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적’의 가제는 ‘죽기를 각오하다’였다. 제목 값(?)이라도 하듯 박중훈과 천정명은 툭하면 격투 신을 찍고 얼굴에는 반창고를 달고 살았으며, 폭발 직전의 구급차에서 탈출하는 등 죽을 둥 살 둥 극적인 연기를 펼쳤다.
실제로 구급차 두 대를 폭파시키는 위험한 상황에서 제작진은 대역을 제의했으나 끝내 거부하고 직접 촬영에 나선 두 남자는 마치 훈장을 달 듯 영광의 상처를 입었다.
박중훈은 팔과 다리에 약한 화상을, 천정명은 손바닥을 베고 발목을 접질리는 부상을 입었지만 이들의 반응은 그저 촬영이 무사히 끝났다는 것에 대한 만족스런 웃음뿐이었다. 심지어 박중훈은 “불이 붙은 구급차에 갇혀 있는 동안 가족과 친구들의 얼굴이 한 편의 영화처럼 지나갔다”고 너스레를 떨었고, 천정명은 “남자라면 이 정도 액션은 소화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무서워서 다리에 쥐가 났다”며 엄살을 부렸다.
한때 몸담은 조직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 살인 누명을 쓰고 투옥되었다가 용케 탈옥한 수현과 강력계 형사라는 이력이 무색할 만큼 술과 비리에 절어 살아가다가 수현의 인질이 되는 망나니 형사 성우의 48시간 혈투를 담은 영화 ‘강적’. 생사고락의 순간을 끈끈한 파트너십으로 이겨낸 두 남자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들어본다.
‘지금까지의 박중훈은 잊어라’
21년 차 베테랑의 여유와 강단 _ 박중훈
“정명이와 나이 차이가 열 살 이상(정확히는 열네 살이다) 나기 때문에 내 에너지가 떨어지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그래도 끝까지 잘 찍어서 흡족합니다.”
‘투캅스’ ‘투갑스 2’ ‘아메리칸 드래곤’ ‘인정사정 볼 것 없다’ 등 4편의 영화에서 형사 역할을 맡아 이미 ‘반(半)형사’라고 불릴 정도지만, 박중훈은 ‘강적’을 위해 서대문 경찰서에서 ‘잠복’할 정도로 이 영화에 애착을 갖고 덤벼들었다. 덕분에 알게 된 새로운 사실은 요즘 형사들은 모두 깔끔하다는 것. 그 이유는 형사들의 복지를 위해 경찰서마다 사우나실이 생겼기 때문이란다. 현장 학습의 효과로 박중훈은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서는 며칠씩 씻지 않은 모습으로 등장했지만, ‘강적’에서는 말끔한 상태로 카메라 앞에 설 수 있었다.
“미국 영화계에서 우스갯소리로 정말 연기 못하는 배우를 칭할 때 ‘그 배우는 형사 역할도 못한다’고 하거든요. 고백컨대, 정말 맞는 얘기거든요. 그런데 제가 또 형사 역할을 맡았으니 오죽 고민이 많았겠습니까.”
박중훈이 맡은 역할은 아내는 집을 나갔고 수술 날짜 받아놓은 아들의 병원비를 구할 데도 없는 처량한 중년 남자. 조민호 감독은 삶에 찌들고 지친 형사의 모습을 보여달라고 요구했다. “그동안 관객 덕분에 경제적으로 윤택하게 살아왔다”는 그는 자신의 생활에 기름이 많이 묻어 있었다는 걸 새삼 깨닫고 그 틀을 깨기 위해서 노력했다고 술회했다. 하지만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늘 그렇듯 그는 무겁고 진지한 상황에서도 웃음을 이끌어내는 타고난 연기자가 아니던가.
천정명이 몸으로 보여주는 연기로 박수를 받았다면, 박중훈은 무알코올 상태의 음주 연기로 스태프의 감탄을 자아냈다. 자신이 근무지에서 이탈한 사이 목숨을 잃은 동료의 장례식장에서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는 그의 연기를 보고 모두 진짜 술에 취한 것이 아닐까 의심할 정도로 실감 나는 연기를 선보였다고.
동갑내기 조민호 감독이 감히 ‘박중훈씨’라 부르지 않고 ‘선배’라고 예우할 정도로 그의 이력은 탄탄하다. 21년간 서른여덟 편의 영화에 출연했으니 누가 뭐래도 중견. 하나 그는 이번 영화만큼은 자신을 낮추고 감독의 주문 안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한다. 흥행에 대한 자신감으로 읽어도 될 듯하다.

‘내 마음대로 원 없이 뛰고 굴렀다’
소년과 청년 사이 _ 천정명
‘강적’을 보고 나면 ‘배우들 고생 많았겠구나’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그중 천정명의 연기는 ‘역시 청춘이 좋긴 좋다’는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수현 역을 맡은 뒤 그는 얼굴의 젖살을 빼기 위해 7kg을 감량하고 고난도 액션 촬영을 위해 두 달간 액션 스쿨에서 훈련을 받았다. 20대 1의 격투 신도 볼 만하지만, 경찰을 피해 도망가는 장면에서 3m 높이의 담장을 훌쩍 뛰어넘고 굴곡 없이 매끈한 벽을 타고 오르는 연기는 가히 발군이다. 체육학과 출신인 그의 장래 희망 중 하나는 친구들과 스포츠센터를 차리는 것이라는데, ‘강적’을 광고물로 쓰면 고객이 떼지어 몰려들 것만 같다.
“고생은 많았지만 신나고 재미있게, 내 마음껏 촬영에 임했기 때문에 성취감이 큽니다. 박중훈 선배님과도 좋은 추억을 만들었고요.”
SBS-TV 드라마 ‘패션 70’s’의 장빈, KBS-2TV ‘굿바이 솔로’의 민호 역을 통해 선명한 인상을 남긴 천정명은 ‘패션 70’s’와 같은 강한 역할을 한 번 더 해보겠다고 벼르던 차에 ‘강적’ 출연 제의를 받고 단숨에 오케이했다.
영화 속에서 하늘 같은 박중훈 선배에게 따박따박 말대답을 하고 한 치의 물러섬이 없는 반항적인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 그는 현실에서는 굉장히 수줍음이 많고 낯가림이 심하기로 소문났다. 연인으로 출연한 유인영은 “굉장히 순수하고 다정다감한 성격”이라고 그의 매력을 꼽았다.
단단한 근육질 몸매에 우수가 그득한, 그러면서도 천진난만한 눈매를 가져 ‘누나 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그의 인기는 촬영 스태프들 사이에서도 통했다는 후문이다. 조직에 몸담은 과거를 보여주기 위해 그의 상반신을 휘감은 거대한 용 문신을 그리는 3시간 동안 현장에 있던 여자 스태프들은 침을 꼴깍 삼키며 입을 모았다. “하루만 저 용으로 살면 안 되겠니”.
5월 26일 있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의 월드컵 평가전 스코어를 2대 0으로 예상해 적중시키면서 ‘천도령’이라는 별명을 얻은 천정명은 ‘강적’의 관객 수를 5백만 명으로 점쳐 관계자들을 설레게 하고 있다.
글 / 장회정 기자 사진 / 이상민·미로비전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