 잘 만들겠다는 욕심은 한없이 커져가요”

데뷔작 ‘결혼은 미친 짓이다’로 충무로에는 신선한 발견을, 관객에겐 흡족한 매력을 선사했던 배우 감우성. 연기 경력에 비해 영화 데뷔가 늦었던 만큼 차기작에 대한 기대와 관심은, 기다리는 이들에게 약간의 조급증까지 동반했다. ‘전쟁’과 ‘공포’의 결합이라는 색다른 시도가 돋보이는 영화 ‘알포인트’로 2년여 만에 관객 앞에 다시 선 감우성, 그의 매력은 여전히 유효했다.

세련된 도시남의 이미지, 군복으로 갈아입다

스크린에서 감우성(33)을 다시 만나는 건, 첫 영화 ‘결혼은 미친 짓이다’ 이후 정확히 2년 4개월 만이다. 그의 두번째 개봉작 ‘알포인트(R-Point)’에선 예의 그 말랑말랑함을 찾아볼 수 없다.  영화 밖에서 만난 모습도 그 연장선상에 있는 듯했다. 외모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전과는 좀 다르다. 여전히 부드럽고 지적이지만, 이전에 비하면 부드러움이 덜하다. 대신, 다소 차갑고 서늘한 매력이 그 공백을 대체한 느낌이다.

혹독했다는 현지 촬영의 여파인지 눈에 띄게 야윈 모습. 올 2월부터 약 3개월 동안 캄보디아에서 올로케이션으로 촬영을 강행하면서 몸이 많이 축났다고 한다. 그러나 자고로 살이 빠지면 ‘옷태’는 더욱 살아나는 법. 라인이 자연스럽게 떨어지는 노타이의 슈트 차림이 제대로 멋스럽다. 야윈 얼굴이 다소 초췌해 보이지만 그래서 더 깊이감 있어 보인다. 하긴 영화 한 편 더 했다고 사람이 달라지진 않았을 터. 너무 날카롭지도, 너무 둔하지도 않은 섬세한 콧날, 쌍꺼풀 없이 약간 처진 눈, 체격에 걸맞게 적당히 벌어진 어깨와 느끼하지 않으면서 나직한 목소리… 외모뿐 아니다. 문장의 호응에 거스름이 없는 세련된 화법, 아닌 척(?)하면서 은근히 패셔너블한 감각까지, 그가 가지고 있던 조화로움의 ‘실루엣’은 사실 달라진 것이 없다.

“일부러 감량을 한 건 아니고 저절로 빠졌어요. 섭씨 45도가 넘는 더위에 완전 군장을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더라구요. 저를 비롯해 장티푸스에 걸린 스태프도 많았어요. 촬영중에 고열로 고생하기도 했죠. 그런 건 내 의지로 바꿀 수 없는 종류의 어려움이잖아요.”

사실 감우성은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국민 배우’ 타입은 아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의 팬은 대부분 여성들, 그 중에서도 20대 중반부터 30대에 이르는 연령대가 두텁다. 또한 단연 싱글들에게 많은 지지를 얻고 있다. 외모는 물론이고 각종 인터뷰를 통해 접하는 그의 태도, 성향을 보건대, 소위 ‘쿨한’ 이미지의 전형에 가깝기 때문이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가 그러한 그의 팬 성향을 한판에 ‘굳히기’했다고도 볼 수 있다.

실제로 그는 데뷔 10년 만에 선택한 자신의 첫 영화에서 다시 한번 야무진 면모를 보여줬다. 연기력은 물론 영화를 고르는 안목까지 포함해서. 1991년 MBC 공채 탤런트로 데뷔한 그는 영화로 가기 위해 적지않은 세월을 보내며 신중하게 ‘호흡 조절’을 했고, 첫 영화로 삼기에 여러모로 무난한 영화를 선택해 관객과 평단 모두에게서 조용한 성공을 거두었다. ‘결혼은…’에서 그는 다분히 ‘나쁜 남자’인 준영을 연기했지만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매력적인 캐릭터로 살려냈다. 사람들은 일제히 그를 ‘굿 맨’으로 인정했고 기대해볼 만한 남자배우의 리스트에 기꺼이 그의 이름을 올렸다.

“까다롭다는 평을 자주 듣는데, 그건 오해예요. 제가 캐스팅 1순위 스타도 아니고, 그렇다 보니 들어오는 시나리오도 그리 많지 않아요. 그중에서 실제로 좋은 작품은 많지 않고, 운 좋으면 한 편 정도라는 거죠. 그렇다면 나머지 제의는 거절할 수밖에 없는 거구요. ‘알포인트’는 전쟁과 관련한 독특한 소재와 심리적 공포를 접목했다는 게 참신하단 생각이 들어서  출연을 결정했어요. 화려한 영화는 아니지만 등장 인물들을 쫓아가다 보면 색다른 재미를 느끼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영화 ‘알포인트’는 ‘하얀전쟁’ ‘텔미썸딩’의 시나리오를 쓴 공수창 감독의 데뷔작이다. 시간적 배경은 베트남전이 막바지에 이른 1972년. 로미오 포인트(작전지역명 ‘R-Point’)에서 이미 6개월 전 사망한 것으로 보고된 부대원들의 구조 요청 무전 신호가 들어온다. 군 당국에서는 이들의 생존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몇 가지 혜택을 약속하며 수색부대원을 선발한다. 깐깐한 선임하사를 비롯해 ‘오합지졸’이란 말이 딱 맞을 부대원 일곱 명이 차출되고, 작전 때마다 반드시 피를 본다는 불길한 징크스를 가진 최태인(감우성 분) 대위가 이들의 지휘를 맡게 된다.

