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각 장애인 부모 밑에서 태어난 소녀가 우연한 기회에 스타가 되는 영화 같은 스토리의 실제 주인공인 임은경이 자신의 성장 스토리를 오롯이 책 한 권에 담았다. 꿈을 잃지 않는 이에게 꿈은 곧 현실이 된다는 교훈을 주고 싶다는 그녀의 ‘진짜’ 이야기. 어두컴컴한 연립 주택 반지하 은경이네 집. 어머니는 종일 누군가의 집을 환하게 밝혀줄 샹들리에에 들어갈 작은 전구를 조립하고, 목수 일을 하는 아버지는 집을 비우는 일이 잦다. 친구와 다툼이 있던 날 친구의 어머니가 자기만 나무라는 탓에 단단히 골이 난 은경이는 엄마에게 답답함을 하소연하려 하지만, 엄마는 그저 참으라는 듯 등을 쓰다듬어줄 뿐이다. 은경은 속상한 나머지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우리 엄마 아빠한테 기적이 일어나서 말하고 들을 수 있게 됐으면 좋겠어요.”
책 준비하면서 반성 많이 했다
‘벙어리 딸’이라고 놀림을 받던 둔촌동의 작은 소녀는 화제의 CF 모델을 거쳐, 은막의 요정으로 자리매김했다. 데뷔 초 부모가 청각 장애인이라는 가정사의 일부가 알려졌을 뿐, 이렇다할 이야기보따리를 풀지 않던 임은경이 아주 긴 호흡으로 자신의 성장 스토리를 들려준다. 임은경의 장편 다큐 동화라 명명된 「붕어빵의 꿈」(현문미디어)으로 우리 시대 살아 있는 스타들을 소재로 동화 작업을 하는 ‘우리 시대 아름다운 얼굴’ 시리즈의 첫 작품이다.
“2004년 늦가을 책 집필을 앞두고 작가님과 만났을 때만해도 실감이 나지 않았는데, 막상 내 손에 책을 받아들고 보니 흐뭇하기도 하고 떨리기도 했어요.”
임은경의 부모는 모두 2급 청각 장애인이다. 태어날 때부터 귀가 들리지 않던 아버지는 사람들의 입 모양을 보고 어느 정도 알아들을 만큼 호전됐지만, 어려서 감기를 심하게 앓은 뒤 청력을 잃은 어머니는 전혀 듣지 못한다. 임은경의 기억 속 집은 늘 조용했다. 그나마 할아버지와 함께 살지 않았더라면 대화를 나눌 상대조차 없었을 것이다.
책을 내기로 결정한 것은 2년 전. 어린이에게 꿈과 희망을 준다는 기획 취지에 선뜻 동의한 그녀는 「안내견 탄실이」, 「네 손가락의 피아니스트 희아의 일기」 등을 쓴 고정욱 작가와 여러 차례 만나서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눴다. 어려서 소아마비를 앓은 뒤 휠체어를 타게 된 고 작가와는 어딘가 통하는 점이 많았다. 헤어진 뒤 아쉬움이 남으면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임은경은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내려 애썼다. 가족 외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이나, 시간 등에 조금 변동이 있을 뿐, 책 내용은 거의 대부분이 임은경의 실제 스토리를 담았다.
