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들어 출연한 영화가 전무하다. 필모그래피가 개봉 기준으로 기록되는 점을 감안할 때 ‘그때 그사람들’(감독 임상수)이 올해 영화지만 이 작품은 지난해 12월 초에 촬영했고, 금년에는 카메라 앞에 서보지를 못했다.

거론된 영화가 없던 건 아니다. 일례로 ‘외출’(감독 허진호),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감독 이하) 등이 있다. ‘외출’은 허진호 감독에게,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은 이 영화 제작자 이진숙 대표에게 부탁했다. 모두 긍정적 답변을 들었다.
‘외출’은 이 영화 프로듀서에게서 촬영 날짜까지 연락을 받았다. 촬영을 하루 앞두고 촬영이 한 주 연기됐다는 연락도 받았다. 그런데 그 이후에는 아무 연락이 없었고 촬영은 끝나고 말았다.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은 ‘외출’보다 심하다. 촬영 기간 동안 아무 연락을 받지 못했다. 이진숙 대표는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제작한 옴니버스 인권영화 ‘여섯 개의 시선’ 프로듀서. 나는 이 영화 중 ‘그녀의 무게’(감독 임순례)에 출연, 이 대표와는 잘 아는 사이다.
이 대표는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 촬영을 앞두고 내게 출연할 만한 배역이 많다고 했다. 나는 문소리의 상대역을 원했고, 노 개런티임을 분명히 했다. 이 대표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지진희 상대역 가운데 괜찮은 배역이 있다고 했다.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칼자루를 쥔 쪽은 이 대표니까.
어쨌든 난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 관계자에게 촬영 기간중 어떤 연락도 받지 못했다. 이 영화 시사회 때는 어떤 배역이었는지 찾아보고 전후 사정도 들어볼 참이다.
‘외출’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 등과 상반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일례로 ‘바람의 전설’(감독 박정우)을 들 수 있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풍식(이성재)의 매형은 박 감독이 나를 염두에 두고 캐릭터를 설정했다. 조연에 해당될 만큼, 두세 차례에 걸쳐 며칠씩 촬영해야 할 만큼 비중 또한 적지 않았다. 제본된, 출연·제작진에게 배포되는 시나리오를 받고 흐뭇했으며 촬영 전 회식에도 참석하면서 전의를 불태웠다. 촬영 날짜에 맞춰 휴가를 내고 잡념 없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럼에도 나로선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발생, 출연을 포기해야 했다. 첫 3일간의 촬영이 제8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과 겹친 것이다. 영화 담당이 다른 날도 아니고 부산국제영화제 때 휴가를 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촬영 일정 변경에 한 가닥 희망을 걸었지만 이 또한 불가능했다. 보험 영업소로 꾸밀 만한 사무실을 사례비를 주고 임대해놓은 것이다.
1995년작 ‘돈을 갖고 튀어라’(감독 김상진)도 유사한 이유로 출연하지 못한 영화다. 배역은 달수(박중훈)에게 예비군 훈련 통지서를 전해주는 동사무소 직원이었다.
그런데 이 영화는 훗날 남다른 추억을 안겨주었다. 영화가 제작된 지 2년쯤 뒤 집사람에게 러브레터를 보내면서 스틸을 요긴하게 이용한 일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건 집사람도 마찬가지일 듯하다.
1997년 이른 봄 어느 날이다. ‘홀리데이 인 서울’(감독 김의석)에 출연한 진희경씨를 인터뷰하던 중 그녀에게서 “종이 학 천 마리를 접을 시간이 없어 학이 새겨져 있는 5백원짜리 동전 천 개를 모아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려고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녀는 “50만원을 은행에서 5백원짜리 동전 천 개로 바꾸는 것은 의미가 없다”면서 “정성과 사랑을 담는 의미에서 물건을 살 때 거스름돈으로 받는 동전만 모으고 있다”고 강조했다.그의 말을 듣는 순간 귀가 번쩍 뜨였다. 5백원짜리 동전 천 개를 모아 결혼기념일이나 생일에 선물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물을 하면서 그것을 모은 과정과 의미를 함께 들려주면 어떤 선물이나 현금 50만원을 그냥 주는 것보다 이색적이고 감동적일 거라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즉시 실행에 옮겼다. 진희경씨가 한 방법대로 물건을 살 때마다 거스름돈으로 5백원짜리 동전을 받았다. 물건값을 치를 수 있는 백원짜리 동전이 있어도 반드시 천원짜리나 5천원 혹은 만원짜리를 사용했다.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을 때에도 반드시 천원짜리를 이용했다. 커피를 사면서 인원이 넘쳐 5백원짜리가 나올 수 없는 상황이면 추가로 천원을 넣어 5백원짜리 동전 2개를 마련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5백원짜리를 하루에 한 개에서 많게는 5~6개까지 모았다. 동전은 그날 밤 저금통에 넣었다. 천 개를 딱 맞추기 위해 돼지저금통에 동전을 넣을 때는 반드시 기록을 했다. 저금통 밑에 기록표를 비치, 숫자를 지우고 써나가는 방식을 택했다.
처음에는 동전 하나당 러브레터 한 줄을 썼지만 집사람의 생일에 맞추기 위해 하루에 5~6개씩 바꾸면서, 일에 쫓기면서, 각각의 의미를 기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졌고 억지로 쓴 편지는 의미가 없다는 생각에 한 줄 러브레터 쓰기는 포기하고 말았다.
천 개를 모으는 데는 약 10개월이 걸렸다. 천 개를 앞두고 감동을 배가시킬 만한 방법을 찾느라 고민에 빠졌다. 그러던 중 떠오른 것이 ‘돈을 갖고 튀어라’의 스틸이다.
박중훈씨가 돈 다발을 짊어진 산타클로스 복장으로, 정선경씨가 만원짜리로 온몸을 두른 채 활짝 웃고 있는 사진 등이었다. 박중훈씨 얼굴에 내 사진, 정선경씨 얼굴에 집사람의 사진을 넣자는 생각이 들었고 즉시 미술부 동료의 도움을 받아 작업에 돌입했다. 사진부 동료의 도움을 받아 중형과 소형, 두 가지 크기로 현상했다.
5백원짜리 동전 천 개와 돈벼락을 맞아 즐거워하는 부부의 사진. 집사람의 반응을 상상하며 흐뭇했다. 그런데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다. 편지가 빠진 것이다.
즉시 편지를 썼다. 연애 시절부터 그간의 이런 저런 이야기를 쓰던 중 집사람이 열흘 동안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다녀온 뒤에 들려준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집사람이 영국의 버킹검 궁 앞에서 설사가 나 화장실을 찾느라 허둥거리던 에피소드다. 편지는 이 이야기를 재론하면서 전세계 유명 관광지의 화장실을 모두 이용할 수 있도록 해주고 싶다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생일 밤, 집사람은 문제의 돼지저금통과 영화 스틸을 이용한 부부의 사진, 그리고 장문의 러브레터를 읽으며 눈물을 흘렸다. 그 모습을 보며 나도 덩달아 눈물이 났다.
집사람은 동전을 사용했지만 편지와 사진은 보관하고 있다. 난 집사람에게 한 약속을 아직도 지키지 못하고 있다. 오호 애재라.
배장수Profile
경향신문 영화 전문 기자.
영화 담당 기자 16년에
최근작 ‘그때 그사람들’까지
43편에 카메오로 출연했다. 대표작으로 ‘마누라 죽이기’ ‘태백산맥’ ‘은행나무 침대’ ‘박하사탕’ ‘엽기적인 그녀’ ‘취화선’ ‘태극기 휘날리며’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