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선·이혼 아픔 딛고 라디오 DJ로 돌아온 김형곤

낙선·이혼 아픔 딛고 라디오 DJ로 돌아온 김형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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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패배 후 인생에서 가장 쓴맛 봤지만, 다시 일어서는 40대의 모습 보여주겠습니다!”

‘공포의 삼겹살’ 김형곤이 라디오 DJ로 다시 섰다. 그는 선거 패배와 이혼, 그리고 이어지는 방송 프로그램 폐지 등으로 20~30대 때와는 판이하게 다른 중년을 보냈다. 오랜만에 활동을 재개한 김형곤이 말하는 낙선·이혼의 아픔, 그리고 결혼이야기.

“코미디에 ‘사장님’ 대신 ‘봉순이’ 쓰면 재미 없잖아요”
“카드 때문에 남북 어린이들이 죽어나요. 남한에서는 부모가 카드 빚을 지면 꼭 아이들을 데리고 함께 죽잖아요. 그런데 북한에서는 고사리손을 한 아이들이 카드 섹션에 동원돼서 죽어나더라구요. 가뜩이나 인구감소 때문에 나라 안팎이 시끄러운데, 카드 사용이 많은 크리스마스가 다가와 걱정이에요.”

김형곤(47)은 만나자마자 평양에서 열린 아리랑 축전을 보고 온 후 생각한 코미디 아이디어를 늘어놨다. 시사 코미디의 대가 김형곤이 라디오 DJ로 돌아왔다. 그가 맡은 프로그램은 SBS 러브FM에서 신설되는 ‘김형곤의 세상만나기’(매주 토·일 오후 4시 5분~6시)다. 김형곤은 이번 프로그램을 통해 지난 25년간 쌓은 시사 코미디 노하우를 본격적으로 선보이겠다고 했다.

“TV에서는 10분 녹화해도 방송으로 5분도 채 못 나가요. 그러다보면 녹화를 끝낸 후에도 항상 뒤가 개운치 않았어요. 그런데 라디오는 생방송으로 진행되니까 하고 싶은 얘기를 마음껏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25년 동안 방송생활을 하다 보니 첫술에 배부를 것이란 기대는 하지 않아요. 당장은 아니더라도 ‘라디오에서 이런 방법으로 시사를 다룰 수도 있구나’란 말을 듣고 싶은 게 바람이죠.”

김형곤은 80년대를 대표하는 코미디언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시사 코미디를 선보였다. 서슬퍼런 군사정권하에서 선보인 시사 코미디로 그는 많은 부와 명예를 얻었다. 한편으로는 특정인을 풍자했다는 이유로 안기부에 끌려간 적도 있었다. 방송을 폐지하라는 외압은 늘 그를 따라다녔다. 한창 잘나가던 프로그램도 여러 번 폐지당했다. 한번은 난데없는 세무조사를 받아 빌딩 한 채를 통째로 날린 적도 있었다.

“연예계에서 저처럼 부침이 많았던 사람도 없을 거예요. 돈도 무진장 벌었다가 몽땅 잃어버렸죠. 젊었을 때는 그런 시간들이 고통으로 느껴졌는데, 다이어트를 시작하면서부터 슬픔을 즐길 수 있게 됐어요. 사람들은 ‘살과의 전쟁’이란 표현을 쓰는데, 그러면 절대로 살을 뺄 수 없어요. 전쟁은 누군가 항복해야 끝나는데, 살은 항복을 안 해요. 살을 삶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놀아주고 만져주고 대화하다 보면 어느새 살이 빠지죠. 무시하고 격리하면 더 커져서 큰일나요.(웃음)”

김형곤이 한창 활동했던 때와 달리 이제는 세상이 변했다. 인터넷에서는 과거 그가 보여줬던 풍자는 명함도 내밀지 못할 강도의 패러디가 난무한다. 일반인들이 국회의원은 물론 대통령의 얼굴까지도 마음대로 패러디하지만 안기부는 나서지 않는다.

하지만 김형곤은 오히려 요즘 시사 코미디 하기가 더 어렵다고 토로했다. 각종 협회와 ‘…사모’라는 이름으로 뭉친 일부 팬들은 조금이라도 자신과 의견이 맞지 않는 내용의 코미디가 나오면 과거 국가기관보다 더욱 가혹하게 코미디언들을 공격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리듬을 잃을 것 같아서 전 아예 인터넷을 보지 않아요. 시사 코미디는 열 명 중에 한두 명은 속이 쓰리게 마련이에요. 코미디는 코미디로 봐야하는데, 아직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하죠. 요즘도 조금만 현 정권을 비판하면, ‘넌 원래 노무현 대통령을 싫어한 사람이야’라며 바로 게시판에 항의가 빗발쳐요. 최근에 후배 코미디언 블랑카(정철규)가 ‘사장님 나빠요’로 인기를 얻으니까 외국인을 근로자로 채용하고 있는 사장들과 가족들이 KBS에 와서 ‘왜 사장이 나쁘냐’며 항의를 했어요. 결국 ‘봉순이 나빠요’로 바뀌었는데, 풍자가 없는 코미디가 어디 재미있나요.”

