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서도 공연하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요”
그는 북한에서 잘 나가던 엘리트였다. 바리톤을 전공하고, 내로라하는 연주인과 가수가 모였던 평양의 청년협주단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버리고 한국에 와서 뮤지컬 배우로 막 발걸음을 내디뎠다. 귀순 배우 최초로 뮤지컬에 도전하게 된 김영운씨가 그 주인공이다.
북한의 함흥예대 성악과를 졸업한 재원
그는 북한에서 인정받았던 성악가다. 바리톤을 전공한 후 여러 무대에서 뛰어난 기량을 보여줘 박수와 환호를 받았다. 북한에서 내로라하는 연주인과 가수가 모였던 평양의 청년협주단에서도 활동했다. 앞날이 창창했던 북한의 엘리트 성악가 김영운씨(29).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뒤로하고, 2004년 7월 한국으로 귀순했다. 그리고 현재는 뮤지컬에 도전하고 있는 새내기 배우로 옷을 갈아입었다. 북한에서는 뛰어난 성악가였지만, 지금은 연기 수업, 보컬 수업, 대본 연습 등 모든 것을 새로 배워야 하는 초짜 배우다.
‘귀순 배우’라는 호칭은 왠지 낯설음과 호기심을 준다.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사투리는 얼마나 심할까? 등등 그에 대한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하지만 뮤지컬 연습실에서 만난 김영운씨의 첫인상은 길거리에서 흔히 마주치는 웃음기 많은 순수한 청년일 뿐이다.
“귀순한 사람들 중에는 사투리를 고치지 못하는 사람도 많은데, 저는 다행히 많이 고쳤어요.(웃음) 아직도 연기 수업을 받으면서 고쳐야 할 것이 많이 나타나요. 무대에서 사투리를 쓰면 안 되잖아요. 무대에 올라가기 전까지 열심히 고치려고 합니다.”
한국에 온 지 이제 1년 6개월. 힘든 결정을 하고 이곳에 왔지만, 아직도 밤마다 북에 두고 온 가족들이 걱정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축구감독으로 일하고 있는 아버지 그리고 리듬체조 감독인 어머니, 그리고 남동생 두 명은 아직도 북한에 남아 있다. 혹여 자신 때문에 가족들이 피해를 보지나 않을까 밤마다 걱정이 앞서곤 한다.
북한에서 김영운씨 가족은 잘사는 집안에 속했다. 부모님이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직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김영운씨 역시 엘리트 코스를 밟으면서 성장했다. 탁아소에 다녔던 4살 때부터 노래를 배우기 시작했다. 다른 아이들보다 끼가 많았기 때문이다. 17세에 고등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화술과 연기 수업을 받았다. 연기를 전문으로 가르치는 고등전문학교에서 그를 입학시키려고 할 정도로 재능도 많았다. 하지만 그의 꿈은 노래였다. 가족의 반대를 이겨내고 성악으로 전공을 정했다. 함흥예술대학 성악과에서 바리톤을 전공했다.
“어릴 때부터 제가 하고 싶은 것만 했어요. 어렸을 때 아버지가 대를 이어야 한다고 축구를 시켰는데, 2년 만에 못한다고 했어요. 가수가 되겠다고 했을 때도 부모님이 무척 반대를 하셨어요. 하지만 노래가 그렇게 좋은데 어떻게 해요.(웃음)”
그는 어렸을 때부터 가수의 꿈을 키워갔다. 북한에서 유명한 보천보전자음악단 때문이었다. 가수는 온통 여자뿐인 모습을 보고, 자신이 최초의 남자 가수가 되고 싶었다고 한다. 함흥예술대학을 졸업한 후에 평양에 있던 청년협주단에 가수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활동하면서 베이스기타, 드럼, 피아노를 배우면서 다방면에서 재능을 쌓아갔다. 앞길이 창창할 것만 같았던 젊은 시절이었다.
하지만 갈수록 북한의 경제상황이 나빠졌다. 심지어 소금까지 줬던 배급이 점차 줄어들면서 주위에서 굶어 죽는 사람들이 생긴 것이다. 그래도 김영운씨 가족은 형편이 좋았다. 배급이 끊어져 죽도 먹지 못하는 사람이 많을 때도, 밥은 먹고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주위에서 굶어 죽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우리도 저렇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배급은 나날이 줄어들었고, 그는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돈을 벌어야만 했다. 배고픔과 가난을 이겨내기 위해 선택한 것이 중국에 가서 일하는 것이었다. 그토록 멀고 무섭게만 느껴졌던 압록강을 처음 건넜을 때를 그는 잊지 못한다.
