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적인 복수는 결과도 아름답다 ‘친절한 금자씨’박찬욱 감독

예술적인 복수는 결과도 아름답다 ‘친절한 금자씨’박찬욱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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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 시절 술자리에서 잘나가던 감독들의 작품을 ‘마구’씹으며 스트레스 풀었죠”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한데다 잘생기기까지 한 박찬욱 감독. 그가 왜 그토록 ‘복수’에 매달리는지, 사람들은 궁금하다. 또 돈 잘 버는 부르주아 영화감독이 왜 민주노동당 당원으로 가입했고 효순·미선양의 압사 사건에 항의하며 삭발까지 하는 등 사회 활동에 열심인지 그에겐 참 궁금한 게 많다.


“내 친구가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 봤는데 재미없다더라. 친철하지도 않대.”“그런데 왜 개봉 12일 만에 3백만 명이나 본 거야? 얼마나 재미없는지 보러 가자.”

카페에서 이런 대화를 나누던 대학생 커플은 곧바로 영화관으로 떠났다. 이제 젊은이들에게 박찬욱 감독(42)의 영화를 보는 것은 ‘스타일리시한 문화 활동’으로 여겨진다. 작가 김수현씨는 자신의 홈페이지를 통해 “‘친절한 금자씨’가 그렇게 광고를 자주 하고, 그토록 많은 극장에서 상영하는데 그 정도 관객이 드는 것은 당연하지 않냐”고 (매스컴들이 너무 호들갑을 떠는 것을) 못마땅해했다지만 그 어떤 비평과 비난에도 불구하고 ‘박찬욱 감독’은 이 시대의 아이콘이며 브랜드임에는 틀림없다.

각박한 세상에서 한바탕 웃을 수 있는 코미디도 아니고, 가슴이 촉촉해지는 로맨스 영화도 아니고, 연인끼리 보러 갔다가 ‘어머 무서워’라고 비명을 지르며 자연스럽게 껴안을 수 있는 공포영화도 아닌 작품. 피비린내나는 살인과 폭력이 난무해 보고 나면 심신이 불편해지는 그의 영화를, 왜 사람들은 굳이 극장까지 달려가 돈을 내고 보는 걸까. 또 왜 국제영화제에서는 갖가지 상을 주고 해외 영화평론가들까지 찬사를 퍼붓는 것일까.

# 복수는 끝났다
박찬욱 감독은 ‘친절한 금자씨’로 복수는 끝났다고 한다. 1992년 가수 이승철 주연의 영화 ‘달은… 해가 꾸는 꿈’으로 데뷔, ‘3인조’ ‘심판’ ‘쓰리몬스터’ ‘공동경비구역 JSA’ 등을 감독했지만 6편의 장편영화 중 ‘복수는 나의 것’(2002) ‘올드보이’(2003) 등 복수 3부작이 워낙 강한 인상을 남겨 ‘복수 전문(?) 감독’으로 여겨진다.

‘공동경비구역 JSA’로 베를린 국제영화제 경쟁 부분에 초청되었고, ‘올드보이’로 칸 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받은 그는 ‘친절한 금자씨’가 올해 베니스 영화제 공식 경쟁 부분에 초청되어 세계 3대 영화제의 레드 카펫을 모두 밟는 주인공이 됐다. ‘올드보이’가 칸을 비롯, 국내외 영화제에서 각종 상을 휩쓴 덕분에 그는 국민훈장도 받았다.

미국 유명 영화 전문 인터넷 사이트 ‘에인트잇쿨뉴스’에선 영화사 속 거장 50명을 대상으로 최고의 감독을 뽑는 설문조사를 실시하며 박감독을 ‘50대 거장’에 포함시켰고, 뉴욕타임스는 그를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과 견줄 만큼 뛰어난 감독’이라고 격찬했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은 노골적으로 그를 좋아한다고 밝혔고, 밀라 요요비치 등 유명 스타들이 그의 영화에 출연하고 싶다고 러브콜을 보내며, 할리우드에서도 연출 제의가 쏟아진다.

아주공대 학장을 지낸 아버지, 변호사협회 회장을 지낸 큰아버지 등 유복한 집안에 태어나 서강대 철학과를 무사히 졸업했으니 집안이나 학력 콤플렉스도 없을 테고, 외국계 은행에 다니던 유능한 아내에 귀여운 딸, 파주 헤이리의 근사한 집 등 ‘신에게 하염없이 축복받은’ 그가 왜 그토록 ‘복수’에 매달리는 걸까.