인형 하나 사줄 형편이 못되는 집안을 원망하며 저도 모르게 친구의 인형을 슬쩍훔친 은경은 하루 종일 두려움에 떨다가, 그만 애꿎은 엄마에게 소리를 지르는 것으로 화풀이를 하고 만다. “엄마는 왜 나한테 인형도 하나 못 사주는 거야? 우리집은 왜 이렇게 가난해?” 잠시 후 은경은 엄마의 깊은 사랑에 눈물을 쏟아내고 만다. 하루 종일 부업으로 번 돈을 모아 그동안 책상도 없이 공부하느라 고생한 딸의 책상을 마련한 것이다. 그리고 그 책상 위에는 수화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그것은 할아버지 밑에서 자라느라 정식으로 수화를 배우지 못한 딸에게 엄마가 건네는 화해의 손짓이었다. “책을 준비하면서 어렸을 때를 떠올리다 보니 제가 부모님 마음을 너무 아프게 했구나 싶었어요. 스무 살이 넘은 지금에서야 반성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어요. 이 책을 읽고 어린이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가족 사랑에 대해 한번쯤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가족사랑 되새길 수 있는 계기 되었으면
임은경은 가슴속에 묻어둔 아픈 가족사를 어렵사리 들추어냈다. 어린 은경은 공사현장 붕괴 사고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던 삼촌을 잃었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청각 장애인이던 삼촌은 “위험해”라는 누군가의 외침을 듣지 못해 그만 수십 톤의 쇠 파이프에 깔리고 말았다. 못된 짓이라고는 한번도 한 적 없는 착한 삼촌을 어이없는 사고로 떠나보낸 임은경은 하늘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그녀의 연예계 데뷔를 예언이라도 하듯 ‘우리 예쁜 탤런트 은경이’라고(수화로) 부르던 삼촌이었다.
“제가 어렸을 때 삼촌하고 6년간 함께 살았어요. 삼촌이 탤런트가 되면 좋겠다는 얘기를 늘 들려준 덕분에 제게 연예계 데뷔 기회가 오지 않았나 싶어요….”
잠시 목이 메는 듯 말을 잇지 못했다. “부모가 장애인일수록 네가 행동을 바르게 하고 모범을 보여야 한다”며 엄하게 훈육하는 아버지로부터 임은경을 마냥 감싸는 커다란 나무 같던 삼촌을 떠나보내며 그녀는 장애인의 어두운 삶에 대해 새삼 돌아보게 됐다. 삼촌이 떠난 뒤, 건설회사에서는 위로금은 지급하겠지만, 장애인이라 보상금을 줄 수 없다고 버텼다. 어린 중학생 임은경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책을 내면서 우려한 점이 있어요. 부모님이 장애인인 거지, 제가 장애인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제가 그 분들의 가슴 아픈 이야기를 꺼낸다는 것 자체가 죄송스러웠어요. 모쪼록 이 책이 장애인에 대한 사회의 벽과 편견을 깨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좋겠어요.”
부모님께 책을 보여드리고도 임은경은 마음에 드시느냐는 질문을 차마 하지 못했다. 다만 책 수익금 중 일부를 장애인을 위해 쓸 거라는 얘기를 드렸더니, 두 분 모두 흐뭇해하셨다고 한다. 책 제목 「붕어빵의 꿈」은 임은경과 어머니가 붕어빵처럼 닮았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그 얘기를 듣는 사람들마다 “엄마도 미인이시냐”고 묻는데 임은경은 웃음으로 답한다.
“외모도 똑같지만 성격도 꼭 닮았어요. 제가 엄마 닮아서 조용하고 내성적이거든요. 그렇다고 낯가림이 심한 건 아니고, 다만 친해지는데 시간이 조금 걸릴 뿐이에요. 제가 보기보다 무뚝뚝한 편이라서요.”
사랑합니다, 나의 부모님
올 초 임은경은 중국 드라마 ‘정애보험’ 촬영차 항저우에 3개월간 머물렀다. 그렇게 오랫동안 집을 떠나 있기는 처음. 기름지고 느끼한 현지 음식으로 인해 엄마가 끓여주신 김치찌개가 그리워지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한달음에 달려오기도 힘든 중국에서 임은경은 밤이면 부모님 생각에 뒤척이곤 했다. 마음이 통한 것일까. 어느 날 아버지로부터 ‘너무 보고 싶고 사랑한다’는 문자 메시지가 왔다. 바다 건너 임은경은 그야말로 감동의 물결. ‘저도 아빠, 엄마를 사랑해요’라고 바로 답신을 보냈다. 보기보다 무뚝뚝한 외동딸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부모님에게 한 사랑 고백이었다.
“한번 말문을 트고 나니까 우리 가족의 애정 표현이 한결 수월해졌어요. 눈도 자주 마주치고, 많이 웃고, 대화 시간도 늘었어요.”
