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학씨(41)는 ‘돈키호테형’이다. 파란만장하달 수 있는 삶을 살아왔다. 단역 배우로 데뷔, 카메오로 활동하면서 조감독, 제작부장, 매니저, 영화사 사장을 거쳐 현재는 한국 영화의 명가로 손꼽히는 싸이더스(대표 차승재)에서 프리랜서 프로듀서로 뛰고 있다. 한동안 택시기사를 하기도 했다.

그는 ‘할리우드 키드’였다. 대부분의 할리우드 키드들이 그렇듯 그 역시 영화감독을 꿈꿨다. 집안의 반대로 중앙대 불문학과(84학번)에 진학한 그는 중학교(고려중) 2~3학년 때 짝인 송해성(훗날 ‘카라’ ‘파이란’ ‘역도산’ 등 연출)이 다니는 한양대 연극영화과 수업을 더 많이 들었다. 송해성, 권해효, 유오성, 박광정, 박미선, 이경영 등과 함께 선배들이 만드는 16mm 영화에 출연하면서 감독을 꿈꿨다.
그러던 그는 85년 초 학업을 포기하고 영화계로 뛰어들었다. 미개봉작 ‘바람 속의 둥지’ 연출부를 마친 뒤 입대, 제대 후 박종원 감독의 ‘구로아리랑’ 연출부에 막내로 들어갔다. 당시 연출부 선배는 박재호, 박기용, 임상수 감독 등이었다.
감독의 길은 멀고 험했다. 91년 포기, 영화사(기획시대)에 입사해 ‘우연한 여행’ ‘너에게 나를 보낸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등의 제작부장으로 활동했다. 당시 제작실장이 차승재씨였다.
카메오로서의 삶은 역사가 깊다. 85년 이장호 감독을 찾아가 연출부를 자청한 게 시발점이 됐다. 당시 이 감독의 연출부에는 빈자리가 없었다. 대신 이 감독이 그에게 자신이 제작하는 ‘핸드백 속 이야기’의 여주인공(정은영) 상대역을 맡겼다. 술집 손님 역으로, 출연 장면은 베드신이었다.
유명 감독이 시키니까 얼떨결에, 호기심에 베드신을 해낸 그는 내심 꿈에 부풀었다. 그러나 이 장면은 편집에서 잘리고 말았다. 부푼 가슴을 안고 극장을 찾았던 그는 실망감이 적잖았다.
오기가 발동한 그는 촬영중인 영화를 찾아 나섰고, 개런티나 배역 등에 관계없이 출연 제의를 무조건 받아들였다. 그러면서 연기 그 자체를 즐기게 됐고 자연히 출연작이 많아졌다. ‘마리아와 여인숙’에서 욕정에 몸이 단 뚱뚱한 중년 여성과 화끈하게 섹스를 하는 손님으로 출연, 베드신에 맺힌 한(?)을 풀기도 했다.
그는 유명 배우의 상대역도 꽤 많이 했다. 심혜진에게 혼나는 지프 탄 남자(‘세상 밖으로’), 최진실에게 욕하고 추월 경쟁을 벌이는 트럭 운전사(‘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심은하에게 마구 폭력을 행사하는 호텔 밤무대 연예부장(‘본투킬’), 박중훈에게 맞아 죽는 건달(‘깡패수업’), 정우성과 임창정의 손버릇을 의심하는 편의점 주인(‘비트’), 이재은에게 1백만원을 떼이는 녹음실 직원(‘노랑머리’) 등이 대표적이다.
그는 또 카메오를 넘어선 조연급 인물을 맡기도 했다. ‘개같은 날의 오후’에 노모를 학대하는 불효자, ‘천재선언’에선 세상의 평정을 꿈꾸는 영웅호걸의 일원으로 출연했다.
그는 숱한 화제작에 얼굴을 내밀었다. ‘신라의 달밤’에 최기동(차승원)의 동료 교사, ‘엽기적인 그녀’에 원조교제를 하는 중년 남자, ‘라이방’에 포커를 하는 노름꾼, ‘공공의 적’에서는 국립과학수사원의 연구원, ‘광복절특사’에서는 무석(차승원)의 전과가 시작되는 빵집 주인으로 출연했다.
