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남극 일기’를 찍고 돌아온 유지태(29)를 만났다. 남극을 배경으로 한 최초의 영화를 촬영하고 온 탓인지 살이 많이 빠져 보였다. 186cm의 키가 한 뼘은 더 커보였다. 유지태는 영화 소개와 함께 그동안 드러내지 않은 가족 이야기를 공개했다.
유지태(29)는 영화계 소문난 효자다. 배우자의 조건으로 꼽는 것도 딱 한 가지. “어머니에게 잘하는 사람”이라고 잘라 말할 정도다. 영화 촬영이 없는 날은 어머니와의 데이트가 빠지지 않는 일과다. 함께 연극 보고, 외식하면서 든든한 아들 노릇을 톡톡히 한다.
유지태가 어머니와 각별한 데는 이유가 있다. 유지태의 집안은 한때 잘나가던 명망가 집안이었다. 할아버지는 5선 국회의원을 지낸 고 유옥우 의원. 지난 3대 국회의원(자유당)을 시작으로 4대, 5대(이상 민주당), 8대(신민당), 11대(민한당) 국회의원을 지냈고, 지난 60년에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 유지태는 “제가 고집이 센게 할아버지를 닮은 것 같아요”라며 웃어 보였다.
하지만 가세는 기울기 시작했다. 유지태가 초등학교 2학년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집안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는 아버지 사업이 부도가 났고, 결국 유지태가 중학교를 다니던 무렵 부모님이 이혼했다고 한다. 모자는 지하 단칸방 생활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유지태는 “믿겨지지 않겠지만, 당시의 경제적인 어려움이란 일반인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 이상”이라고 넌지시 이야기했다. 유지태가 영화배우로 데뷔하고 얼마 후 ‘초등학교 5학년 때 자전거를 타고 신문배달을 했다’는 기사가 실린 적도 있다. 어머니는 일을 하면서 어렵게 유지태를 키웠다. 유지태가 효자인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어머니에겐 둘도 없는 효자 아들인 그가 돌아가신 아버지 이야기를 하는 경우는 좀처럼 없다. ‘오지라고 할 수 있는 남극 체험을 하고 왔는데, 실제 오지를 체험해본 적이 있나’라는 질문에 유지태는 아버지와의 기억을 털어놨다.
“중학교 때였죠. 불교 신자이신 아버지는 지리산 화엄사의 종지스님과 친분이 있었죠. 그때 저를 절에 두 달 동안 맡겨놓으셨어요. 개울가에서 물 마시고 목욕하면서 지냈던 게 생각나요.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스님들과 지리산 노고단을 야간 등반한 것이고요. 나이가 들어 뉴질랜드도 가보고 프랑스 파리도 가봤지만, 당시 지리산에서 많은 것을 배운 것 같아요.”
유지태가 희망사항으로 “좋은 아빠가 되는 것”을 꼽는 것도 어린시절의 추억이 단단히 한몫하고 있다.
유지태는 집안의 경제적 어려움과 환경의 외로움을 연극으로 달랬다. 사실상 그때부터 ‘영화배우 유지태’의 꿈을 키워온 것이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기독교 성극을 시작했다. 종교는 그에게 큰 힘이 됐다. 요즘도 힘들 때면 교회에 가서 기도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고등학교 때는 성극부 반장도 맡았다. 유지태는 “그때 성극부 단원들이 전부 블랙리스트에 꼽힐 만큼 심각한 문제아들이었다”며 웃어 보였다.
유지태는 지난 98년 영화 데뷔작 ‘바이준’을 시작으로 ‘동감’, ‘주유소 습격사건’, ‘봄날은 간다’, ‘거울 속으로’,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올드보이’, ‘남극일기’, ‘야수’(예정)까지 승승장구했다.
