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밍아웃 후 4년…무소의 뿔처럼 혼자 걸어온 길 홍석천

커밍아웃 후 4년…무소의 뿔처럼 혼자 걸어온 길 홍석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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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석천이 커밍아웃을 한 지도 벌써 4년이 흘렀다. 거짓말하고 있는 자신이 싫어 커밍아웃을 한 후 그의 인생은 굽이굽이 돌아치는 갯물처럼 흘러왔다. 잘나가던 연예인에서 하루아침에 갈 곳 없는 실업자로 살았던 시간. 그러나 자신의 인생과 정면 승부를 한 지금 그는 행복한 미래를 꿈꾸는 예전의 그 모습으로 우리 앞에 다시 섰다. 

“잃은 것도 얻은 것도 많았던 시간… 이젠 가면을 벗고 당당히 설 수 있기에 행복한 미래만이 남았어요!”

10월 말경, 오픈 일주년 기념 파티 준비중

이태원 레스토랑에서는 ‘맘 좋은 사장님’

서울에서 가장 이국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공간 이태원. 황혼 무렵이면 이태원은 낮과 사뭇 다른 향기를 뿜어낸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시간, 7층 건물의 옥상에서 바라본 이태원은 동·서양이 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가정집을 개조해 올린 건물들 사이로 누구네 가정집의 마당이 보이고 정성스레 심어놓은 상추, 고추밭이 눈에 띈다. 그와 대조적으로 반짝이는 네온사인은 온통 외래어다. ‘BANGKOK’ ‘HOLLYWOOD’ ‘INDIAN RESTAURANT’ 등. 홍석천은 동양과 서양이 적절하게 섞여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는 이곳을 무척 좋아한다. 

“이태원은 이곳만의 독특한 색깔이 있어서 좋아요. 어쩐지 어색한 듯 하면서도 이 안에 세상의 모든 것이 담겨 있는 것 같아요. 저희 가게만 해도 찾는 손님들이 다양해요. 동양인, 서양인이 막 섞여 있으니까 서빙하려면 영어는 필수죠.”

그가 이태원에 레스토랑을 오픈한 지도 벌써 1년이 지났다. 지난해 10월 말경 오픈했으니 햇수로 2년이 된 셈이다. 불과 1년 전인데도, 그에겐 많은 변화가 있었다. 가게를 오픈했고 집을 이사했고 또 그토록 원하던 방송 복귀도 했다. 그것도 이 시대 최고인 작가 김수현의 드라마에서 김희애, 차인표, 이승연 등과 호흡을 맞췄다. 4년 전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일이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으로 지구촌이 들썩인 때 방송인 홍석천의 인생도 폭풍을 만난 듯 심하게 요동쳤다. 커밍아웃 때문이었다. 홍석천이 자신의 입으로 “나는 동성애자”라고 밝힌 것이다. 당시만 해도 우리 사회에서 동성애자의 설 자리는 없었다. 음지에서 타인의 눈치를 보며 ‘소문나지 않게’ 지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잘나가는 방송인이 커밍아웃이라는 걸 했다. 그는 왜 커밍아웃을 했을까?

“그때 제 나이가 서른 살이었어요. 근데 지난 30년을 돌아보니까 거짓으로 살아왔다 싶더라구요. 어린이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거짓말 하면 안된다’고 말하는 제가 정작 수십 년을 거짓말하며 살고 있더라구요. 커밍아웃을 한 후 가장 많이 듣는 말이 바로 ‘왜 커밍아웃을 했냐?’는 거예요. 제 대답은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예요. 행복해지기 위해서. 제게 솔직해지고 행복해지고 싶었어요. 지난 30년보다 앞으로 살 30년을 위해서 저는 커밍아웃을 했어요.”

홍석천은 커밍아웃을 하기까지 혼자 고민을 많이 했다고 한다. ‘지금 커밍아웃을 하면 내 자신에게는 솔직해지겠지만 앞으로 한동안은 방송국에서 나를 써주지 않을 거야. 한 1년은 일이 없겠지. 그럼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많이 힘들거야. 그래도 커밍아웃을 하자. 그래야 내가 행복해질 수 있어’ 하며 자신과의 싸움을 치열하게 했던 것. 그의 생각은 적중했다. 커밍아웃이라는 단어는 그에게서 방송 생활 8년 동안 쌓아올린 이름값과 경제력을 모두 빼앗아갔다.

‘완전한 사랑’으로 드라마 복귀

‘슬픈 연가’ 촬영 위해 3주간 뉴욕행

커밍아웃을 하기 전 그는 남산 자락에 위치한 28평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다. 그러나 커밍아웃을 한 지 1년도 채 안 돼 집을 팔았다. 경제적으로 힘들었기 때문이다. 또 가끔 거리를 나서면 사람들이 그에게 ‘감정 있는(?) 눈길’을 보내곤 했다. 그의 부모님은 아주 오랫동안 그를 설득했다. “지금이라도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가라”고. 그가 흘린 눈물만큼 그의 부모님도 피눈물을 흘렸다.

