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사를 나누고 마주 앉아서 커피까지 한잔 하며 제법 편안하게 얘기한다 싶었는데, 언뜻 그가 쥐고 있던 1회용 종이컵을 보니 가장자리에 잘근잘근 씹힌 흔적이 남아 있다. 이 남자 은근히 긴장하고 있었나 보다. 데뷔 2년 차, 미니시리즈 한 편에 이어 일명 시트콤 드림팀이 제작하는 작품의 주인공으로 전격 발탁되어 선전하고 있는 신인 탤런트 최필립. 안정적인 톤으로 대화를 이어나가던 그의 목소리가 흔들리기 시작한 건, “그럼, 무명시절이 없었던 거네요?”라는 질문을 받은 뒤부터였다.
미소년 발레리노, 해병대 가다
초등학교 때부터 그는 학교에서 소문난 춤꾼이었다. 얼굴도 작고 팔다리가 길었던 그는 주변의 권유로 중학교 3학년 때 발레를 시작했다. 결코 이른 시기가 아니었음에도 그는 발군의 실력을 보였고 무난히 예고에 진학해 콩쿠르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무대에 서면 무용수와 관객의 기 싸움이 치열합니다. 좀 과격하게 얘기하자면 그 순간은 관객들의 에너지를 내가 잡아먹어야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는 거죠. 하지만 무용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갈증이 해소되지 않는다고나 할까요.”
연예 활동이 금지된 학교에 다니던 그는 그 시절 춤 좀 춘다는 친구들과 어울리며 스트리트 댄스를 단련했다. 그 무렵 사귄 친구 충재는 이후 그룹 신화의 멤버가 되어 전진이라는 예명을 얻었고 지금도 자주 만나 술잔을 기울이곤 한다. 98년 성균관대 무용학과에 진학하기가 무섭게 최필립은 5인조 댄스그룹 ‘JR(주니어 리퍼블릭)’의 멤버로 가요계에 데뷔했다. 그가 굉장히 쑥스러워하며 ’장미 한다발‘이라는 노래를 불러줬는데, 어딘가 멜로디가 귀에 익다. 생각만큼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한 탓에 이내 무대를 내려온 그는 1년 넘게 후유증에 시달렸다.
캠퍼스로 돌아와 다시 무용에 매진하던 그가 선택한 돌파구는 해병대 입대. 무용 콩쿠르 입상은 곧 군 면제 혜택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남자 무용수는 오직 거기에 매진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는 2년 동안 군대를 다녀오는 게 얻는 것이 많겠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남자 무용수는 남자답지 못하다는 선입관을 깨고 싶은 의지도 강했다.
하나 해병대 출신 하나 없는 집안의 아들, 심지어 방위 아버지를 둔 그는 집안의 걱정거리였다. 가입소 일주일 기간 중 체력 테스트를 통해 부적격자를 가려낸다는 사실을 안 어머니는 분명 일주일 안에 집으로 돌아올 거라는 확신에 훈련소 입소 날 담담하셨다. 그러나 열흘이 지나도 아들이 돌아오지 않자, 그때부터 눈물로 세월을 보내셨다고.
“눈이 좋지 않아서 신검 때 3급 판정을 받았거든요. 시력 때문에 해병대 떨어질까봐 콘택트렌즈를 끼고 시력 측정을 했어요. 그렇게까지 해서 합격했을 때는 정말이지 대학 붙었을 때보다 좋더라고요.”
한 번에 두 여자를? 실제론 엄두도 못 낼 일

또 한 가지 ‘소울 메이트’에 숨어 있는 최필립의 비하인드 스토리. 극중 연인 수경이 그에게 선물한 말티즈 강아지의 이름이 ‘필순이’인데, 이는 최필립의 본명이다. 도울 필(弼)에 순박할 순(淳), 외조부가 지어주신 이름은 뜻은 좋지만 어려서는 꽤 많은 스트레스를 줬다.
“원래 제 본명으로 데뷔하려고 했어요. 정감 있고 좋잖아요? 오디션에서 저를 발탁한 MBC 이재갑 국장께서 당시 극중 이름이었던 필립을 권해주셨거든요. 요즘은 휴대폰으로도 개를 키운다는데, 어느 분의 개 이름이 필순이라는 얘기를 들으니까, 처음엔 재밌다가도 슬쩍 기분이 나빠지더라고요. 아니 소중한 내 이름을(웃음).”
‘영재의 전성시대’에서 유학 시절 만난 여자로 인해 약혼녀를 배신하는 펀드 매니저 역할을 맡아 강한 인상을 남겼던 그의 이번 역할 역시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두 여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 5년 된 연인 수경이를 버리고 섹시하고 도발적인 매력의 민애를 택하고야 만다. 이러다가 선배 탤런트 이종원의 뒤를 잇는 ‘배신남 전문 배우’가 되지나 않을까 걱정이 앞서는데…. 그래도 그는 여자들에게는 ‘나쁜 놈’으로 찍혔지만, 남자들에게는 공감을 얻고 있다는 항변 아닌 항변을 했다.
“저라면 수경이를 버리지 않았을 거예요. 설마 바람둥이 민애에게 끌렸겠어요? 남자는 결국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돌아가게 마련이니까, 필립도 앞으로는 수경이에게 돌아가 진심을 보여주지 않을까 싶어요.”
올 초 최필립은 1년 반가량 사귄 연인과 헤어졌다. 평범한 학생이었던 그녀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연인의 직업을 힘들어했다. 아무리 바빠도 커피 한잔 마실 여유를 내지 못하는 그에게 아쉬움을 표시하는 그녀에게 최필립은 그만 “그런 것도 이해 못해줄 거면 나를 만나면 안 되지 않겠느냐”는 말을 하고야 말았다. 당시 그는 막 새 작품을 앞두고 한창 예민한 상태였다.
“알고 보니 그날 편입시험에 합격했다는 얘기를 하러 나온 거였더라고요. 제가 편입을 권했기 때문에 기쁜 소식을 알리려고 하던 상황이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헤어지자고 했으니…. 이미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도 없었죠. 수경과의 이별 장면을 촬영할 때 그 친구 생각이 많이 났어요.”
이제 막 신인 딱지를 떼려는 그는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아직 연기력은 짧아서 답답하다”고 했다. 브라운관에 비치는 모습은 늘 아쉽기만 해서 “성형하고 싶다”고 했더니, 부모님께서 “왜 외모로 승부하려 하느냐, 연기력으로 승부해야지! 잘생긴 배우들이 얼마나 많은데”라고 말씀하셔서 한참을 웃었다는 최필립. 그의 목표는 한창 의욕에 불타던 시절의 순수한 열정을 되찾는 거다. 그의 소박한 소년다움이 신선하고 참 반갑다.
글 / 장회정 기자 사진 / 김이석(buri 스튜디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