“압록강만 건너면 바로 중국이거든요. 물 깊이도 무릎 정도밖에 안 되요. 처음 압록강을 건너갔을 때는 ‘이렇게 쉬운데 왜 그렇게 어렵게만 느꼈을까?’라는 생각을 할 정도였죠. 그동안 믿었던 신념이 완전히 깨진 거에요. 그때부터 자주 중국과 북한을 오고 갔어요. 그때는 한국에 갈 생각은 전혀 안했어요.”
중국에서 탈북자들을 만나고, 교회에 나가면서 그동안 자신이 믿어왔던 신념이 잘못된 것을 알게 됐다. 서서히 그의 마음은 북한에서 멀어져갔다. 그리고 한국행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임수경의 방북을 보고 한국행을 꿈꿔
그의 본적지는 경상북도 선산이다. 자신의 본이적지가 남한이라는 것을 안 후부터 막연하게 한국에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특히 ‘통일의 꽃’ 임수경의 방북을 보면서 “내가 임수경보다는 못하지만, 나도 어쩌면 남한 땅을 밟을 수 있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어렸을 때부터 가슴 속에 품어온 꿈을 스물일곱 살에 실천하게 된 것이다.
“탈북자들이 남한으로 오는 루트가 있어요. 우선 중국에서 이틀 밤을 기차 타고 베트남으로 넘어갔죠. 그때 제 순번이 460번이었어요. 그만큼 사람이 밀려 있었죠. 그런데 제가 1번이 되었을 때 원래의 비밀 루트가 사라져버린 거에요. 남한에 오기까지 베트남에서 6개월간 숨어 지냈습니다.”
혹여 경찰에게 걸릴까 숨도 제대로 못 쉰 날들이었다. 400여 명의 탈북자와 함께 살던 곳에서 밖에 나가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난 후에 남한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2004년 7월, 그는 그렇게 한국에 들어오게 됐다. 3개월간의 교육을 마치고 지금은 홀로 나와서 살고 있다.
“‘사람 사는 세상은 다 같다’는 마음으로 왔어요. 다만 북한과 남한의 체제가 다를 뿐이라고 위안을 삼고 있습니다. 가족 걱정만 빼놓고는 혼자 사는 것이 그렇게 힘들지는 않습니다.”
한국에 정착한 후 귀순 배우들이 만든 공연팀에서 활동했다. 성악 창법으로 ‘봄날은 간다’ ‘아침이슬’ 등을 무대에서 불렀다. 미국 공연과 전국 순회 공연을 하면서 맘껏 가수로서의 능력을 뽐내게 됐다. 하지만 그의 숨겨진 끼는 더 큰 무대를 원했다. 그래서 도전한 것이 바로 뮤지컬이다. 북한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장르였지만, 우연히 보게 된 뮤지컬 ‘불의 검’이 그의 인생 항로를 바꾸게 만들었다. 배우가 춤과 노래를 함께 소화하는 장르는 처음이었지만, 너무 매력적이었다. 노래가 너무 좋아서 6번이나 관람했을 정도다.
김영운씨는 서울뮤지컬컴퍼니 김용현 대표의 눈에 띄어 오디션에 참가할 수 있었다.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하루. 손에는 전인권의 노래 ‘사랑한 후에’가 녹음되어 있는 CD뿐이었다. 처음 들어보는 노래를 밤새 연습해서 오디션에 참가해 이번 작품에서 우직한 드러머 ‘강수’역을 따낸 것이다. 타고난 실력과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직도 북한에서 배운 성악 창법이 남아 있어서 고치려고 노력 중이에요. 제가 전인권씨만큼 출중하게 부르진 못하겠죠. 요즘 보컬 레슨을 받고 있어요. 관객분들이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음색의 노래를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열심히 해서 외국으로 진출해야죠.(웃음)”
가장 큰 소원은 북한에 있는 가족들 앞에서 공연을 하고 싶은 것이다. 그는 현재 뮤지컬에 도전한 초짜 배우다. 지금은 숨은 재주꾼이지만, 무대에 선 이후에는 ‘진주를 발견했다’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리기를 바란다. 뮤지컬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3월 3일부터 4월 2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볼 수 있다.
글 / 최영진 기자 사진 / 안진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