“커밍아웃을 하고 한 1년은 괜찮았어요. 근데 1년이 지나면서 불안해지더라구요. ‘이러다가 사람들 머릿속에서 완전히 잊혀지고 그럼 영영 다시는 연기를 못하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소름이 끼칠 만큼 불안했어요.”

1년 남짓의 세월이 흐른 후 홍석천은 뮤지컬 무대에 올랐다. 대학로의 작은 극장에서 올려지는 뮤지컬 무대에 서면서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다. 그 당시에는 돈보다 자신이 다시 무대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뻤다.



커밍아웃 후 홍석천은 그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캐릭터를 조금씩 만들어갔다. 어떤 이들은 거부감을 표현하기도 했지만 많은 이들은 ‘우리 사회도 이제는 조금씩 소외된 이들에게 눈길을 돌려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당시 그는 대부분 연극 무대에 섰다. 방송에서 시트콤 배우로 자리를 잡아가던 그였지만 연극 무대에 서면서 ‘정통 연기’의 색깔을 찾아갔다.

“커밍아웃을 할 때는 사람들한테 돌 맞을 준비를 했었기 때문에 힘들어도 ‘그런가 보다’ 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어요. 근데 1년이 지났는데도 아무도 저를 안 찾아주는 거예요. 배우는 관객이 찾아줘야 존속할 수 있거든요. 관객이 찾아주지 않는 배우는 배우로서의 생명이 끝난 거예요. 그러니 1년을 기다려도 아무도 안 찾아주니 얼마나 괴로웠겠어요. 그때 별별 생각을 다 했죠. 이 참에 뉴욕으로 날아가서 하고 싶던 공부나 열심히 해볼까?’ 하는 생각도 했어요.”

홍석천은 커밍아웃 후 가장 많이 잃은 것도 사람이고 얻은 것도 사람이라고 한다. 그때 뉴욕이 아닌 서울에서 다시 무대에 설 날을 손꼽아 기다린 것은 그의 주변에서 그를 격려하고 지켜봐준 사람들 덕분이다. 가족에 대한 사랑을 절감한 것도 그때였다.

“커밍아웃 후 3년 정도를 지루하게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시간을 보냈어요. 그러다 김수현 선생님의 드라마 ‘완전한 사랑’에 캐스팅됐죠. 그 소식을 전화로 듣고 어찌나 기뻤던지…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설레요. 드라마 촬영하면서도 얼마나 좋았는지…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을 실감하겠더라구요.”

홍석천은 요즘 그때의 감동을 다시 느끼고 있다. 요즘 최고의 화제를 모으는 드라마 ‘슬픈연가’에 캐스팅됐기 때문이다. 권상우, 김희선, 송승헌 출연으로 드라마 제작 단계에서부터 아시아 전역의 눈길을 한몸에 받은 드라마 ‘슬픈연가’에서 홍석천은 권상우와 동두천에서 함께 자란 웨이터 역할을 맡았다.

“권상우와 동두천에서부터 함께 자라는데 권상우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잠시 헤어졌다가 뉴욕에서 다시 만나요. 뉴욕에서 시작된 김희선, 송승헌, 권상우의 삼각관계가 한국에 돌아와서도 계속되는데 그들의 가슴 아픈 사랑을 지켜보는 역할이에요.”

홍석천은 ‘슬픈연가’ 촬영을 위해 10월 28일부터 3주 동안 뉴욕으로 떠난다. 뉴욕 촬영은 중요한 장면을 많이 담아야 하기 때문에 준비할 것이 많다. 다른 연기자들은 코디네이터와 매니저 등 스태프들과 함께 움직이기에 준비물을 챙길 때도 아무래도 여유가 있다. 하지만 그는 매니저도 코디네이터도 없어서 모든 준비물을 혼자 챙기느라 동분서주한다.

타임지 선정 ‘아시아의 영웅 20'에 뽑혀

커밍아웃은 나를 성장하게 해준 ‘자양분’

홍석천에겐 드라마 출연 외에도 행복한 뉴스가 또 있다. 지난 10월 초 미국 뉴욕 타임지가 선정한 ‘아시아의 젊은 영웅 20’에 선정된 것. 그가 커밍아웃을 한 후 뉴욕 타임스에서는 그를 인터뷰하기 위해 세 번 가량 한국을 방문했다. 그런데 얼마 전에는 인터뷰가 아니라 ‘아시아의 젊은 영웅 20’의 후보로 선정됐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 전화를 해왔다.

