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10년, 변신을 꿈꾸는 행복한 카리스마 한석규

영화 10년, 변신을 꿈꾸는 행복한 카리스마 한석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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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식구, 한 방에서 자지요"

세 아이 모아 놓고 동화 들려주며 행복해 하는 아빠, 그의 이름 앞에 붙던 카리스마라는 수식어가 무색할만큼 그에게선 믿음직한 아버지의 모습이 엿보인다. 올해로 불혹(不惑)이라는 마흔. 영화를 한 지 10년, 그의 10번째 영화 ‘주홍글씨’의 개봉을 앞두고좀처럼 밝히지 않는 가족 이야기와 그의 행보에 관한 프라이버시 인터뷰. 

동화 들려주는 아빠

가화만사성이라고 했다. ‘집안이 화목하면 모든 일이 잘 된다’는 말은 새삼 배우 한석규(40)에게서 읽을 수 있었다.

그는 ‘11월의 남자’다. 1964년 11월 3일생인 그는 동료 성우였던 임명주씨(38)와 98년 11월 22일 부산국제영화제 김동호 집행위원장의 주례로 결혼했다. 현재 세 아이를 두었다.

서울 잠원동 아파트에 신접살림을 차렸던 그는 최근 서초동 아파트로 이사했다. 종암동 한옥에서 자란 그는 “본가 같은 한옥으로 이사를 가고 싶었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포기했다”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그의 최근작은 제9회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 ‘주홍글씨’. 금지된 사랑의 파멸을 통해 그런 대가를 감수하는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지 않겠느냐고 묻는 스릴러를 가미한 멜로 드라마다. 한석규는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그가 극중에서 꿈꾸었던 것과 관련 있는 대답을 했다.

“우리 식구는 모두 한 방에서 잡니다. 다른 방이 없는 건 물론 아니죠. 그렇지만 한 방에서 오순도순 잡니다. 잠자리에 들 때가 가장 행복해요.”

잠자리 구도는 엄마·막내·장녀·아빠 순. 둘째의 자리는 이들의 아랫목이다. 몸부림을 자주, 심하게 치는 바람에 그렇게 굳어진 게 아니다. 한석규는 “처음부터 그 자리에서 잔다”면서 둘째의 모습이 떠오른 듯 환하게 웃었다.

한석규와 그의 아내는 성우 출신이다. 이들 부부는 성우 시절 경험을 되살려 세 아이에게 동화나 옛날 이야기를 실감나게 들려주곤 한다. 엄마 아빠가 등장 인물의 캐릭터와 극중 상황을 살려 실감나게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우고 듣는, 새끼토끼 같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들. 한석규의 상황 묘사에 웃음이 만발한 ‘홈 스위트 홈’이 절로 연상됐다. 

그는 또 “아내가 아이들에게 모두 모유를 먹였다”며 “두 돌이 안 된 막내는 요즘도 먹고 있다”고 말했다. “아내는 5남매의 막내, 난 4형제의 막내로 자라 식구가 많은 걸 좋아한다”면서 “앞으로 넷째를 가질 수도 있는데, 넷째를 낳으면 어디에 재우면 좋을는지 그런 고민도 해본다”고 밝혔다. 그 모습이 마냥 행복한 아빠, 그 자체였다.

“예능에 소질이 있는지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아무튼 셋 가운데 하나 정도는 부모의 영향을 받아 배우가 되겠다고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해요. 일찌감치 배우를 꿈꿀지, 뒤늦게 뛰어들지, 아니면 스스로 정한 자신의 길을 갈지, 두고 봐야죠.”

한석규는 이어 “요즘 2세 배우들이 맹활약을 하고 있다”면서 ‘주홍글씨’에 사진 작가로 출연한 김진근(33)의 예를 들었다. 김진근은 김진규·김보애씨의 아들. 그는 독고영재, 최민수, 허준호나 누나 김진아와 달리 영화배우를 꿈꾸지 않았다. 미국 미네소타주립대에서 건축학을 공부한 뒤 고려대 경영학과를 다니면서 뒤늦게 시작한 연극에 매료됐다. 알 파치노 등을 배출한 미국 뉴욕의 리 스트라버그 연극학교를 졸업한 뒤 귀국, 영화 ‘단적비연수’ ‘아카시아’ 등에 출연했다.

한석규 맞아?

한석규는 몰라볼 만큼 달라 보였다. 좀 야윈데다 짧게 깎은 머리와 꺼칠한 수염 탓인지, 부산영화제 폐막작 기자회견장에서 처음에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럴 정도로 그는 딴사람 같았다.

