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비서관 사칭 사기 사건 겪은 백일섭

청와대 비서관 사칭 사기 사건 겪은 백일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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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TV ‘사랑은 아무도 못말려’에서 엄하고 고지식한 아버지 역으로 든든한 무게 중심을 잡아주고 있는 탤런트 백일섭.
오랫동안 좋아하던 초로의 배우를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마주하게 되는 건 정말 못할 짓이다. 그나마 위안이 된 것은
그는 선의의 피해자라는 사실이었다.

“워낙 사연이 드라마틱해서 의심 한번 하지 않고 완벽하게 속을 수밖에 없었다”

4월 말 청와대 비서관과 국정원 기조실장을 사칭해 돈을 가로챈 50대 남자가 사기 혐의로 구속됐다. 번듯한 외모와 세련된 매너로 주로 부유한 미망인들을 상대로 사기 행각을 벌여온 그는 강남의 한 골프 모임에서 만난 미망인 이모씨를 상대로 3억원을 뜯어낸 혐의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수사 과정에서 그가 한 중견 탤런트에게 5억원을 받아낸 사실이 추가로 확인됐다. 이 사건의 피해자는 바로 탤런트 백일섭이었다.

완벽한 사기 행각에 의심 한번 없이 돈 건네
호인(好人) 소리를 듣는 이들이 있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쉽게 사기꾼의 표적이 된다는 게 현실이다. 백일섭은 술 좋아하고 사람 밝히고, 남에게 싫은 소리 하느니 그냥 내가 손해보고 마는 사람이다. 천성은 쉽게 버리지 못하는 법. 인터뷰가 있기 전날 밤 그는 경찰에 최씨의 기소를 원치 않는다는 최후의 진술을 전했다.

백일섭이 최씨를 처음 만난 건 2001년 경기도의 한 골프장에서였다. 우연히 함께 라운딩을 하게 된 인연으로 얼굴을 익힌 두 사람은 집이 같은 분당인데다가 취미가 골프라는 공통점으로 인해 인근 골프 연습장에서 간간이 만남을 이어갔다.

“1967년도쯤인가, 내가 청와대 초청을 받았는데 그때는 초청객들의 신원 조회를 했거든요. 그런데 자기가 당시 내 신원조회 작업을 했다고 하더라고요. 당시 청와대에서 검사로 재직하고 있었다면서요.”

최씨의 연배로 미루어봤을 때 당시에 그 일을 했을 거 같지 않다고 하자, 그는 “남들보다 일찍 법조계에 입문했기 때문”이라고 말해 백일섭은 의심의 시선을 쉽게 거뒀다. 그러나 이번 사건으로 밝혀진 바에 따르면, 67년 당시 최씨의 나이는 고작 열여섯 살이었다. 경찰서에서 이를 전해들은 백일섭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최씨는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사법고시를 최우수 성적으로 합격한 뒤 박정희 대통령 시절 청와대 경제비서관으로 근무했다고 피해자들을 속여왔다. 그는 국정원 고위 간부의 이름을 가명으로 사용했는데, 공교롭게도 실제 고위 간부와 최씨는 외모마저 흡사한 것으로 알려져 그의 사기 행각은 그야말로 날개를 단 듯했다.

“국정원에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었으니까, 믿을 수밖에 없었어요. 한때는 수감 생활을 하고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며 아내까지 잃고 혼자 살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얘기하는데 참 안됐다는 생각이 듭디다. 얘기가 굉장히 드라마틱하잖아요? 일일이 사실 여부를 따질 필요가 없겠다 싶었습니다.”

그러나 최씨에게는 멀쩡히 아내가 있었고, 부산지검 검사라던 아들, 모 회사 창업주라는 할아버지는 애초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의 과거에 대해서 아직도 정확하게 확인한 바가 없다는 백일섭은 “그는 마치 지금껏 거짓말을 참말 하듯 하고 살아온 사람 같았다”고 했다. 사법고시를 패스하고 법조계에 몸담고 있다는 주장에 걸맞게 법에 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고.

사건의 발단은 현재 유명 법무법인의 고문 변호사라고 소속을 밝힌 최씨가 “인천 검단 지구 상가와 경기 용인 아파트에 투자하면 두 배의 이익을 남길 수 있다”고 유도해 백일섭으로부터 2억원 두 번, 1억원 한번, 합이 5억원의 자금을 갈취한 것.

