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한 역경 딛고 꿈 일궈낸 개그우먼 강유미의 성공시대

지난한 역경 딛고 꿈 일궈낸 개그우먼 강유미의 성공시대

댓글 공유하기
“백화점 캐셔·신림동 고시원 생활… 내 개그를 살찌우는 원동력이에요”

개그우먼 강유미의 인기가 심상치 않다. ‘개그콘서트’의 ‘GoGo 예술 속으로’로 이름을 알리더니 ‘봉숭아 학당’의 강 기자, 새 코너 ‘사랑의 카운슬러’로 연타석을 날리고 있다. 요즘 개그콘서트 게시판은 연일 ‘강유미 최고’를 외치는 시청자들의 의견으로 도배가 되다시피 하는 상황. 천의 얼굴을 하고 사람들의 배꼽을 빼놓는 ‘강 기자’ 강유미의 진짜 얼굴을 최초 보도한다.

주특기는 ‘일상 비틀기’. 고생스런 시간들이 오히려 ‘약’
스물세 살이라는 나이가 놀라울 뿐이다. 생활에 대한 더없이 예리한 관찰력, 나보다 남을 먼저 배려하는 이해심, 익을수록 고개를 숙일 줄 아는 겸손함에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넉넉한 마음씨까지. “혹시 집안에서 맏이냐” 묻자 역시나 “그렇다”고 했다.

TV 속 강유미는 ‘우악스럽기 그지없는 억척녀’. 하지만 실제 만나본 그녀는 방송에서 보여진 모습과는 180도 다른 ‘천생 여자’였다. 달라도 이렇게 다를 순 없다. 이에 대한 그녀의 설명은 “연기는 연기일 뿐”이라는 것. 연기를 할 때는 철저히 프로페셔널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 강유미의 ‘개그 소신’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강 기자’로 맹활약 중인 그녀를 인터뷰하자니 내심 긴장됐다. 말 한번 잘못했다가 “진부한 질문 감사합니다” 소리 듣는 건 아닐까 걱정됐기 때문이다. 다행히 그러한 불상사는 없었으나 대신 옆자리에 앉아 있던 매니저가 곤혹을 치러야 했다. “TV에서처럼 (강유미가) 평상시에도 잘 웃기는 편인가”라는 물음에 매니저가 “네. 같이 다니면 늘 즐거워요”라고 답한 것이 사건의 발단. ‘강 기자’는 순간적인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가식적인 답변 감사합니다”라며 매니저의 입바른 소리를 유머러스하게 꼬집어 냈다.

강유미식 개그는 언제나 이런 식이다. 풍자와 해학이 넘친다. 소재는 언제나처럼 ‘일상’. 판에 박힌 듯한 우리네 일상이 그녀의 손과 발, 그리고 입을 거치면 마법처럼 ‘특별한 무엇’이 되어버리니 신기할 따름이다.

이렇듯 일상을 개그의 소재로 삼을라치면 생활에 대한 애정 어린 관찰력 없이는 불가능할 터.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녹록치 않은 인생을 살았으리라는 추측은 여지없이 들어맞았다. 대다수 개그맨이 그러하듯, 강유미도 힘든 역경을 뚫고 성공에 이른 케이스. 어려서부터 가정 형편이 좋지 못했다. 고등학교 땐 학교에서 연극반 특기생에게 주는 장학금으로 등록금을 다 충당했을 정도다. 건강이 좋지 못하던 아버지를 대신해 일터로 나가신 어머니. 그런 어머니를 곁에서 보고 있자면 가슴 한구석이 아려왔다.

“선생님이 가정 방문을 오신다고 하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곤 했죠. 가난이 무슨 자랑도 아닌고, 남에게 내보이기 싫었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선생님이 말씀도 없이 가정 방문을 오신 거예요. 그리고는 며칠 뒤 강당에서 조회를 하는데 선생님이 절 조용히 불러 세우시더군요. 그리고는 ‘어렵겠지만 기운 내라’시며 장학금 얘길 꺼내시는데… 저 그날 자존심이 너무 상해 강당을 빠져 나와 몰래 눈물을 펑펑 쏟았어요. 지금 같았음 ‘이게 웬 횡재냐’ 싶었을 텐데 말이죠.”

비록 가진 건 없어도 자존심만큼은 지키고 산 강유미다. 그리고 솔직히 돈이 좀 없을 뿐 스스로 불쌍타 여겨본 적도 없다. 강유미는 “그래도 나름 화목한 가정에서 행복하게는 컸다”고 자신의 어린 시절을 평했다.