“처음 전화 받고 너무 기뻤어요. 그리고 ‘내가 무슨 젊은 영웅이야. 뽑힐 리 만무하지. 그래도 후보라도 오른 게 어디야’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며칠 후 제가 ‘아시아의 젊은 영웅 20’에 뽑혔다는 거예요. 그것도 LPGA에서 맹활약중인 대한의 골프 낭자들과 함께 뽑혔다는데 어찌나 감동적이던지. 근데 한편으로는 걱정도 했어요. 저를 응원해주는 분들이 있는 반면 안티 홍석천도 많거든요. 아니나 다를까 뉴욕 타임스의 발표가 알려지자 인터넷에 바로 안티 팬들의 글이 올랐더라구요. 그중에는 진짜 심한 분도 계세요. 하지만 그것도 다 제게 관심이 있으니까 그러는 거라고 생각해요.”

홍석천은 자신의 성격이 ‘상처를 잘 받는 편’이라고 한다. 커밍아웃을 한 지 4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지금도 자신에 대한 비난의 글이나 말을 접할 때면 상처를 받는단다. 커밍아웃 후 돌을 맞을 만큼 맞았기에 가슴에 피멍이 들었다가 다시 딱지가 앉기를 수없이 반복했는데도 여전히 열 마디 칭찬보다 한마디 비난에 상처를 받는다는 것. 그러면서 그는 “그건 내 성격이기에 고칠 가능성이 희박해 보인다”고 말한다.



오는 11월 10일, 타임지 관계자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영웅 20’에 뽑힌 아시아의 영웅들이 시상식을 위해 모두 모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홍석천은 이 자리에 참석할 수 없다. 뉴욕에서 드라마 촬영이 한창일 것이기 때문. 안타깝지만 미리 촬영한 동영상으로 그의 수상 소감은 대신될 듯하다.

이외에도 홍석천은 민주노동당에 입당해 한동안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가 민노당과 인연을 맺은 것은 ‘파병 반대 시위’를 하면서부터. 이때 민노당 김혜경 대표와 사회 전반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나눈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후 민노당에서는 성적 소수자들을 위해 성소수자위원회라는 공적인 기구를 만들었고, 이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기위해 홍석천은 민노당에 입당하게 된 것. 이를 두고 항간에서는 ‘나선다’라는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홍석천은 “순수한 마음으로 민노당에 입당했을 뿐 다른 뜻은 없다”고 한다.

커밍아웃 후 4년의 시간을 보내면서 홍석천이 느낀 것은 ‘사람은 진실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이런 생각을 하는 저변에는 ‘커밍아웃을 하지 않았더라면?’이라는 의문이 깔린다.

“커밍아웃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처럼 행복하지 못했을 거예요. 저의 성정체성을 밝힌 대가로 저는 지난 3년 동안 바닥을 박박 길 만큼 힘든 시간을 보냈어요. 연예인으로서 더이상 내려갈 곳이 없을 때까지 내쳐져봤고 경제적으로 어려움도 겪었어요. 그런데 그러면서도 기본적으로 행복했어요. 커밍아웃을 하기 전에는 가면을 쓰고 사는 것 같았는데 커밍아웃을 하면서 그 가면을 벗어버렸잖아요. 그러니 얼마나 시원하고 후련했겠어요. 물론 그 대가는 혹독했지만, 그래도 진실만 잃지 않으면 모든 것은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진리도 깨달았어요.”

커밍아웃 후 그가 가장 많이 잃은 것은 사람이다. 그가 인기라는 것을 얻고 있을 때 그의 주변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진실이 통하지 않았던 이들은 자연스럽게 그를 떠났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렇게 비워진 자리가 다른 사람들로 다시 채워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주변에는 여전히 사람이 많다.

또 커밍아웃 후 그는 진짜 어른이 됐다고 한다. 그전에는 인기, 부, 명예 등에 집착도 했는데 이제는 소외된 사람들에게 애정이 생기고 타인에 대한 배려와도 깊어졌다는 것. 그는 “커밍아웃이 내게 돈 주고도 배울 수 없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홍석천이기에 가능했다. 그이기에 커밍아웃을 했고 힘든 시간을 꿋꿋하게 버텼으며, 이제 자기 자리를 찾기 위해 또다시 스타트 라인에 당당하게 선 것이다.

“커밍아웃은 제게 앞으로 30년을 살아갈 수 있는 자양분이 돼주었어요. 성공만 보고 달려가던 제게 주위를 둘러보게 했고, 연예인이 아닌 다른 세상에도 눈을 뜨게 했어요. 앞으로 뭐가 될지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만은 약속할 수 있어요.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일에 발 벗고 나서겠다는 거예요. 세상은 더불어 살아가는 거잖아요.”

홍석천은 얼마 전부터 ‘눈빛이 달라졌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고 한다. 열정과 카리스마로 이글이글 불탄다는 게 아니라 4년 전보다 더 맑아 보인다는 것이다. 힘든 길을 헤쳐나와서인지 그의 눈빛에서는 ‘삶의 진실’이 느껴졌다.

글 / 경영오 기자  사진 / 이규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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