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연기를 시작한다고 생각하니 처음 무대에 선 것처럼 설레요”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성(性) 고백서 이후 서갑숙은 자의 반 타의 반 세상의 이목에서 한 발 비켜서 있었다. 간간히 영화 ‘봉자’와 연극 ‘두 여자’에서 모습을 비추긴 했지만 본격적인 나들이를 하기에는 좀더 시간이 필요했다. 2년이 지난 지금 그녀는 한층 여유로워진 모습과 연기에 대한 새로운 의욕으로 무장하고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성 고백서로 인해 묻혀진 세월들, 경기도 마석에서 새로운 삶 시작
세월이란 것은 참으로 좋은 약인가 보다. 지난 6월 14일 SBS 탄현스튜디오에서 만난 서갑숙(45)에게선 바람 찬 세월을 정면으로 견디고 난 평온함이 얼굴 가득 드러났다. 그래도 방송에 다시 나온다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설레는 일인가 보다. 녹화가 시작되는 불이 켜지자 얼핏 설레는 표정이 스치고 지나간다. 방송에서는 서갑숙과 그녀의 친정 어머니 그리고 두 딸 노의정(18), 의현(15) 네 모녀의 삶을 비춰주었다.
방송이나 영화보다 현실에서 더 드라마 같은 삶을 산 그녀의 삶은 의외로 소박하고 진솔했다. 살림에 조금 서투를 뿐 네 여자들은 서로 의지하고 때로 질책도 하며, 목욕도 같이 하고 연극도 보면서 친구처럼 지내고 있었다. 많은 것이 부족하지만 서로에 대한 믿음과 격려가 있어서 행복하고 살 만하다고 생각하는 네 여자. 방송 내내 서갑숙은 조심스럽지만 솔직하게 지난 세월을 더듬었다. 때로는 눈물 같은 세월이었고, 한때는 불붙은 장작불처럼 열정을 불태우기도 한 시간들이었다.
2시간 남짓 녹화는 그렇게 진행됐다. 녹화를 마치고 난 그녀는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애를 낳은 듯한 느낌이에요. 솔직히 조금 두렵기도 하고요. ‘내 얘기가 변명처럼 들리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문득 그녀의 눈은 회한에 잠기는 듯했다. 지난 세월은 그녀에게 고통의 연속이었다. 성 고백서를 쓴 1999년 이후 그녀는 질곡의 세월을 견디며 살아왔다.
그녀가 성 고백서를 쓰던 당시 마치 해일처럼 불행이 한꺼번에 닥쳤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경제적으로 압박이 오고 어머니가 뇌수술을 받았다. 이혼으로 결혼 생활의 종지부를 찍을 때, 그녀는 삶의 형태가 어떻게 자신을 핍박하는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는 것에 지쳐서, 자신이 조금 더 이기적이어서 이혼을 선택했다고 하지만, 감당할 수 없는 고통 앞에 덩그러니 놓이고 나니 산다는 것 자체가 시들해졌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폭음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도 오히려 의식은 명료하기만 했다. 겉으로는 웃고 있어도 속으로는 항상 그렁그렁한 눈물을 달고 다녔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우고 나니 밑단까지 밀려서 허탈하게 단추를 다시 풀고 있는 정신 산란한 나날들이 뿌연 안개처럼 지나갔다.
그런 날이면 인사동에 나왔다. 하얗게 타는 담배 연기. 그리고 속까지 투명한 소주 한잔. 비 오는 날 목까지 차오는 꿉꿉한 습기. 그러다 문득 자신이 살아온 삶을 정리하고 싶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나름대로 정직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이기적이지 않은 사랑을 꿈꾸었고, 자신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정직하기를 바랐다. 여배우라지만 허세를 부리며 산 적도 없었다. 그런데 남은 것은 물 먹은 솜처럼 무거운 육신과 공허한 자신뿐이었다.
무언가를 정리하고 싶었다. 자신에게 솔직하고 남에게도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낸다면 지긋지긋한 불행에서 자신을 끌어올릴 힘이 솟으리라 생각했다. 때로는 그것이 충격적이고, 어떤 이에게는 추하게 느껴질지라도 진지하게 고백한다면 따스하게 안아주리라 생각했다.
도대체 성이란 무엇일까? 왜 숨기려고만 하는 것일까? 겉으로 드러내고 자신의 부끄러움과 즐거움까지 공유한다면 성이 더욱 아름다워지는 것이 아닐까? 「나는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는 호기심을 응축해서 세상을 향해 내놓은 보고서였다. 하지만 세상의 이중 잣대는 그녀를 용기 있고 솔직한 여자라고 평가하기는커녕 부끄러움도 모르는 여자라며 비난을 퍼부었다.
