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김완선이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누드 송사로 인해 인생의 가장 힘든 시기를 이겨내고,
새 앨범을 준비중인 것. 당돌한 10대 댄스 가수로 데뷔한 지 벌써 18년째.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딛고 일어나 팬들 앞에 선 그녀이기에, 이번에는 어떤 모습일지 기대가 된다.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힘이 부친 송사를 겨우 마무리하고 다시 기지개를 켜는 그녀. 여전히 그녀에게 중독되고 싶어하는 팬들을 만나기 위해 힘을 내고 있는 그녀. 바로 가수 김완선(35)이다.
‘한국의 마돈나’로 가요계를 평정한 당돌한 10대
1986년 가요계는 10대 여가수 김완선으로 시끌벅적했다. ‘나 오늘, 오늘 밤은 어둠이 무서워요. 무심한 밤새 소리 구슬피 들려…’로 시작하는 ‘오늘밤’이라는 노래를 화려한 춤과 함께 선보인 김완선. 그동안 가요계는 가창력 중심의 ‘오디오형’ 가수만 봐왔기에, 춤과 노래를 겸비한 ‘비디오형’ 가수의 등장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외모에서부터 성숙함이 물씬 풍기기 때문에 10대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1집 앨범인 「오늘밤」이 나오기 전부터 방송과 라디오를 탔고, 오래지 않아 수많은 남성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아버렸다. 사람들은 그녀를 ‘한국의 마돈나’라고 부르면서 그녀의 등장을 반겼다.
하지만 그녀의 데뷔는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쉽게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요즘 말로 하면 ‘기획’된 가수였던 것. 당시 ‘인순이와 리듬터치’의 매니저였던 한백희씨가 바로 그녀의 이모였다. 어릴 때부터 팝송을 즐겨 듣고, 피아노도 칠 줄 아는 그녀의 음악적 ‘끼’를 발견하고 가수 데뷔를 위해 3년간 준비시켰던 것이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시도였다. 3년간 그녀는 춤을 배웠고, 거문고 등 국악기도 연주했다. 심지어는 12발 상모(농악에서 사용하는 모자로 긴 끈을 머리로 돌린다)도 배웠다.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쳐왔기 때문에 작곡과 편곡도 어렵지 않게 배웠다. 목소리는 그룹 산울림의 둘째인 김창훈씨가 1년 동안 트레이닝시켰다. 데뷔 1년 전부터는 인순이와 리듬터치의 일원으로 무대 위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무대 공포증을 없애기 위한 사전 포석이었다. 이 모든 것이 김완선을 한국의 가수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가수’로 키워내기 위한 의도된 트레이닝이었다. 후에 그녀가 일본, 홍콩, 대만의 가요계를 노크한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제가 가수가 되기 위한 트레이닝을 받고 있을 때, 이수만씨가 사무실에 놀러 온 적이 있어요. 당시에는 보기 드문 시도였기 때문에 많이 놀랐을 거예요. 제 모습을 보고 힌트를 얻지 않았을까 싶어요.”
3년간 착실히 준비했으므로 그녀는 무대에 서는 것이 공포스럽지 않았다. 그동안 갈고 닦은 실력을 뽐내기만 하면 됐다. 무대 위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10대의 당돌함이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혜성처럼 세상에 나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1986년 1집 「오늘밤」의 성공은 2집 「나홀로 뜰앞에서」(1987년)의 성공으로 이어졌다. 타이틀곡인 ‘나홀로 뜰앞에서’와 ‘리듬속의 그 춤을’을 연속적으로 히트시켰다. 10대들의 입에서는 김완선의 노래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고, 그녀의 춤을 얼마나 완벽하게 따라 하느냐가 열풍이었다.
1년마다 앨범을 한 장씩 내는데, 모두 성공했다. 3집의 타이틀곡인 ‘나홀로 춤을 추긴 너무 외로워’가 히트했고, 4집에서는 ‘기분 좋은 날’ ‘이젠 잊기로 해요’라는 노래로 건재함을 과시했다.
그녀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앨범인 5집에서는 비디오형 가수라는 꼬리표를 떼어내기 위해 6개월간 칩거하면서 만들었다. 마음이 잘 맞는 손무현과의 작업이었기에 성공할 자신이 있었다. 삼바 리듬이 귀에 쏙쏙 들어오는 ‘나만의 것’으로 그녀의 가창력을 뽐내기 시작했다. 이 노래와 함께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와 ‘가장 무도회’로 댄스 가수로서 한껏 매력을 뿜어냈다.
그리고 손무현과 함께 한 6집 「Sadness」(1992년)로 20만 장의 앨범 판매고를 올려 주위를 놀라게 했다. 86년 데뷔부터 줄곧 그녀는 성공가도를 달렸다. 어느 누구도 이렇게 긴 시간 동안 사랑받을 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섹시 퀸, 댄스 퀸의 김완선은 남성 팬들의 극진한 사랑을 받았다. 특히 국군 아저씨(?)들에게는 ‘60만 장병의 뽀빠이’ 같은 신화적 존재였다. 그녀가 국군 위문 무대에 서면 그야말로 ‘난리’였다.
1986년 KBS 가요대상 신인여자가수상, 1987·1988·1990·1991년 KBS 가요대상 가수상, 1989·1992년 골든 디스크상 본상, 1991년 MBC 10대 가수가요제 가수상. 그녀의 성공신화는 언제까지 계속될까가 사람들의 관심거리가 되었던 시절이었다.