학교(중앙대학교 연극과)도 휴학한데다가 책 준비하느라 다른 활동을 쉬는 바람에 임은경은 한동안 가족에게 충실할 수 있었다.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딸 노릇 제대로 못한 것을 제법 만회한 모양. 내친김에 가족 여행을 한번 다녀오려고 하는데 식구들이 많아서 엄두를 못 낸다고 했다. 외동딸로 알고 있었는데, 그동안 식구가 늘기라도 한걸까.
“저희 집에 강아지가 많아서 도저히 식구들끼리 움직일 수가 없어요.(웃음) 부모님이 아직 해외여행을 한번도 하신 적이 없어서 그게 마음에 걸렸는데, 조만간 가까운 곳이라도 꼭 함께 다녀오려고요.”동네 피자집에서 열린 탤런트 이병헌의 사인회에 갔다가 연예관계자에게 픽업되어, 모 이동통신 CF로 연예계에 데뷔한 임은경. 정체를 숨기는 티저 마케팅으로 인해 온 국민의 관심을 한 몸에 받던 데뷔 초에 비하면 그녀를 향한 관심은 옅어졌지만, 그동안 여섯 편의 영화와 미니시리즈, 청춘 시트콤을 넘나들며 제법 안정된 크레디트를 쌓아왔다.
또 햇볕이 잘 드는 아파트로 이사도 했고, 어머니가 더 이상 부업에 매달리지 않고 가족들을 위한 요리에 공을 들일 수 있게끔 가정의 여유를 불러왔다. 생계를 위해 일에 매달리던 아버지는 딸의 만류에도 “일을 하지 않으면 몸이 아프다”며 목수 일을 놓지 않고 계시다. 임은경에게 연예계 데뷔는 단순히 인기를 얻고 생활비를 버는 것 이상의 가정의 평화를 찾아주었다.
“전 평범한 친구들을 부러워하는 말수 적고 소심한 아이였어요. 우연찮게 연예인이 되고 난 뒤 ‘언니처럼 되고 싶다’는 이메일을 받을 때 가장 흐뭇해요. 나도 누군가에게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는 게 정말 뿌듯하거든요.”
데뷔 초 ‘일본인이다’ ‘소녀가 아니라 소년이다’ 등 루머에 시달리면서도 부모의 장애를 숨기지 않고 당당히 밝힌 그녀는 장애인영화제 홍보 대사를 맡고 각막 이식 수술을 통해 시각 장애인의 시력을 되찾아주는 MBC-TV ‘느낌표’의 ‘눈을 떠요’ 코너 MC로 활동하고 있다. 광명을 찾은 장애인들의 기쁨을 마치 자신의 일처럼 좋아하고 매사에 사려 깊은 모습을 보여주던 그녀는 어느덧 굴레처럼 따라다니던 ‘신비소녀’의 그늘에서 스스로 벗어났다.
“고교생 역할도 많이 했고, 감히 누구도 범접하지 못하는 귀신 역도 맡으면서 다양한 장르를 경험해봤으니 이제는 풋풋한 로맨틱 코미디를 해보고 싶어요. 지금보다 한결 여성적인 역할로 말이죠.(웃음)”
출간을 앞두고 긴장을 한 탓인지, 휴식기간 임에도 호되게 몸살을 앓은 임은경과 부득이하게 전화 인터뷰를 나눴다. 전화통화 초반만 해도 수화기 너머로 그녀의 낯가림이 느껴졌으나 불과 10여 분이 지났을까, 그녀는 단단한 껍질을 깨고 나온 듯 소탈하고 담백한 본연의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오래전 알던 동생에게 하듯이 하마터면 “또 전화할게”라는 말로 인사를 대신할 뻔했다.
‘붕어빵의 꿈’은 청각 장애인 부모를 두었다는 이슈로부터 임은경을 자유롭게 하는 살풀이나 진배없다. 거추장스러운 수식어가 더 이상 필요 없는 배우 임은경. 지금이야말로 그녀가 비상할 때다.
글 / 장회정 기자 사진 그림 / 현문미디어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