“세간의 부러움을 사는 결혼식도 다시 한번 올려야죠”
김형곤은 1980년 TBC 개그콘테스트 은상을 받으며 연예계에 데뷔했다. 동국대학교 국어교육과 출신인 그는 상금 50만원이 탐나 콘테스트에 참가했다. 이후 그는 방송 데뷔 7년 만에 KBS 코미디 대상을 받고 승승장구했다.

“망하려면 일찍 망해야 돼요. 저는 스물셋에 데뷔해서 7년 만에 코미디 대상을 받았어요. 한창 잘나갔던 20~30대에는 안 되는 게 없었죠. 그런데 사람이 살다 보면 어디 마음대로 되나요. 어릴 때 승승장구하던 사람도 언젠가는 망해요. 그런데 30대 초반에 망하면 금방 일어설 수 있는데 60대에 망하면 그대로 무너지고 말죠. 저는 40에 망했는데, 딱 적당할 때 망했다는 생각이 들어요.(웃음)”

김형곤은 지난 2002년 제16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난생처음 패배를 맛보았다. 당시 경상도당 전라도당 사이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한 김형곤의 낙선은 어쩌면 예정된 일이었다. 비록 선거에는 졌지만 깨끗한 선거를 치렀다고 자부했다. 그래도 선거를 치르며 만만치 않은 돈이 들어갔다. 처음부터 출마를 반대했던 아내와는 선거 패배 후 갈등의 골이 깊어져 결국 이혼에 이르렀다.

“선거를 치르면서 많은 돈이 들어간 건 사실이지만 그게 이혼 사유는 아니에요. 당시 아내는 내가 정치하는 걸 무척 싫어했어요. 아내의 의견을 무시하고 출마를 결정했죠. 결국 선거에 지고 부부간 갈등의 골이 깊어지면서 이혼에 이르게 됐어요.”

이혼 이후 그는 가정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한동안 방황했다. 특히나 한국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아들을 영국으로 떠나보낼 때, 그는 한동안 울먹이며 공항을 빠져나오지 못했다고.

“이혼하고 아이들 돌봐줄 사람이 없었어요. 사람들의 지나친 관심 때문에 국내에 둘 수가 없었죠. 결국 한국말도 잘 못하는 아이를 여섯 살 때 영국으로 유학보냈어요. 살면서 그때가 가장 힘들었던 것 같아요. 아들이 보고 싶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아비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 같아 너무 미안했죠. 선거에서 깨지고, 이혼하고, 말도 잘 못하는 어린자식 남의 나라로 떠나보낸 그 2~3년이 제 삶에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이었어요.”

어떻게 그런 시간들을 견디고 다시 방송에 복귀하게 됐냐고 묻자, 돌아오는 대답은 간단했다. 그는 울고 싶고 화가 날 때마다 웃었다고 했다. 말이 쉽지 그게 가능하냐고 다시 물었다.

“이유 없이 길을 가다가, 거울을 보다가 웃어 보세요. 그러면 걱정이 사라지고 한숨 대신 기가 올라오는 것을 느낄 거예요. 사람들은 웃을 일이 있어야 웃는데, 웃어야 웃을 일이 생겨요. 모두들 힘들겠다고 생각할 때 웃고 있으면, 대단한 사람인 줄 알고 도와주겠다는 사람도 생기구요.”
김형곤은 선거 패배가 값진 교훈이었다고 말했다.

“예전에 이주일 선배가 국회의원이 된 후, ‘내가 어떻게 국회의원이 됐을까?’란 생각을 하다가 일 년이 지난 뒤부터는 ‘저 사람이 어떻게 국회의원이 됐을까?’란 생각이 들더래요. 마찬가지로 저는 국회의원 출마를 하고 국회의원들이 왜 잘못될 수밖에 없는가를 알게 됐어요. 선거를 통해 잃은 것도 많지만 얻은 것도 많아요. 그때의 경험이 지금은 너무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느새 40대 중반을 훌쩍 넘은 김형곤은 요즘 전보다 더욱 열심히 운동을 하고 있다. 그는 앞으로 30kg 가량을 더 감량해 누드사진을 찍을 계획이다. 공포의 삼겹살이라고 불렸던 자신이 누드사진을 찍음으로써 또래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다는 이유에서다. 다이어트를 하려는 이유는 또 있다. 그는 새롭게 시작하는 다이어트식품 사업에 성공한 뒤 모두 부러워하는 결혼식을 다시 한번 올리고 싶다고 했다. 시사 코미디의 대가 김형곤은 말한다. “사람은 제조일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유통기한이 중요하다”고. 세상을 떠들썩하게 할 그의 결혼 소식이 빨리 전해지길 바란다.


글 / 김성욱 기자 사진 / 원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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