“사업 투자를 제의하기에 ‘어디 한번 해봅시다’ 하고 돈을 건넸지요. 저희 같은 사람들(연예인)은 사회 경험이 많지 않은데다가 변호사는 사회 공인으로서 믿을 만한 사람이니까 사기를 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2년의 세월 동안 골프 연습장도 함께 다니고, 술자리가 있을 때는 부담 없이 불러내기도 하면서 친분을 쌓아온 사이라 백일섭은 돈을 내줄 때도 그 흔한 차용증 하나 받지 않았다. 설마는커녕 추호의 의심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받아간 돈 5억원을 최씨는 개인 용도로 사용했다.

배신감은 크지만 손해 본 거 없다치고 잊으려
4월 말 이 사건이 수면 위로 떠올랐을 때 백일섭은 그때까지도 최씨로부터 사기당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그는 사실과 다르다며 반박했다. 3억원을 날린 이씨의 고소로 조사를 시작한 경찰이 백일섭에게 연락을 취했을 때는 이미 최씨로부터 변제를 받은 상태였다고 한다. 때문에 그는 참고인 자격으로 진술을 했을 뿐이라고 밝혔다.

“주변에서 들리는 얘기가 그 사람이 ‘가짜’라고 하기에, 확인을 해봤더니 돈을 받아가서 투자한 흔적이 어디에도 없었어요. 그래서 현금 5억원 대신 그에 상응하는 가치의 부동산을 변제받는 것으로 일단 마무리를 지었어요. 향후 부동산 시세만 괜찮으면 난 손해 보는 거 없어요. 그냥 부업한 셈 쳐야지요.”

이번 사건에 대한 얘기를 꺼냈을 때, 백일섭은 “별일 아니고, 이미 해결되었으니 기사 쓸 필요 없다”고 잘라 말했다. 자신이 사기를 당했으면 이 참에 화풀이라도 하겠지만, 그게 아니라면서 말이다.

“그의 거짓말에 속은 건 분하고 배신감을 느끼지만 그건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인 거고. 나한테만 그런 게 아니라 주위 사람들에게 다 철저하게 거짓말을 한 거잖아요. 어쩜 그렇게 완벽하게 꾸며낼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 인간적으로 불쌍하더만요. 어쨌든 난 내가 준 것 이상으로 변제를 받았고, 그 사람이 나에게 해코지한 것은 없으니까 하루빨리 털어내야죠.”

차용증을 받아두지 않았기 때문에 최씨가 돈을 받은 적이 없다고 발뺌했으면 일이 곤란하게 되었을 텐데, 그나마 5억원을 받아간 것을 순순히 인정했다는 점에서 백일섭은 다행이라 여기는 듯했다. 40년 연기 베테랑이 속을 만큼 최씨의 연기가 완벽했느냐고 묻자, 그는 “애초부터 의심을 하지 않았으니까”라고 답했다.

“참고인 진술차 경찰서 갔다가 그 사람을 만났는데 미안하다고 하더군요. 포승줄에 묶인걸 보니 참 안됐습디다. 어차피 (이씨 고소 건으로) 죄값은 치르겠기에, 나로 인한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했습니다.”

비 오는 날이면 혼자 분위기 있는 음악을 들으며 운전을 하고, 지방 촬영이 있으면 일찌감치 출발해 생각할 여유를 갖는 것이 좋아서 지금도 매니저 없이 활동하고 있다는 백일섭. 그는 ‘사랑은 아무도 못말려’의 대본 리딩이 있던 날에도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해 대본을 펼쳐들었다.

어쩌다 보니 매일같이 술을 마시게 되어 아내로부터 꽤나 염려 섞인 잔소리를 들은 모양이지만 그는 “즐겁게 술 마시고 운동도 잘하고 일도 열심히 하면서 낙천적으로 살다 보니 건강이 따라오더라”고 했다. 얼마 전 인터넷에서 화제가 된 전문배우 시리즈 중 그가 ‘깜짝 놀라는 아버지 전문배우’로 꼽혔다는 얘기를 들려주자 “허허허”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글 / 장회정 기자 사진 / 이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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