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트라라도 좋다, 시켜만 다오”

카메오 일기

“엑스트라라도 좋다, 시켜만 다오”

류승완 감독은 `‘친절한 금자씨’에 행인을 자청, 엔딩 크레디트에 이름을 올렸다. 임수경씨는 박찬욱 감독의 요청으로 여자 교도소 현장 조언을 해주다가 교도관으로 출연했다. 찾아가느냐 기다리느냐, 비중을 따지느냐 개의치 않느냐. 카메오 인생의 성패 또한 선택에 달려 있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는 말이 있다. 류승완 감독이 영화 ‘친절한 금자씨’에 출연한 게 바로 이런 경우에 해당된다. 나도 그런 적이 있다.

‘친절한 금자씨’에서 류 감독의 배역은 행인. 여고생 금자(이영애)가 백선생(최민식)에게 안부를 묻는 전화를 할 때 지나가는 인물이다. 그 사람이 류 감독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촬영 현장에 있던 영화인들과 그 측근뿐일 정도로 미미한, 말 그대로 행인이다.

그럼에도 류 감독의 출연은 기자들과 관객들 사이에 화제가 됐다. 그가 한낱 행인으로 출연했기 때문이 아니다. 엔딩 크레디트에 류승완이 우정출연자로 나올 때에야 그가 출연한 사실을 안데다 모두 어떤 장면에 나왔는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기자시사회 때 오리지널 판으로, 극장에서 디지털 판(색조가 컬러에서 흑백으로 서서히 바뀜)으로 두 번 봤지만 류 감독을 발견하지 못했다. 처음 볼 때 몰랐기 때문에 두번째 볼 때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봤지만 찾아내지 못했다.

이와 관련, 류 감독이 나오는 장면을 찾기 위해 영화를 두세 번 본 관객이 있다는 말이 나돌았다. 관객들 사이에 류 감독 찾기 내기가 벌어졌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난 그가 나오는 장면이 편집에서 잘렸다고 생각했다. ‘태극기 휘날리며’에 국수집 손님으로 출연했지만 편집됐고, 엔딩 크레디트에는 이름이 나온 경험이 있어 류 감독 역시 나와 같은 경우일 거라고 여겼다. 자신의 영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와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에서 비중 있는 조연을 담당했고, 유명 감독이기도 한 그가 보잘것없는 행인을 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런 생각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행인이라니. ‘친절한 금자씨’ 제작 관계자에게 그 말을 듣는 순간 솔직히 뜨끔했다. “이제는 비중을 높여야 하지 않겠느냐”는 동료들의 말에 내심 동의하던 내가 부끄러웠다. 류 감독에게 우정출연한 경위를 들으면서 그처럼 거꾸로 가는 게 난국을 타개하는 방편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연하려는 애초의 의도가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에 있는 만큼 초심으로 돌아가 엑스트라라도 개의치 않고 여러 편을 하고, 그러다가 괜찮은 기회가 주어지면 최선을 다하자고 마음먹었다.

류 감독이‘친절한 금자씨’에서 행인을 맡은 경위는 다음과 같다. 그는 한때 장씨(오달수)가 운영하는 제과점에서 금자와 함께 일하는 근식(김시후) 후보로 거론됐다. 이영애가 박찬욱 감독에게 근식 역에 류 감독을 추천한 것이다.

결과에서 알 수 있듯 이영애의 제안은 수용되지 않았다. 박 감독이 설정한 근식은 ‘꽃미남’. 류 감독은 “기대가 컸는데 안타깝게도 감독님이 일언지하에 백지화했다”며 당시 실망감이 적잖았다고 밝혔다.

그런 그는 동료 영화인(평소 박 감독과 친하게 지낼 뿐 아니라 ‘친절한 금자씨’에는 ‘주먹이 운다’의 한재덕 프로듀서가 제빵사 장씨를 친 뒤 난감해하는 트럭 운전수로 우정 출연했다) 응원차 촬영 현장을 방문했다가 박 감독의 동의를 얻어 행인을 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 또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대사가 없는 만큼 화면에 얼굴이라도 드러나게 하려고 했죠. 그래야 했다는 티가 나니까. 명색이 감독인 만큼 나름대로 연기를 설정, 지나가면서 고개를 카메라 쪽으로 돌렸는데 NG였어요. 얼굴이 드러나면 안 된다면서 그냥 지나가라는 거예요. 야속했지만 어떡해요. 감독님이 시키는 대로 해야지. 그런데 엔딩 크레디트에 제 이름이 오를 줄은 몰랐어요.”

