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형 PD가 영화로 돌아왔다. SBS-TV ‘왕의 여자’ 조기 종영 후 “반드시 더 좋은 작품으로 성원에 보답하겠다”고 말한 지 3년 만이다. 과거 영화 연출 경험이 있지만 스스로 이번 작품이 첫 영화 데뷔작이라고 말하는 김재형 PD. 스타 PD라는 화려한 이력을 뒤로하고 영화감독으로 돌아온 김재형 PD를 만났다.
“흥행은 부담 없는데, 팬들의 기대는 부담되네요”

목젖을 두어 번 휘감은 후에 밖으로 흘러나오는 특유의 목소리로 드라마 현장을 진두지휘하던 김재형 PD가 이번엔 영화에 도전한다. 그가 선택한 작품은 80년대 사회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인권을 유린한 삼청교육대를 소제로 만든 영화 ‘삼청교육대’다.
“과거에도 영화를 만든 적은 있지만 개인적으로 이번 영화가 첫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저 또한 80년대를 산 사람으로서 시대의 아픔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작품을 만들 생각입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삼청교육대는 ‘인권 유린’에 국한돼 있는데, 극을 연출하는 감독으로서 신문이나 다큐멘터리 같은 고발이 아닌 살아남은 자들의 이야기를 담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난 ‘참 사랑’ 이야기를 남녀 주인공을 통해 다루려 합니다.”
한평생 오직 드라마만을 고집하던 그가 영화라는 장르에 도전하자 많은 후배들이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고.
“저는 44년 동안 드라마를 만들던 사람입니다. 후배들이 이번 영화를 맡게 됐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들 자기 일처럼 기뻐해주고 격려해줬습니다. 후배들의 응원에 힘입어서라도 새로운 영화 역사를 만들고 싶습니다.”
김재형 PD는 지난 1961년 KBS에 입사해 국내 최초 연속 사극인 ‘국토만리’를 연출했다. 이후 일일 연속 사극인 ‘사모곡’을 비롯해 ‘연화’ ‘인목대비’ ‘별당아씨’ ‘임금님의 첫사랑’ ‘한명회’ 등 ‘김재형이 만들면 시청률은 걱정 없다’는 말이 생길 정도로 수많은 히트작을 만들어냈다. 그러던 그가 ‘스타 PD’라는 화려한 이력을 접고 현역 은퇴를 바라보는 나이에 영화라는 새로운 장르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저는 드라마와 영화는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영화배우도 드라마에 출연하지 않습니까? 연출도 마찬가집니다. 장르가 아닌 작품으로 다가서야합니다. 선 긋듯이 영화와 드라마를 구분 짓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영화 ‘삼청교육대’는 순수 제작비만 80억가량 들어간 대작이다. 거기에 마케팅 비용까지 합산하면 총제작비는 1백억원이 훌쩍 넘어간다. 김재형이라는 이름만으로도 믿음을 갖던 팬들을 뒤로하고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만만치 않을 텐데도 노장은 자신만만한 기색이다.

이번 영화를 맡기까지 그는 1년여를 고민했다. 영화 제작사는 지난 1년 동안 김재형 PD에게 연출을 맡아 줄 것을 청했다. 특히 올 4월부터는 영화사 대표가 직접 김재형 PD를 따라다니며 청했다고.
“1년 전부터 작품을 맡아달라는 제의를 받았습니다. 구체적으로 감독 제의를 받은 것은 올 4월이었는데 바로 승낙할 수가 없었습니다. 영화에 대한 부담감이 있어서가 아니라 평생을 사극을 만든 사람으로서 갖는 고민이었습니다. 하지만 삼청교육대도 엄연한 우리의 역사라는 생각에 마음을 굳히고 연출을 수락했습니다.”
사극의 대부 김재형 PD. 그는 40년이 넘는 시간 동안 2백 편이 넘는 작품을 연출했다. 그는 왜 역사에 집착하는 것일까?
“제 작품의 85%는 역사물입니다. 제가 시대극에 집착하는 이유는 우선 역사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또 역사를 극으로 옮기는 작업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남이 일구지 않은 땅에 터전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남들이 닦아놓은 밭에 씨를 뿌려 열매를 얻는 것은 나와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불모지나 다름없던 사극에 매진했습니다.”
“진정으로 작품 속에 담고 싶은 건 ‘인간’이죠”
한국 사극의 대부 김재형 PD의 이력은 화려하다. 무려 45년 동안 2백50여 편의 드라마를 연출했으며, 그중에는 드라마 제목보다 연출가의 이름이 먼저 떠오르는 작품도 다수다. ‘여인천하’ ‘용의 눈물’ ‘한명회’ 등은 제목보다 연출을 담당한 그의 이름이 먼저 떠오르는 작품이다.
하지만 그에게도 아픔의 시간은 있었다. 바로 지난 2003년 80부작으로 예정한 ‘왕의 여자’를 조기 종영한 것. “연출 경력 40년 만에 이런 일은 처음”이라고 스스로 말한 것처럼 처음 경험한 시청률 부진이었다.
김재형 PD는 처음 ‘왕의 여자’ 연출을 맡은 때, 한 언론사와 가진 인터뷰에서 “누구나 그냥 딱 보고 ‘아, 이건 김재형이라는 녀석이 만들었구나’ 하게 갑니다. 재미있게, 한껏 재미있게, 그리고 강하게. 시청률, 이번엔 50% 한번 해볼랍니다”라고 호언장담했다. 사실이다. 그의 자신감 못지않게 ‘왕의 여자’는 재미있었다. 특히 그만의 장기인 권력 투쟁과 암투 등을 실감나게 표현했다. 또 남녀간의 사랑도 애틋하게 다뤘다.

한번도 시청률이 부진한 적이 없던 김재형 PD지만 ‘왕의 여자’는 동시간대 방송된 ‘대장금’의 벽을 넘진 못했다. 당시 ‘대장금’은 50%가 넘는 경이적인 시청률을 기록했다. 하지만 ‘왕의 여자’는 고작 8%의 시청률에 머물렀다. ‘왕의 여자’를 연출하기 바로 전인 2002년 ‘여인천하’ 방영 당시 ‘대장금’의 이병훈 PD가 연출한 ‘상도’와 맞붙어 동일 시간대 시청률 압승을 거둔 것과 비교하면 참으로 얄궂은 운명이 아닐 수 없다.
열 달 동안 배앓이를 해 낳은 자식처럼 수년간의 준비 끝에 선보인 작품이 시청률 부진이란 이름으로 조기 종영됐어도 백전노장 김재형은 담담하게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고 물러났다. 그는 난생 처음 경험한 시청률 부진이 전부 연출자의 책임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시청자에게 애초에 예정된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조기 종영하게 됨을 사과했다. 이에 많은 네티즌이 ‘왕의 여자’ 홈페이지 게시판에 드라마 조기 종영 반대의 글을 올리고 방송국 관계자에게 항의 메일을 보냈지만 그는 “차마 얼굴을 들 수 없다”며 “반드시 더 좋은 작품”으로 성원에 보답하겠다며 드라마를 매듭지었다.
그는 “드라마는 일단 재미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자신의 작품 속에 진정 담고 싶은 것은 ‘인간’이라고 설명했다. 평생을 살면서 단 한번 약속을 지키지 못한 연출가 김재형. 국내 최초로 안방극장에 사극 열풍을 몰고 온 그가 영화계에 새로운 신화를 창조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글 / 김성욱 기자 사진 / 원상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