“마치 뿌연 막 같은 것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사회적 인식 때문에 사람들과 가까이 하기도 힘들었죠. 무엇보다 정신적으로 힘들었어요. 어떤 사람을 만나도 내 책에 나오는 누구가 아니냐고 오해받을까 봐 친하다고 표현 못 했어요.”
그럴수록 그녀는 오히려 당당하게 세상과 맞섰다. 그리고 편견과 사회의 이중성이 얼마나 단단한 벽인지를 알았을 때쯤 그녀의 가슴은 황량한 벌판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솔직히 성 고백서를 통해서 돈도 조금 벌었고, 나를 그토록 괴롭히던 빚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러나 잃은 것이 너무 많았어요. 무엇보다 성을 매개로 장사를 한다는 비난에는 많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내가 진짜로 장사를 하고 싶었다면 이후에 들어온 이상야릇한 영화 제의 등을 받아들였을 겁니다. 10년 넘게 쌓아온 연기자의 입지를 돈과 바꿀 정도로 타락하지 않았는데 세상 사람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르며 그녀가 안착한 곳은 경기도 마석 수동이었다. 잉잉거리는 바람과 앙상한 나무, 언 땅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메마른 풍경 속으로 모습을 감췄을 즈음 그녀에 대한 세상의 관심도 조금씩 사그러들기 시작했다.
남자친구 사귀라고 응원하는 두 딸, 끝까지 믿어준 모친이 가장 큰 힘
하지만 그녀의 눈은 항상 사람을 향해 열려 있다. 그녀의 주변에는 10년이고 20년이고 우정과 사랑을 나눠준 사람들이 포진해서 그녀를 응원해주었다. 그것이 세상을 이기는 힘이고 든든한 울타리가 되고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그녀에게 가장 큰 힘이 되어주는 이는 어머니였다. 성담론의 중심에 서 있을 때도 어머니는 “내 딸을 믿는데 사람들이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고 하셨다. 그 한마디가 나락으로 떨어질 뻔한 그녀를 건져주었다. 한량없는 사랑으로 그녀를 지켜준 이가 어머니라면 그녀의 두 딸은 다시금 세상을 이길 든든한 응원군이었다. 아이들의 웃음에서 삶의 의미를 찾았고, 아이들이 성장하는 모습에서 다시금 연기에 도전하고픈 의지도 샘솟았다.
자유분방해 보이는 그녀도 아이들 앞에서는 영락없는 보통 엄마가 된다. 아이에게 한 달 동안 배낭여행을 허락하기도 하고, 자전거 전국일주를 보내는 대담한 일면 뒤에 아이들의 배꼽티를 보면서 걱정을 하기도 하고, 때로 “엄마는 왜 남자친구 하나 못 사귀느냐”고 핀잔을 들으면서 행복해하기도 한다.
“오히려 아이들이 저보다 자유로운 것 같아요. 아이들이 제 선생님이고 속이 많이 찼구나 하는 생각도 들어요. 자립심도 많고 이해심도 있는 아이로 성장했으면 좋겠구요.”
아이들이 커가면서 모든 것이 신중해졌다. 결혼 문제만 해도 그랬다. 한번 아픔을 겪었기에 보다 신중할 수밖에 없는데도 주변에서는 재혼을 권하기도 했다. 우선 서로 상대에게 종속되는 결혼이라는 제도에 대한 믿음이 그리 미덥지 못하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동거를 해보고 싶은 생각은 있다고 했다. 그러다 1~2년 지나 평생 같이 살아도 되겠다 싶으면 그때 결혼해도 늦지 않을 것 같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다.
때로 노영국과 재결합을 이야기하는 이도 있다. 최근에 새로 제작되는 드라마 ‘브라운 각서’에 출연하는 노영국이 제법 비중 있는 조역에 서갑숙을 적극 추천했다.
흔히 이혼하면 남보다 못하다고 하는데 이들은 오히려 이혼하고 더 좋은 친구가 되었다. 노영국은 언제나 신사였다. 아이들을 데리고 있을 때도 서갑숙을 배려해주었고, 그녀가 아이들을 키울 때도 엄마의 위치를 인정하고 존중해주었다.
노영국은 뜻이 안 맞아서 헤어지긴 했지만 아이 엄마로서 좋은 모습을 보여준 서갑숙에 대해 좋은 인상만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드라마에 그녀를 적극 추천한 이유도 “베트남전에 파견된 군인들을 다독이는 대모 역할이 그녀와 잘 맞을 것 같아서”라고 밝혔다. 좋은 동료로 남고 싶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당시 불행이 한꺼번에 닥쳤고, 내가 좀더 이기적이어서 헤어진 거지 불미스러운 일로 헤어진 것이 아니어서 우리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었어요. 이후 자주 만나는 것은 아니지만 아이들 문제로 전화하면서 지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재결합 얘기까지 나오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다. 최근 노영국이 재혼한 이와 또다시 실패한 후 나온 이야기라 더더욱 부담스럽지 않을 수 없다.