참고로 우정출연자 중에는 1989년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대표로 평양축전에 참가한 임수경씨가 포함돼 있다. 그의 배역은 교도관. 금자가 교도소의 한 방에 들어갈 때 “손님 받아라”고 말하는, 금자가 마녀(고수희)에게 먹여주는 식사에 매번 소량의 락스를 타는 줄 모른 채 앞장서 데려가는 교도관이다.

임수경씨의 출연은 박 감독의 요청으로 이뤄졌다. 그 과정 또한 흥미롭다. 박 감독은 여자 교도소 내부를 잘 아는 사람이 필요했다. 적임자로 거론된 인물 가운데 한 명이 임수경씨. 추천인은 영화배우 김부선이었다. 임수경씨는 박 감독의 요청을 받아들여 현장 조언을 맡았고 전격 출연한 것.

앞서 언급한 내 경우는 류 감독과 임수경씨의 사례가 뒤섞여 있다. 곽경택 감독의 ‘챔피언’ 미국 현지 촬영 현장에 취재를 갔다가 제작진의 요청에 김득구 선수(1982년 11월 14일에 벌어진 WBA 라이트급 세계 타이틀전 때 그는 챔피언 레이 맨시니에게 맞은 펀치를 견디지 못하고 14회전에 운명을 달리했다)를 응원하는 관중으로 출연했다. 촬영은 로스앤젤레스 근교 오픈 세트에서 수백 명의 엑스트라가 동원된 가운데 진행됐다. 처음에는 현장 취재에만 열중했다. 교민 수가 적은 것 같다며 자리를 채워달라는 제작진의 요청을 나 몰라라 하는 게 야박한 것 같아 이 영화 해외 배급사인 시네클릭의 여직원과 함께 관중석으로 갔다. 미국의 「버라이어티」지와 일본의 NHK 기자 등도 참여했다.

라커룸에서 결의를 다진 김득구 선수(유오성)가 복도를 따라 걸어 나와 링에 오르는 장면, 링에서 몸을 풀다가 환호하는 교민들에게 손을 들어 응답하는 장면을 찍었다. 시합 장면은 다음날부터 찍었다.

교민 관객은 10여 명. 우리에게는 김 선수가 나타나면 고함을 지르고, “김득구”를 연호하고, 태극기를 흔드는 연기 등이 주어졌다. 김 선수가 손을 들어 응답할 때는 객석에서 일어나기로 돼 있었다. 나와 배급사 직원은 일어서지 않았다. 배급사 직원은 쑥스럽다며 일어서지 않았고, 나는 카메라에 얼굴이 잡히면 훗날 주어질지 모를 다른 역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두 팔을 치켜들고 열심히 박수를 치면서 목이 쉴 정도로 고함을 지르는 연기만 거듭했다.

그러나 나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촬영이 끝난 뒤 동료 기자들에게 매너리즘에 빠졌다는 말을 들었다. 다른 배역을 염두에 둔 포석이었다고 해명했다가 핀잔만 더 듣는 등 오히려 화를 샀다. 곽 감독은 고맙다는 말만 여러 차례 했을 뿐 다른 역에 불러주지 않았다. 다른 배역은 안중에 없는데 김칫국을 마신 것이다.

착각일는지 모르지만 김칫국은 마실 만했다. 곽 감독의 데뷔작 ‘억수탕’에 주인 할머니에게 목욕탕을 팔라고 권유하는 부동산업자로 출연한 뒤 주위 사람들에게 연기가 인상적이었다는 소리를 꽤 들은 것이다. 곽 감독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아무튼 난 필모그래피에‘챔피언’을 빼놓지 않고 있다.


배장수 profile
경향신문 영화 전문 기자.
영화 담당 기자 16년에
최근작 ‘그때 그사람들’까지
43편에 카메오로 출연했다. 대표작으로 ‘마누라 죽이기’
‘태백산맥’ ‘은행나무 침대’
‘박하사탕’ ‘엽기적인 그녀’
‘취화선’ ‘태극기 휘날리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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