은퇴 선언 후 대만으로 넘어간 ‘한류’의 원조
‘집에 돌아와 매일 울었어요’
1992년 11월에 모 스포츠신문에 실린 김완선관련 기사 제목이다. 6년간 댄스 뮤직 정상을 지켰던 그녀의 갑작스런 은퇴는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제가 직접 인터뷰한 것이 1997년에 나온 7집 「탤런트」 이후였을 정도로 당시 제 의지대로 할 수 있었던 것이 거의 없었어요. 시스템 자체가 지금과 무척 다르기 때문에 저를 돌봐준 사람들을 원망하는 건 아니에요. 당시에는 빡빡한 스케줄 때문에 너무 지쳤어요.”
그녀의 측근에 따르면 당시에는 해외 공연을 가도 쇼핑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했을 정도였단다. 매니저가 짜준 스케줄대로 움직여야 했던 것. 그녀의 갑작스런 은퇴는 많은 추측을 불러일으켰다. ‘결혼 때문이다’라는 소문도 있었지만, 그녀는 모두 ‘추측성 기사’였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녀는 가요계를 떠나지 않았다. 아니 떠나지 못했다. 은퇴 선언 5개월 만에 그녀의 컴백 무대가 있을 것이다, 유덕화와 함께 듀엣 앨범을 준비한다, 무성한 소문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방송국과 그녀의 사정으로 복귀는 이뤄지지 않았고, 그녀는 활동 무대를 홍콩과 대만으로 옮겨 잠시 한국을 떠났다.
그녀는 아무도 모르게 ‘아시아의 가수’로 서기 위한 준비를 다지고 있었다. 아무런 정보나 도움 없이 일본에 가서 음반 준비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인에 대한 텃세가 심하다는 것을 알고 홍콩과 대만으로 턴을 한 것. 알란 탐과 함께 듀엣 앨범 「헤어질 수 없는 우리」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홍콩과 대만 무대에 데뷔했다.
그녀의 진가를 알아 준 곳은 대만이었다. 94년 대만에서 「퍼스트 터치」라는 첫 앨범을 냈다. 당시 대만에서는 춤을 추면서 노래하는 가수가 거의 없었다. 글래머러스한 몸매를 자랑하며 현란하게 춤을 추는 가수 김완선에 대한 대만의 관심은 예상을 뛰어넘었다. ‘최초의 한류 스타’가 탄생한 것이다. 당시 인터넷이 있었다면 그녀의 성공소식은 매 시간 우리들에게 알려졌을 것이다.
“당시 제가 중국어를 서툴게 했는데, 그런 모습이 애기같이 귀여웠나 봐요. 말을 더이상 배우지 말라는 주문을 했을 정도니까요. 대만에서 3집까지 냈는데, 한국 가수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남겨뒀어요. 그런데 한국에는 잘못 알려진 게 많았어요.”
2년간의 대만 활동은 성공적이었다. 2집 「극도매력」(1995년), 3집 「미미 후후」(1996년)까지 냈다. 현지에서는 ‘댄싱 퀸’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리고 은퇴 발표 4년 만에 한국에서의 컴백 무대를 준비, 1996년 「이노센스」를 발표하고 ‘탤런트’라는 타이틀곡으로 활동을 재개했다.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를 건너오며…
반신반의했다. “과연 그 나이에 성공할 수 있을까?”라는 사람들의 의구심을 보기 좋게 한방에 날려버렸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지 5년 만인 2002년, 8집 앨범「S& Remake」를 발표한 것. 그것도 댄스 음악을 들고 나와 당당히 성공했다.
“원래는 2001년에 내려고 했는데, 준비를 철저히 하다 보니 2002년에 나오게 됐어요. 당시 가수들이 많이 나왔는데, 제가 가장 성공한 케이스였죠.(웃음)”
꼬박 1년을 공들여 만든 앨범이었다. 이 앨범으로 가수 김완선은 가창력까지 겸비한 가수로 인정받았다. 그렇게 그녀는 오뚝이처럼 일어났다.
하지만, 앨범이 나온 지 1년 만에 그녀는 인생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시기를 맞이한다. 2003년 8월 김완선은 음악이 아닌 ‘누드’로 세상을 시끄럽게 했다. 기획사였던 팬엔터테인먼트가 ‘전속계약을 어기고 다른 회사와 손잡고 누드 동영상을 촬영했다’며 그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낸 것.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든 때였죠. 지인들이 옆에서 힘을 복돋워주지 않았으면 버티지 못했을 거예요. 다 끝난 일이니까 생각하기도 싫어요.”
다행히 지난 7월 전 소속사인 팬엔터테인먼트와 화해,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그후로 김완선은 소속사와 매니저 없이 혼자 지내고 있다. 앞으로도 소속사 없이 활동할 계획이란다. 그동안 그녀는 집에서 책을 읽거나 비디오를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여행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당시의 고통 때문에 이곳 저곳 많이 다녔다. 특히 2주간 머물렀던 뉴욕이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이라고 한다.
그녀는 요즘 내년 봄 출시를 목표로 앨범을 준비중이다. 정규 앨범이 될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은 상태. 요즘도 쇼 프로그램에서 섭외가 들어오지만, 당분간은 앨범 준비에만 매달릴 작정이다. 가수는 노래로 팬들 앞에 서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별 생각 없이 즉흥적으로 결정한 일이 많아요. 하지만 이번 앨범은 많은 사람들과 충분히 의논해서 만들고 싶어요. 요즘은 인생을 즐기면서 일해야겠다 싶어요.”
그녀의 춤과 노래를 보려면 몇 개월을 더 기다려야 하지만, 기다리는 대상이 그녀이기에 기대감이 생긴다. 데뷔 시절 그녀가 보여줬던 에너지를 다시 보여주기를 바란다. 데뷔 때부터 그녀를 지켜봐준 팬들을 위해서라도.
글 / 최영진 기자 사진 / 김석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