“향후의 일을 속단할 수는 없지만 앞으로도 두 아이의 아버지로서, 연기를 하는 동료로서, 아픔을 나누는 친구로 살 것 같아요.”
파룬궁 수련하며 몸과 마음 평화 얻어 “세월이 담긴 연기하고 싶어요”
그녀는 지난해 여름 갑상선 이상으로 고통을 겪었다. 갑상선 항진증. 따지고 보면 병은 그녀에게 새로운 각성을 촉구하는 가시면류관 같다. 어린 시절 심장판막증으로 그녀의 가슴에 긴 상처를 남겨놓았다. 조금만 뛰어도 숨이 턱턱 막히는 고통 속에서 그녀는 천천히 나아가는 법을 배웠다. 조급하다고 해서 세상이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몸은 따르지 않아도 그녀의 호기심은 언제나 빛보다 빨랐다. 그녀에게는 세상 모든 것이 호기심의 영역이었다. 다른 사람의 삶을 훔치고 싶어 연기를 시작했고, 정상의 위치에 올라서지는 못했어도 늘 개성 있고 중량감 있는 조역으로 연기력을 인정받아왔다. 탄탄하게 자기 입지를 구축하던 그녀가 갑자기 성담론의 중심에 선 것은 따지고 보면 그녀의 호기심이 빚어낸 필연이었다.
서갑숙이 파룬궁에 심취한 것도 그녀의 생을 쫓아다닌 호기심 때문이었다. 6개월 전 중국 동포 고성명씨를 만났다. 그녀는 서갑숙에게 ‘파룬궁’이라는 기공 수련을 가르쳐주었다. 더불어 파룬궁 때문에 무수하게 박해받고 있는 중국인들의 삶을 알려주었다. 고통받고 있는 이들의 삶에 분노했고, 마음을 다스리는 수련법에 관심이 생겼다. 특별히 병을 낫기 위해서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싶어서 시작했는데 의외로 이 기공 수련은 그녀의 병은 물론 마음까지 치유해주었다. 그 좋아하던 술, 담배도 끊어버렸다. 몇 시간이고 수련을 하고 나면 몸과 마음이 날아갈 듯이 가벼웠다. 6개월이 지난 후 병원에 갔더니 갑상선 항진증이 거의 치유되었다는 진단을 받았다.
파룬궁 수련과 함께 이제 그녀는 다시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갔다. 마당 가득 상추를 심어놓고 어머니와 오순도손 밭을 매는 소소한 일상이 그녀에게 기쁨을 안겨줬다.
저수지를 매입해서 낚시터를 조성하고 양옥집을 세내어서 고깃집을 차렸다. 고기를 구워 먹으며 저수지를 바라보면 하늘과 맞닿은 산이 보인다. 그 고즈넉한 분위기에 젖다 보면 어느덧 석양이 되었다.
“상처는 집착하고 기대하고 미련을 갖는 데서 오는 것 같아요. 상처를 입지 않으려면 미련도 집착도 기대도 버리고 사는 것밖에 없어요. 그래서 조금은 냉정해지려고 할 때도 있어요. 어떤 사람을 미워하기보다는 차라리 잊어버리려고 해요. 그러다 보면 그 사람의 이름조차 잊어버릴 때가 있어요. 그것이 나 스스로 용서하는 길이고 상처를 받지 않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그녀는 이제 다시 새로운 출발점에 섰다고 생각한다. 주어진 배역이 무엇이든 대학을 갓 졸업하고 연기에 입문했을 때의 심정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다시 연기를 시작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설레요. 무슨 역할이라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열정을 되살려 열심히 하는 모습을 시청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을 뿐입니다.”
마치 심판대에 선 느낌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그녀가 무대에 섰을 때는 지난 세월 보여주지 못한 열정과 회한까지 녹인 원숙함을 마음껏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남자나 여자나 40대가 되면 삶을 다시 생각한다고 하더군요. 저도 어떤 면에서는 새로운 삶을 생각하고 있어요. 지금보다 적극적으로 더 왕성한 호기심과 따스한 마음으로 새롭게 세상을 창조하고 싶어요. 두 아이의 엄마로서 보다 당당하고, 여성으로서 보다 원숙해지는 모습을 보일 때 제 연기도 깊은 맛이 우러날 테니까요.”
인터뷰를 마치고도 그녀는 설레는 눈빛을 남겨두었다. 새롭게 출발하려는 그녀를 응원하듯 푸진 햇살이 사그락거리며 그녀의 발등으로 부서져 내렸다.
글 / 최병일(자유기고가) 사진 / 최병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