최근작은 요즘 제작중인 ‘마파도’와 ‘파송송 계란탁’. ‘마파도’에는 도박판 하우스장, ‘파송송 계란탁’에는 개울가에서 고둥을 잡다가 임청정이 던진 돌에 맞는 남자 역을 맡았다.

‘너에게 나를 보낸다’는 그의 인생을 또 한 차례 바꿔놓은 작품이다. 이 영화에 호모로 출연했던 그는 여주인공 정선경의 매니저를 맡으면서 진로를 변경했다. 정선경에 이어 박상민, 황인성, 송윤아, 김정현, 이태란 등의 매니저를 맡았다.
카메오로, 배우 매니저로 영화 촬영장과 영화사에서 살다시피 한 그는 6개월여 택시기사를 하면서 생계를 꾸렸다. 평소 가까이 지내던 영화인들과 영화사를 설립, ‘가위’ ‘썸머타임’ 등을 내놓았다. 이후 싸이더스의 프리랜서 프로듀서로 활동하면서 지난 7월 개봉된 ‘늑대의 유혹’을 만들었고, 요즘 두 작품을 준비하고 있다. 서울 변두리 양복점 가족의 이야기를 그린 ‘맨스타’와 여자 기수를 주인공으로 한 경마 소재 영화다.
그와 촬영장에서 카메오 대 카메오로 만난 건 ‘엽기적인 그녀’에서다. ‘엽기적인 그녀’에서 그는 내게 카메오의 진수를 가르쳐줬다. 단지 카메오로 그치지 않고 그 이상의 역할을 해낸 것이다.
그와 난 원조교제를 하려다 실패하는 중년 남자로 출연했다. 촬영 당시 난 조사 하나까지 틀리지 않기 위해 대사 암기에 전념했다. 반면 그는 대사는 다 외웠다면서 빈둥거렸다. 그런 그가 촬영이 시작된 뒤 멋지게 한 방을 날렸다. 전지현이 “아저씨는 저 같은 딸도 없어요?”라고 항의하자 그는 촬영용 콘티에 적혀 있는 “없다, 왜?”에 그치지 않고 “니가 하나 낳아주라”고 애드립을 날렸다.
순간 촬영장은 폭소가 만발했다. 그로 인해 NG가 났지만 그의 애드립은 즉각 수용됐다. 그런데 그가 날린 대사는 애드립이 아니었다. 며칠 동안 촬영장에 와서까지 고민한 데 따른 산물이었다.
그는 또 ‘가위’에서 살신성인의 자세를 보여줬다. 배역은 여주인공(김규리)의 아버지. 저수지에 빠져 자살한 그는 꽁꽁 얼음이 언 한겨울에 동사체로 발견된다. 그는 이 장면을 찍은 뒤 119 구조대에 의해 병원으로 실려 갔다.
아버지 역은 원래 내가 하기로 돼 있었다. 시나리오에는 나무에 목매달아 죽는 것으로 설정돼 있었는데, 일정이 늦어지면서 저수지에 빠져 죽는 것으로 바뀌면서 출연하지 못했다.
나를 한겨울 저수지에 빠뜨리는 게 부담스럽다며 연락도 않고 이정학씨로 대체, 촬영을 마쳤던 것이다.
그는 내가 ‘가지 않은’, 정확히 말하면 ‘가지 못한’ 길을 걸어왔다. 특히 대학을 그만두고 영화판에 뛰어든 것은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용기고, 비록 감독의 꿈을 이루진 못했지만 카메오와 프로듀서로 ‘영화밥’을 먹고 있다는 점에서 부러움을 사게 한다.
배장수 Profile
경향신문 전문위원.
영화 담당 기자 15년에
최근작 ‘하류인생’까지
42편에 카메오로 출연했다. 대표작으로 ‘마누라 죽이기’
‘태백산맥’ ‘은행나무침대’
‘박하사탕’ ‘엽기적인
그녀’ ‘취화선’ ‘태극기
휘날리며’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