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쁜 우리 젊은 해”

카메오 일기

“기쁜 우리 젊은 해”

올해 만난 여배우 가운데 아름답다고 느낀 이는 엄지원이다. 인터뷰가 가장 즐거웠던 경우는 장 자크 아노 감독과 문소리를 만났을 때이다. 기대 않고 보다가 흠뻑 빠져든 영화는 ‘용서받지 못한 자’, 실망감이 컸던 영화는 ‘야수와 미녀’ 등이다. 카메오의 기자수첩 2005를 공개한다.


지난 5월 칸국제영화제 때이다. 엄지원을 보는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경쟁 부문에 초청받은 ‘극장전’의 김상경·이기우 등과 함께 레드 카펫을 밟으며 입장하는 그는 정말 아름다웠다. 주변을 환하게 밝히면서 강림하는 ‘천사’ 같았다. 주변에 ‘한국 여인’이라고 자랑하고 싶었다.

아름다움은 외모뿐만이 아니었다. 외국 기자들의 질문에 영어로 답하는 등 그는 월드스타로서의 기본을 갖추고 있었다. 평소 영어회화 공부를 해왔다는 데에선 여느 여배우들에게서 볼 수 없던 면모를 읽을 수 있었다. 그의 차기작 ‘야수’ ‘가을로’ 등이 기대된다.

연기력이 돋보인 배우는 황정민과 문소리, 이영애·엄정화·김래원이다. ‘바람난 가족’에 부부로 출연해 2003년 베니스 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받은 황정민과 문소리는 ‘올해의 배우’로 손꼽을 만하다.

황정민은 올해 편수·흥행·변신, 세 마리 토끼를 다 잡았다고 할 수 있다. ‘여자, 정혜’ ‘천군’ ‘달콤한 인생’ ‘너는 내 운명’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등 무려 5편을 선보였고, ‘너는…’과 ‘내 생애…’로 흥행 배우 대열에 들었으며, ‘달콤한…’의 이보다 더 야비할 수 없는 건달과 ‘너는…’의 이보다 더 지고지순할 수 없는 농촌총각으로 전율을 자아내고 심금을 울린 것이다.

문소리는 ‘사랑해, 말순씨’ 1편뿐이지만, 예상과 달리 흥행성적마저 좋지 않지만, 연기력만큼은 경지에 올랐음을 보여주었다. 사춘기인 아들과 미취학 딸을 둔, 억척스러우면서 섬세한, 숨을 거둘 때까지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은 엄마 역을 연기 이상의 연기로 펼쳐낸 것이다. 미혼 여배우로 ‘바람난 가족’과 ‘효자동 이발사’에 이어 또 엄마 역인 점을 개의치 않은 진정한 프로. 그의 또 다른 면모를 보여줄 ‘사과’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 ‘가족의 탄생’ 등이 기다려진다.

이영애·엄정화·김래원은 ‘올해의 변신’으로 손꼽힌다. 이영애는 ‘친절한 금자씨’, 엄정화는 ‘오로라 공주’, 김래원은 ‘미스터 소크라테스’에서 전작들과 판이한 모습으로 스크린을 수놓았다. 이들의 차기작 또한 주목된다.

올해 인터뷰를 한 영화인은 11월 중순 현재 150명쯤 된다. 이들 가운데 문소리, 프랑스의 장 자크 아노 감독 등과 함께 한 시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두 영화인이 들려준 인상적인 이야기의 공통점은 연기 연출 노하우. ‘사랑해, 말순씨’에 자신의 딸로 출연한 아역배우가 우는 연기를 실감나게 하도록 문소리가 동원한 심리기법과 그 밖의 노하우는 카메라에 담아 전국 유치원에 보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흥미로웠다. 교육학과 출신다웠다.

아노 감독이 ‘베어’와 ‘투 브라더스’에서 곰과 호랑이의 갖가지 실감나는 연기를 끌어낸 과정은 시간만 허락한다면 밤새도록 듣고 싶을 정도로, 메이킹 필름을 구입해 두고두고 보고 싶을 만큼 흥미진진했다.