그는 “단정한 이미지에 변화를 주고 싶었다”며 다이어트를 부인했다. “대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65kg”이라는 것이다. 순간 이성재가 영화 ‘미술관 옆 동물원’에 출연하면서 안성기에게 감화받았다고 들려준 일화가 생각났다.

어느 날 안성기가 입고 출연한 빛 바랜 청바지가 너무 잘 어울려 이성재가 의상팀을 칭찬했다. 그런데 의상팀은 자기네가 준비한 게 아니라 본인이 가져온 옷이라고 했다.

이성재는 안성기에게 청바지가 잘 어울린다며 어디서 산 것이냐고 물었다. 안성기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산 지 20년 넘은 것 같다고 말했다. 그 순간 이성재는 ‘왜 안성기인지’, 그의 명성이 하루아침에 이뤄진 게 아니라는 걸 절감했다.

잠시 상념에 젖은 뒤 한석규에게 키를 물었다. 그는 “176.5cm인데 난 176cm라고 하고, 그렇게 소개된 걸 보고 마누라가 177cm라고 하지 왜 깎았느냐고 하더라”는 에피소드를 들려줬다. 그의 아내 말대로 176cm와 177cm는 어감이 분명히 달랐다.

네 가지 색깔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 ‘주홍글씨’에서 한석규는 형사반장 기훈 역을 맡았다. 치정 살인 혐의를 받는 사진관 여인(성현아)을 수사하는 기훈은 순종적인 첼리스트 아내(엄지원)를 사랑하면서도 재즈 싱어인 가희(이은주)와도 열정적인 사랑을 나눈다.

한석규는 ‘주홍글씨’에 대해 “인간의 탐욕을 주제로 다룬 영화를 하고 싶었는데 시나리오를 읽고 느낌이 ‘확’ 왔다”고 출연 동기를 밝혔다. “2004년 현대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많은 이야기를 함축적으로 담아낸 점이 좋았고, 또 영화 ‘접속’의 형식미를 능가할 만큼 2004년 현재의 이야기를 세련되게 포장한 점도 끌렸다”고 설명했다.

그가 극중에서 악역을 맡은 건 ‘서울의 달’ ‘넘버3’ 이후 이번이 세번째. 그는 “그간 주로 운신의 폭이 좁은 인물, 그 인물이 힘든 순간에 겪는 이야기를 연기했는데 기훈은 진폭이 넓은 인물이고 ‘주홍글씨’는 그가 가장 좋을 때 겪는 이야기여서 매력을 느꼈다”며 “악역은 묘한 쾌감, 시원한 해소감 같은 걸 준다”고 말했다.

그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그 이유는 ‘주홍글씨’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도 “내게 내재된 기훈적인 면을 최대로 살려 본능에 관한 연기를 펼쳤다” 예전에 그가 열연한 캐릭터와 다르다. 그가 거울을 보고 짓는 섬뜩한 표정을 비롯해 살인 용의자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정부와 열정적으로 몸을 섞고, 자신의 승용차에 갇힌 극한 상황에서 울부짖는 모습 등이 전율을 느끼게 한다.



“이제는 감독 하고 싶다”

한석규는 ‘주홍글씨’에서 파격적인 변신을 꾀했다. 베드신 연기는 그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그는 이전 베드신을 모두 더한 것보다 더 많은 베드신을 했고, 농도 짙은 베드신도 해냈다.

그는 “벗는 건 개의치 않았다”면서 “죽어 있는 베드신, 없어도 될 베드신, 배우의 몸만 보이는 베드신이 되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고 밝혔다. “기훈과 가희(이은주의 극중 이름)의 베드신, 두 남녀의 절절한 ‘사랑’이 녹아든 베드신을 한 만큼 관객들도 그렇게 봐줬으면 좋겠다”는 기대감도 드러냈다.

“배우는 아이를 낳는 심정으로 연기를 합니다. 최소 6개월 이상 정성들여, 최선을 다해 태교를 해요. 산모와 다른 점은 잘 낳기만 하면 된다는 거죠. 일단 선보이면(개봉하면) 끝이에요. 기르지는 않아도 돼요. 잘 낳으면 잘 크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엔 정말 가슴이 아파요.”

‘초록물고기’가 생각난 듯 그는 못내 아쉬워했다. 그런 그에게 항간에 그를 둘러싸고 나돈 ‘감독설’에 대해 물었다. 그는 “예전에 그런 질문을 받았을 때는 내가 하고 싶은 구체적인 이야기가 없었는데 요즘엔 문득문득 생겨 이제는 하고 싶다”고 밝혔다.

그렇다고 구체적인 계획이 있는 건 아니다. 그는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기다리는데, ‘왜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나’ 하고 기다리는데, 아무도 하지 않으면 스스로 저지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일례로 ‘천생연분’을 소재로 한 ‘사랑의 진정성’을 들었다. “각각 아내에 대해, 남편에 대해 천생연분이라고 확신하는 두 남녀가 만나 진짜 천생연분이라고 여기면서 겪는 아픔을 그려보고 싶다”고 했다.