“제가 성격이 긍정적인 편이에요. 지금 당장은 힘들고 고될지라도 언젠가는 잘될 거다라는 믿음이 항상 있었죠. 성공한 사람들도 강조해 말하잖아요. 긍정적인 사고를 가지라고. 그리고 웃으라고 말이죠. 역시 마인드가 중요한 것 같아요.”

김미화, 박미선의 뒤를 잇는 ‘장수 개그우먼’으로 남는 게 꿈
사회생활에 첫발을 내디딘 후에도 한동안 고생은 계속됐다. 고등학교도 졸업하기 전부터 백화점에서 캐셔 일을 하며 돈벌이에 나선 것을 시작으로, ‘폭소클럽’에 아마추어 개그우먼으로 출연할 당시에는 돈이 없어 신길동 고시원을 전전해야 한 적도 있다. 어쩌면 그렇게 온몸으로 사회와 부딪치며 살아온 날들이 일상에서 날카롭게 소재를 찾는 개그우먼 강유미를 만들었을지 모를 일이다.

“그때 당시는 몰랐는데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어떻게 다 견뎌냈나 싶어요. 1년 동안 캐셔 하면서 기억에 남는 거라곤 직원 장기자랑 나갔을 때 딱 한 차례뿐이고, 고시원 생활할 때는 말도 마세요. 공동으로 사용하는 냉장고에는 누가, 언제 넣어뒀는지 알 수 없는 정체모를 음식들이 가득하죠, 화장실에서 이 닦고 있으면 누가 안에서 볼일 보고 있죠, 세탁기는 또 왜 그리 하루 종일 돌아가는지. 하지만 그 생활에 후회는 없어요.

소재에 관한 것은 철저히 경험에서 우러나거든요. 1년 남짓 짧게나마 회사를 다녀봤기에 ‘GoGo 예술 속으로’ 할 때 회사 관련 소재들을 생각해낼 수 있었구요, 백화점 캐셔 일 하며 화장품 판매원들의 일상을 봐온 게 있다 보니 옷가게 점원 역도 어렵지 않게 그려낼 수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힘들었지만 그 시간들이 지금의 절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예요.”

고단하기만 하던 인생에 한줄기 빛이 내려앉은 건 지난 2004년. 한 차례 낙방의 쓴맛을 경험한 뒤 얻은 ‘KBS 공채 19기 개그맨’ 타이틀은 그녀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는 계기를 마련했다. 고시원에서 빠져나와 아늑한 공간으로 이사도 했고 인기도 얻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보람된 건 힘들게 가계를 꾸리시던 어머니를 대신해 집안 경제를 도맡을 수 있게 됐다는 것. 강유미는 기획사에서 준 계약금과 출연료 등 수입의 전부를 경기도 광주 어머니께 보내드리고 있다.

개그계에 입문한 강유미에게 가장 큰 힘이 되어주는 말은 “어렵지 않느냐” “힘들겠다”는 식의 격려의 말. 캐셔 일 할 때는 하루 종일 서서 일해 다리가 퉁퉁 부어도 어느 한 사람 “힘들죠?”라고 물어보는 이가 없었다.

“물론 개그우먼 생활도 힘들긴 해요. 아이디어를 짜내야 할 때가 특히 그렇죠. 그로 인한 스트레스가 극에 달할 땐 화도 내고 심지어 욕도 합니다. 그래도 이 일이 좋은 건 내가 노력하는 만큼 사람들이 알아준다는 것. 누가 ‘힘들겠어요’ 한마디 해주면 그 말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어요.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저에겐 너무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한마디로 무에서 유를 창조해낸 강유미지만 그녀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 코미디 영화도 만들고 싶고, 정극에도 출연해 중·고교 시절 연극반 활동을 통해 갈고 닦은 연기력도 제대로 한번 펼쳐보일 생각이다. 나이 들어 진짜 성공했다 싶을 때쯤엔 자서전도 한 권 펴낼 생각. 하고 싶은 일은 많지만 일단 목표는 장수 개그우먼으로 남는 것이다.

“김미화, 박미선 선배님 등 현직에서 꾸준히 활동 중이신 선배님들 뵈면 정말 존경스러워요. 그리고 그 분들처럼 꼭 되고 싶단 생각을 하죠. 웃음을 전하는 일, 얼마나 보람되고 기쁜 일이에요. 내가 좋아하는 일하며, 평생 웃으며 살 수 있다면 그것만큼 행복한 일은 없을 겁니다.”


글 / 최은영 기자 사진 / 박형주

화제의 추천 정보

    Ladies' Exclusive

    Ladies' Exclusive
    TOP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