“꼭 지독한 가난이나 배신 등 트라우마가 있어야 복수에 집착하는 것은 아니죠. 그렇지만 처음 영화계에 입문해서 ‘공동경비구역 JSA’로 주목받기 전에는 고생도 많이 했고 분노도 많았어요. 결혼해 아이를 키우는 가장이니 밥벌이를 해야 해서 영화사에서 월급쟁이를 하며 영화 포스터도 만들고, 자막 번역 등 잡일도 했죠. 최근엔 인터뷰 기회가 많은데 제 자신이 동전만 넣으면 노래가 나오는 주크박스처럼 질문에 척척 대답을 하는 게 지겹고 피곤하다가도 데뷔작을 만들었을 때 한 번도 인터뷰를 못 당하던(?) 걸 기억하면 ‘이것도 호강이다’라고 생각하면서 인터뷰에 응합니다.”

국내외 영화평론가들, 아주 지적이며 현학적인 전문가들은 그의 작품에서 그리스 비극과 셰익스피어를 읽는다. 그리스 비극처럼 신의 의지와 농간에 따라 움직이는 나약한 인간들, 인간의 노력을 지켜보다 마음을 바꾸는 신들처럼 그의 영화는 항상 관객들의 예상을 배반하고 반전한다. 또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고뇌하는 햄릿처럼 선택과 도덕적인 딜레마에서 고민하는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셰익스피어의 작품과 박찬욱 감독의 ‘잔인하고 폭력적이지만 유머 감각이 묻어나는’ 복수극에 담긴 철학이 일맥상통한다는 것.

쉽게 말하면 그의 작품들은 우리가 숨기고 싶은 원죄 의식을 건드려 우리를 불편하게 하면서도 자꾸만 궁금해져 보게 만든다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죄짓고 살면서도 자신에게 죄지은 사람에 대해서는 복수하고, 들키지만 않는다면 총·칼로 죽여 응징해버리고 싶은 욕구가 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품었다는 것만으로도 속죄하려 하고, 그러면서도 남들에게는 존경받고 싶어한다.

그는 사회적 금기인 사적(私的)인 ‘복수’를 주제로 모순 덩어리인 인간 심리를 비틀고 헤집어서 영화로 만든다. 그리고 복수가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한다.

‘올드보이’에선 오대수(최민식)에게 책임을 덮어씌워 우진(유지태)이 미치지 않고 살았으며, 금자(이영애)에겐 복수가 (살해당한 아이들의 부모에 대한) 속죄의 수단으로 13년의 감옥 생활을 버티게 한 삶의 원동력이란 것. 하지만 결국 복수는 해결책도, 행복의 방법도 아님을 알려준다.

그가 작품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주려 했건, 그가 세상에 품은 원망이 무엇이건 박찬욱 감독은 복수 시리즈 덕분에 부와 명예를 얻었으며 ‘세계적 감독’으로 인정받아 그를 몰라봤던 이들에게 통쾌하게 복수를 했다. 어리석은 이들은 진짜 복수를 하다가 감옥에 가거나 죽기도 하는데 예술적인 복수는 결과도 아름답다.

# 진지함과 유머는 그의 힘
박찬욱 감독은 자신의 예술 세계에만 빠져 있지는 않다. 류승범 감독과 함께 미군 장갑차에 압사한 효순이·미선이를 추도하며 주한 미군에 항의해 삭발도 했고, 민주노동당 당원임을 당당히 밝히고는 매달 당비를 꼬박꼬박 낸다.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명예해외봉사단장으로 지난 7월 위촉되어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다른 나라를 돕기 위해 열심히 활동하는 젊은이들과 함께 해외 봉사도 할 예정이다.

모교인 서강대를 비롯, 성균관대·이화여대 등 대학의 특강에도 참석해 영화인을 꿈꾸거나 영화에 관심 많은 학생들에게 경험담도 전해주고 영화 이야기도 나눈다. “오랜 백수 생활 끝에 영화감독이 되어 처음 두 작품이 망했을 때도 영화를 잘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은 잃지 않았다”며 “자신의 일에 대해 오만함을 갖고, 자신의 능력을 믿고 견디라”고 후배들에게 강조한다.

그의 모든 작품은 우리 사회에 대한 예리한 시선과 우려에서 만들어졌다.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해도 그걸 해결해줘야 할 ‘공권력’이 전혀 책임을 다하지 않는 경우를 우리는 너무도 많이 봐왔다. 무책임하고 엉성한 공권력에 대한 기대를 버리는 대신, 그의 주인공들은 스스로 나서서 응징하고 벌한다.

다른 한국영화들과 달리 그의 영화는 ‘권선징악’을 표방하지 않는다. 예전엔 우리가 워낙 순진해서 권선징악으로 끝나는 영화를 보며 ‘착한 사람이 언젠가는 잘 될 거’란 믿음과 위안을 받았지만, 이젠 착한 사람이 잘 살기 더 힘들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기 때문에 그런 메시지는 오히려 영화의 현실감을 해친다는 것이다.

“예술가의 시선에서 보면 가난뱅이는 부러워하는 것이 많아 비뚤어지는 경향이 지배적인 데 반해, 부자는 아쉬울 게 없어 더욱 착해져요. 착한 성격마저 부자들이 독점하는 세상이 슬퍼요. 우리 사회의 계급 갈등은 심각하지만 쉽게 해결되기 어렵기 때문에 계속 직시해야 합니다.”