또 “최근 누가 실화라고 들려준 이야기인데 미치고 팔짝 뛰겠더라”며 그 내용을 소개해줬다. “일곱 살 난 아이가 유괴됐다가 집에 무사히 돌아왔는데 콩팥을 하나 떼어갔더라”는 것이다.

“감독은 세상을 향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만들고 배우는 그것을 실어 나르는 사람이에요. 감독과 함께 배우로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던지는 것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 일이죠.”

그가 출연작을 정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게 바로 이야기의 시사성. 당대는 물론 후대의 관객들과 공유할 수 있는 그 무엇을 담고 있는 이야기인지, 그 이야기가 밀도 있게 구성돼 있는지를 꼼꼼하게 점검한다. “예전 같으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때 그런 작품을 기다렸다가 연기를 했을 텐데 이제는 다른 생각도 하게 된다”는 그가 과연 어떤 영화로, 언제 메가폰을 잡을지 주목된다.

가마꾼에서 키운 꿈

한석규는 1989년 동국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했다. 재학 시절 MBC 강변가요제에 ‘덧마루’라는 팀으로 참가, ‘길 잃은 친구에게’라는 노래로 동상을 받기도 했다. 90년 KBS 성우로 데뷔했고, 91년 MBC 탤런트 공채(20기)에 합격한 뒤 안방극장에서 활동했다. ‘우리들의 천국’ ‘아들과 딸’ 등을 거쳐 ‘서울의 달’로 스타덤에 올랐다.

탤런트 공채에 합격한 뒤 처음으로 출연한 드라마가 MBC 베스트셀러극장 ‘다리’. 이 드라마에서 그는 동기들과 함께 가마꾼 역을 맡았다. 그는 가마꾼의 위치, 상전의 행차 상황 등을 나름대로 분석, 준비를 철저히 했다.

당시에 대해 그는 “춘사 나운규 선생님의 첫 배역이 가마꾼이었다”면서 “선생님처럼 큰 인물이 되는 걸 꿈꿨다”고 기억했다. 또 “드라마가 방송될 때 식구들과 함께 봤는데 멀리 산등성이를 지나는 장면이어서 얼굴이 보이지 않아 민망했다”고 술회했다. 기분이 상할 수도 있다며 ‘다리’의 주인공 이름은 공개하지 말라고 거듭 당부했다. 그 세심함에서 새삼 그의 인간성을 읽을 수 있었다.

95년 개봉작 ‘닥터 봉’으로 충무로에 진출한 이래 그는 승승장구, 한국의 간판 배우로 풍미했다. ‘초록물고기’ ‘이중간첩’ 등 예외가 없지 않지만 ‘은행나무 침대’ ‘넘버3’ ‘접속’ ‘8월의 크리스마스’ ‘쉬리’ ‘텔미썸딩’ 등을 통해 최고의 ‘연기파’ 배우로, ‘흥행’ 배우로 각광받았다. 

영화를 한 지 10년, ‘주홍글씨’는 그의 열번째 영화이다. 올해로 불혹(不惑)이라는 마흔. 그는 “어떤 산 하나를 올라온 느낌”이라며 “이제부터 또다른 산을 올라가는 새로운 등정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몸도 마음도 가장 완벽하게 준비돼 있다”면서 “앞으로도 영화와 연기를 위해 모든 걸 걸겠다”고 역설했다.

지난달 제9회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 시사회가 끝난 뒤 있은 기자회견 장에서 어느 기자가 ‘주홍글씨’의 세 여배우에게 한석규의 단점을 한 가지씩만 밝혀달라고 요구했다. 세 여배우는 무척 곤란해하면서 결국 단점 아닌 단점을 소개했다.

이은주는 “너무 너무 가정적”이라고 꼽았다. “촬영을 앞두고 선배님이 아니라 기훈으로 보고 가희로서 사랑하는 마음을 연습하려고 돌아보면 선배님은 집에 전화를 하고 있었다”는 일례를 들었다. 성현아는 “술을 못 한다”며 “친목을 도모하고 싶어 함께 술을 마시고 싶었는데 한사코 거절했다”고 밝혔다. 엄지원은 “촬영장에 늘 똑같은 ‘추리닝’ 차림으로 왔다”고 말해 폭소를 자아냈다. 결혼 이후 안성기 등과 마찬가지로 스캔들 하나 없이 한국영화계를 굳건히 지켜온 한석규의 행보가 기대된다.

글 /배장수 (경향신문 전문위원)  사진/LJ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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