그리고 이제 유지태는 새로운 꿈을 엮어가고 있다. 오늘의 유지태가 톱스타급 영화배우라면 내일의 유지태는 영화감독이다. 올해로 서른 살. 많지 않은 나이지만 유지태는 배우로 머물러 있지 않았다. 촬영 중간 틈 날 때마다 영화를 만들었다. 그렇게 만든 작품이 벌써 두 편. 모두 40여분 분량의 중편 영화들이다. 시각장애자의 성적 판타지를 다룬 영화 ‘장님은 무슨 꿈을 꿀까요’와 사춘기 초등학생의 사랑 도전기인 ‘자전거 소년’이다. 알려지진 않았지만 해외 영화제에 초청도 받았을 정도다.
유지태는 조심스러워했다.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라며 말을 아꼈다. 그러면서도 “영화 제작에 관심이 많아요. 앞으로 하고 싶은 일 중 분명 영화감독이 있죠. 작가주의 대안 영화를 제대로 만들어보고 싶어요”라며 의지를 내비쳤다. 유지태는 단국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했고, 현재 중앙대학교첨단영상대학원 영상예술학과에 재학중이다.
영화 ‘남극일기’에서 함께 열연한 배우 송강호도 이런 유지태를 높이 평가했다. 송강호는 “지태는 정말 재주가 많아요. 좀더 경험을 쌓아 영화 제작자로 나서도 손색이 없을 거예요”라고 장담했다.
그래서인지 유지태는 영화 속 배역 선정도 남다르다. 마치 배우와 감독의 안목이 결합된 듯했다. 그는 이것을 ‘내 스스로의 가치’라고 표현했다.
“침범할 수 없는 가치죠. 당장의 인기에 집착해서는 안 되는…. 사실 영화 ‘올드보이’에서 이우진 역도 처음에는 원하는 배우가 많지 않았죠. 내가 한다고 했을 때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구요. 영화 ‘남극일기’도 마찬가지예요. 누군가 ‘남극을 왜 가려고 하느냐’라고 묻는다면 답은 ‘그것은 내 스스로의 가치다’인 거죠.”
영화 ‘남극일기’에 대한 유지태의 애착도 크다. 그는 “정말 짜임새 있는 영화예요. 카메라 워크나 심리 묘사는 독특한 색깔로 표현됐죠. 마지막 욕망의 화신으로 변해가는 최도형(송강호)과 김민재(유지태)의 대립은 감동적이면서 인간의 본능을 자극하죠”라고 설명했다.
‘남극일기’는 의문의 질병과 예기치 않은 사고를 겪으며 집단 광기 상태에 빠져드는 남극 탐험대의 이야기를 다룬 미스터리 스릴러 영화다. 유지태는 ‘남극일기’에서 남극 탐험대의 막내 김민재 역를 맡았다. 최도형을 존경하지만 마지막에는 그와 대립하게 되는 인물로 관객의 ‘눈(Point of View)’ 역할을 대신한다. 관객은 그의 눈을 따라 영화를 보면 흥미가 두 배가 될 것이다.
유지태는 최근 영화 ‘야수’ 촬영에 돌입했다. ‘야수’는 말보다 주먹이 앞서는 불 같은 성격의 강력반 형사 장도영(권상우)과 냉철한 엘리트인 서울중앙지검 검사 오진우(유지태)가 암흑가를 상대로 벌이는 전쟁을 그린 영화. 유지태는 현재 역할에 맞는 샤프한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혹독한 다이어트에 들어갔다. 매일 생선과 야채, 두부로 이루어진 식단을 유지하며 체계적인 운동을 병행하는 등 역할에 맞는 캐릭터 다듬기에 열중하고 있다.
올 연말에는 연극 무대에도 선다. 유지태는 “향락의 러시안 룰렛을 통해 상류사회의 비화를 담을 예정이다. 히치콕 감독의 영화 ‘로프’와 비슷한 분위기가 될 것 같다”며 열의를 보였다. 유지태가 대본을 직접 쓴 연극 ‘6/6’(가제)에선 어떤 색깔의 유지태를 만나게 될지 궁금해진다.
글 / 강영구 기자(스포츠 칸) 사진 / 경향신문 포토뱅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