만약 그가 이처럼 확고한 사회의식으로 무장되고 진지하기만 한 감독이라면 도무지 인터뷰하고 싶지 않았을 게다. 다행히도 그는 철학도답게 진지하지만 유머 감각이 뛰어나고 그의 작품, 특히 잔혹한 복수극에도 유머는 달콤하게 스며 있다.

분단이란 거대한 비극을 그리면서도 북한군(송강호)을 통해 유머러스하고 따스한 기운을 잃지 않았던 ‘공동경비구역JSA’, ‘친절한 금자씨’에선 ‘어느 지각없는 감독은 이걸 영화화할 것이다’라며 감독 자신마저도 망가뜨리는 유머 감각을 자랑한다.

하긴 산소 같은 여자, 천사같이 해맑고 꿋꿋한 장금이, 항상 신비한 이미지를 보여준 이영애에게 험하게 살아온 살인범 ‘금자’ 역을 맡긴 것은 얼마나 유머러스한 발상인가. 그 어떤 위기 상황에도 당황하지 않고 우아하게 말하는 이영애가 교도소 안에서도, 전도사에게도 특유의 소곤소곤한 말투로 상스런 소리를 지껄이는 장면은 너무 진지해서 우습다. 그 우스꽝스러움을 통해 인간 이영애가 갖고 있는 복잡한 내면이 처음으로 드러났다.

그 오랜 무명 시절을 어떻게 참아냈냐는 질문에 “동료들과 술 마시면서 당시 흥행이 잘 되던 감독들의 작품을 ‘내가 발가락으로 찍어도 그보단 잘 만든다’ 는 등 마구 ‘씹으면서’ 스트레스를 풀었다”고 말했다.

# 가훈 ‘미워도 다시 한번’ 아니면 말고…
그러나 영화나 말보다 그의 유머 감각을 잘 알 수 있는 것은 그의 글이다. ‘가훈’에 관해 그가 쓴 글(경향신문 2002년 10월 12일자)을 보자.

“종팔이(딸의 애칭)가 가훈을 적어오라는 숙제를 받아왔다. 궁리 끝에 떠오른 한마디 ‘미워도 다시 한번!’. 얼마나 좋은가. 식구끼리 친구끼리 연인끼리 박 터지게 싸우고 나서도 돌아서서 조용히 이렇게 읊조릴 수 있다면. 그런데 그 말은 영화 제목만이 아니라 거창고등학교 어느 교실의 급훈이란 걸 알았다. 다른 것도 아니고 가훈을 표절할 수는 없는 일…. 몇 시간 후 마침내 나는 이런 문장을 백지에 적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아니면 말고’.

나는 말했다. 뭐든지 멋대로 한번 저질러보는 거야. 그랬는데 분위기 썰렁해지면 그때 이 말을 쿨하게 중얼거려주는 거지. 종팔이는 정말 좋아했다. 본래 아이들이란 늘 멋대로 한번 저질러보고 싶어 미치는 인종 아니던가. 하지만 역시 어른들은 달랐다. 이튿날 종팔이는 선생님께서 ‘세상에 뭐 이딴 가훈이 다 있냐’며 새걸 받아오든가 아니면 뭔가 납득할 만한 설명을 들어오라셨다고 전했다. 나는 한번 정한 가훈을 무를 수는 없다면서 이렇게 납득할 만한 설명을 덧붙였다.

- 현대인들은 자기 의지로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매우 오만한 태도다. 세상에는 의지만 갖고 이룰 수 없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닥쳐오는 좌절감을 어쩔 것인가. 최선을 다해 노력해보고 그래도 안 되면 툭툭 털어버릴 줄도 알아야 한다. 이 경쟁 만능의 시대에 참으로 필요한 건 포기의 철학, 체념의 사상 아닌가. 이 아빠도 ‘복수는 나의 것’으로 네 친구의 아빠(곽경택 감독)가 만든 영화 ‘친구’를 능가하는 흥행 신기록을 세우고 싶었으나 끝내 20분의 1밖에 안 되는 성적으로 끝마쳐야 했을 때 바로 그렇게 뇌까렸던 것이다. ‘아니면 말고…’-”

작품성만이 아니라 흥행에 이토록 신경을 쓰는 양심적인(?) 박찬욱 감독의 다음 작품은 정신병동을 배경으로 한 밝고 명랑한 정신병자 소녀와 청년의 사랑 이야기란다. 살인자에 이어 정신병자라…. 하긴 우리 모두 마음속으론 살인미수범이고 이상한 이가 많으니 사회 전체가 정신병동 아닌가.

나이 들어서 제작자에게 손 벌리지 않고 만들고 싶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 돈을 모은다는 박찬욱 감독. 나이 들어도 그 유머 감각과 미모가 변치 않기를 친절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글 / 유인경 부장(뉴스메이커) 사진 / 김석구 부장(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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