수색을 위해 이들이 도착한 알포인트는 과거 중국이 베트남인을 무차별 학살했던 곳으로, 베트남을 지배했던 프랑스의 한 부대가 하루아침에 몰살당해 그 피가 호수를 가득 물들였다는 흉흉한 곳이기도 하다. 알포인트에 도착한 수색대는, 죽은 자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현지인들이 호수를 메우고 지었다는 사원에서 여장을 푼다. 밤낮없이 안개가 끼는 알포인트에서 병사들은 귀신에 홀려 공포에 떨고, 그 공포감 때문에 서로를 믿지 못하다가 결국 서로를 향해 총을 겨누며 차례차례 죽어간다.

“군인 연기가 특별히 어렵진 않았어요. 사실 대한민국 남자라면 모두 군복에 친숙하죠. 전쟁에 대한 아픈 기억 때문에 전쟁을 환멸하는 주인공의 회의적 성향을 기본에 깔고 캐릭터를 표현했습니다. 사실 연기하기에 큰 어려움은 없었어요. 캄보디아는 연기하기 상당히 좋은 무대였거든요. 실내 촬영이 이뤄졌던 낡은 저택은 실제로 많은 학대와 학살이 자행됐던 곳이고, 벽에 총탄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을 정도죠. 그 안에 손도 넣어보기도 했어요. 그런 곳이기 때문에 장난스런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 같아요. 역사 속에서 살해가 자행됐던 곳이니까. 더구나 밤 신이 많았는데, 그 저택에 혼자 들어가지는 못하겠더군요. 구조 자체가 미로처럼 되어 있기도 하구요.”

영화 두 편 연속 촬영하고 요즘은 전원 생활중

촬영이 이루어졌던 캄보디아 현지는 오지나 다름없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오락가락하는 날씨와 열악한 환경에서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다른 스태프들과 마찬가지로 감우성 역시 건강이 날로 악화됐고, 급기야는 장티푸스, 급성 A형 간염, 담낭염에 한꺼번에 걸려 쓰러지기까지 했다. 치료를 위해 급하게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촬영할 때는 견딜 만했다. 따라주지 않는 날씨와 세트 설치 등의 문제로 섭씨 40℃가 넘는 더위 속에서 무한정 기다릴 때는 그야말로 고역이 따로 없었다. 정신적, 육체적 괴로움을 잊기 위해 그는 일부러 농구와 족구 등 스포츠에 열중했다. 공간이 마땅찮으면 한시간씩 혼자 줄넘기를 하기도 했다. 또 배 위에서 촬영할 때는 틈틈이 바다 낚시와 스쿠버다이빙을 즐겼다. 그렇게 해서 잡아올린 물고기들로 즉석에서 생선회를 떠 스태프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단다.

“고생이야 많았죠. 그런데 여건이 힘들수록 영화를 잘 만들어야겠다는 오기가 발동해요. 욕심이 한없이 올라가죠. 완성된 영화를 보니, 연기를 아주 잘하는 배우들과 작업을 했구나 하는 점에서 만족스럽습니다. 영화에 참여한 스태프들의 열정과 인내심은 단연 최고였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개봉한 ‘알포인트’ 외에도 그의 또다른 영화가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꽃섬’의 송일곤 감독과 함께 작업한 영화 ‘거미숲’이 9월 개봉을 앞두고 있는 것. 9월 17일부터 스페인에서 열리는 제52회 산세바스티안 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되기도 한 ‘거미숲’은, TV 프로그램 PD가 취재를 위해 유령이 나온다는 거미숲을 찾았다가 의문의 살인 사건에 연루된다는 미스터리 스릴러다. 감우성은 이 영화에서 ‘섬’의 서정과 함께 또다른 종류의 ‘공포’를 보여준다. 실제로는 ‘거미숲’이 ‘알포인트’보다 먼저 촬영됐으나 개봉 순으로 따지면 그 순서가 바뀐 셈. 짧은 시간 차로 두 영화를 연속 촬영한 탓에 건강도 많이 나빠졌다고 한다.

연속해서 두번째, 세번째 영화를 마무리 지은 그는 요즘, 얼마 전 이사한 양수리 전원 주택에서 휴식 같은 생활을 즐기고 있다. 통나무집으로 리노베이션한 대지 150평, 건평 60평의 넓은 집에서 집 앞 텃밭을 가꾸며 자연과 더불어 사는 지금의 생활은 이미 오래전부터 꿈꿔온 생활이라 한다. 데뷔 초부터 10년째 사귀어온 여자친구와 결혼할 생각이지만 당장 구체적인 계획을 세운 것은 아니다. 말 없이 뒤에서 그를 배려하고 뒷바라지해주는 여자친구는 동료 탤런트 출신 강민아씨로 영화 ‘접속’에서 김태우의 여자친구로 출연했던 미모의 여성이다. 날짜를 잡은 것은 아니지만 ‘결혼은 미친 짓이다’ 개봉 당시부터 그는 그녀와 결혼할 뜻을 공공연하게 밝혀왔다. 오랜 시간을 한결같이 곁에 있어준 사람이기 때문이다.

배우 감우성이 오랜 ‘호흡 조절’ 끝에 시작한 영화에의 도전은 이제 겨우 세 편에 불과하지만 벌써부터 흥미진진하다. 도회적으로 각인된 이미지를 벗고 선뜻 군복을 갈아입고 나타난 그의 모습도 생각보다 낯설진 않다. 그의 네번째 ‘선택’, 우리의 네번째 ‘발견’이 일찌감치 궁금해질 따름이다.

글 / 박연정 기자  사진 / 정지윤(경향신문 기자)·이건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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