다큐멘터리 ‘엄마…’의 류미례 감독, 페이크 다큐 ‘목두기 비디오’의 윤준형 감독, 북한 소재 다큐 ‘어떤 나라’와 ‘천리마 축구단’의 대니얼 고든 감독과의 만남도 흥미로웠다. 야스쿠니 신사를 소재로 한 다큐 ‘안녕, 사요나라’를 공동연출한 가토 구미코와 김태일 감독,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만난 ‘보이지 않는 사랑’의 티에리 주스, 레스페스트2005에서 자리를 함께 했던 ‘제국’과 ‘플레시’의 에두아르 살리에 감독도 마찬가지.

이밖에 재개봉을 맞아 내한한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감독과 여배우에게 보여준 이 영화 마니아들의 열광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듯하다. 지난 2월 자살로 세상을 등진 이은주와 그의 빈소에서 눈이 퉁퉁 붓도록 울던 설경구의 모습도 눈에 선하다. 지난해 겨울 ‘주홍글씨’ 개봉을 앞두고 만났을 때 “이런 인터뷰는 처음”이라며 “다음 영화 때에도 꼭 인터뷰를 해달라”던 이은주…. 돌아오는 그의 기일에는 꼭 청아공원 납골당을 찾아가 다시 한번 명복을 빌고 싶다.

한편 ‘녹색의자’의 서정 등은 좋지 않은 기억을 남겼다. 인터뷰 당시 자신의 휴대폰 전화를 기꺼이 알려준(곁에 있던 매니저가 이런 일은 처음인 것 같다고 했다) 서정은 개봉을 앞두고 궁금해 하던 일반 관객 반응을 문자·음성 메시지로 남겼지만 응답이 없었다.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았다. 그럴 거면 전화번호는 왜 가르쳐주었는지,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을 거라고 지금은 이해하고 있지만 당시 실망감은 적잖았다. 매니저 번호가 아닌 자신의 번호를 가르쳐준 남녀 배우 가운데 통화가 안 된 이는 그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제2회 서울환경영화제에 관한 인상도 좋지 않다. 개막식에 참석한 국회원원들을 일일이 호명해 인사를 하는 시간을 갖고, 일부는 영상 메시지로도 소개하는 등 정치행사로 퇴색하는 느낌을 준 것이다. 대선 후보들의 무대 인사를 극구 무산시킨 부산국제영화제의 사례를 귀감삼아 3회 영화제부터는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기를 기대해 본다.

올해에도 한국영화는 승전고를 울렸다고 할 수 있다. 흥행작 외 이른바 ‘작은 영화’ 가운데 놓치기 아까운 작품이 적지 않다. 국방부에 현재의 작품과 다른 시나리오를 제출해 촬영 지원을 받은 점 자체는 지탄을 받아 마땅하지만 영화적 완성도는 ‘한국영화의 발견’으로 손꼽히는 윤종빈 감독의 ‘용서받지 못한 자’를 비롯해 다큐멘터리 ‘엄마…’와 ‘안녕, 사요나라’, 페이크 다큐 ‘목두기 비디오’, 극영화 ‘사랑해, 말순씨’, 애니메이션 ‘별별 이야기’ 등이다.

반면 ‘야수와 미녀’ ‘강력 3반’ ‘태풍태양’ 등은 실망감을 준 작품들이다. 특히 ‘야수와 미녀’는 저속어와 욕설이 적지 않은데 ‘12세 관람가’ 등급을 신청한 영화사의 의식과 이를 인정한 영상물등급위원회의 판정에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올해도 얼마 남지 않았다. 해마다 이맘때면 못다 한 일이 많아 후회를 하게 된다. 시간은 유수처럼 빠르고, 할 일은 많고, 해놓은 일은 없는 것이다. 언제나 뿌듯한 연말을 맞을는지, 카메오로서는 ‘말아톤’ ‘마파도’ ‘외출’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 ‘광식이 동생 광태’ 등에 이런 저런 사정으로 출연하지 못한 게 아쉽다. 내년에는 ‘천년학’ ‘투사부일체’ 등에 출연할 예정이다. 올해처럼 무산되지 않기를 빈다.


배장수 Profile

경향신문 영화 전문 기자.
영화 담당 기자 16년에 최근작 ‘그때 그 사람들’까지
43편에 카메오로 출연했다. 대표작으로 ‘마누라 죽이기’
‘태백산맥’ ‘은행나무 침대’ ‘박하사탕’ ‘엽기적인 그녀’
‘취화선’ ‘태극기 휘날리며’ 등이 있다.

※그간 성원을 보내준 독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건강과 행운이 함께 하기를 기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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