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맨쇼의 대가 백남봉씨와 아버지의 ‘끼’를 물려받아 다재다능한 딸 박윤희씨 부녀가 토크쇼 공동 MC를 맡아 화제가 되고 있다. 10여 년 전 연예계에 도전했다 쓴맛을 본 윤희씨가 다시 한번 배우의 길에 도전하는 전초전을 아버지가 만들어준 셈이다.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언변으로 무장한 두 사람의 하모니가 기대된다.

부전여전 하나. 국가대표급 언변
“딸에게 ‘이제는 함께 벌자’라고 했죠”
vs “가끔은 서로 말 많이 하려고 경쟁해요”
‘원맨쇼’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바로 남보원과 백남봉씨다. 기관총 소리, 새 소리, 동물 소리 등 다양한 성대모사와 재미있는 이야기로 무장해 배우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모든 것을 다 해낸다. 모든 것이 부족했던 시절, 두 배우는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대표적인 ‘삐에로’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한 시대를 풍미했지만 컬러 TV, 코미디와 개그의 전성기가 도래하면서 ‘원맨쇼’는 자연스럽게 잊혀져 갔다. 아니 그들은 여전히 활동 중이지만 그들의 원맨쇼를 보여주는 TV 프로그램이 사라졌다.
하지만 백남봉(65·본명 박두식)씨는 원맨쇼의 시대가 지났지만 지금도 여전히 바쁘게 지내고 있다. 특히 지난해 말에는 처음으로 앨범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리고 몇몇 TV 프로그램을 통해 구수한 입담을 자랑하며 리포터로 맹활약 중이다. 얼마 전부터는 막내딸 박윤희씨(32)와 함께 케이블 TV에서 토크쇼 ‘스타 베스트 쇼’ 진행도 맡고 았다.
피겨스케이팅 국가대표 선수였던 딸 윤희씨 역시 아버지의 뒤를 이어 드라마 출연, 방송 리포터 등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 아버지의 입담을 이어받은 윤희씨는 토크쇼에서 아버지와 불꽃 튀는(?) 입담을 보여주고 있다. 두 사람의 토크쇼는 항상 생기가 넘쳐 시청자들의 인기를 얻고 있다. 적절한 추임새를 곁들인 구수한 말투와 끊이지 않는 백남봉씨의 이야기 솜씨는 여전했다. ‘원맨쇼의 대가’라는 평가는 그냥 생긴 것이 아니었다.
“아빠와 프로그램을 함께 진행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에요. 사실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때는 안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프로그램 감독님이 아버지와 공동 MC를 할 만한 개그맨이나 신인 여배우를 찾아봤지만 힘들었대요. 아무래도 아버지는 베테랑이잖아요. 잘못하면 말 한마디도 못하고 주눅들 수 있거든요. 그런데 저랑 함께 하니까 호흡이 잘 맞아요. 가끔은 서로 말 많이 하려고 경쟁하기도 하죠(웃음). 제가 운동선수 출신이라 승부욕이 장난이 아니거든요.”
“토크쇼 제의가 들어왔을 때 딸과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윤희 보고 ‘이제 우리 같이 벌자’라고 그랬어요(웃음). 얘도 성격이 있어서 토크쇼에서 저한테 지려고 하지 않아요. 시청자들이 그런 모습을 보고 좋아합니다.”
‘스타 베스트 쇼’는 초대 가수를 비롯해 그와 인연을 맺고 있는 동료 선후배를 초대해 그들만의 세상 사는 이야기와 노래 인생을 이야기한다. 또한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곡들을 다시 들을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한다. 첫 방송에 초대된 스타는 가수 현숙으로 방송에 나와 가슴 아픈 이야기들을 많이 들려줬다.

요즘 백남봉씨는 방송에 출연하면 신인가수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지난해 말 ‘백남봉의 청학동 훈장나리’라는 제목의 음반을 냈기 때문이다. 무대에서 보여준 성대모사와 창으로 다진 노래 솜씨가 아깝다며 노인잔치를 함께 열고 있는 작곡가 박재권씨가 권유해서 이루어졌다. 음반을 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박재권씨가 ‘노래를 맛있게 잘하시는데, 앨범 한번 내보라’고 권유했어요. 박재권씨가 만든 ‘청학동 훈장나리’라는 곡이 타이틀인데, 인기가 아주 좋습니다(웃음). 얼마 전에는 ‘가요무대’에 나가서 노래도 불렀습니다. 그래도 음반은 한 번이면 족하죠(웃음).”
부전여전 둘. 못 말리는 ‘끼’
“저는 맞으면서도 사람들 웃기는 게 좋았어요”
vs “방송국 PD들이 저보고 여자 이휘재라고 했어요”
“윤희가 자랄 때 누군가를 닮기는 했다는 생각을 했어요. 노는 것부터 모든 것이 아비인 나를 닮았어요. 어디에 가서 가만히 못 있고, 말을 해야 소화가 되는 모습이 영락없는 저예요.”
“언젠가 아빠랑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죠. 그런데 우리 이야기를 듣던 친구가 갑자기 사라진 거에예요. 식탁 밑에서 죽을 듯이 웃고 있더라구요. 우리는 심각한데, 남들이 보기에는 재미있나 봐요.”
아버지 백남봉씨의 끼는 온전히 막내딸 윤희씨에게 이어졌다. 큰딸은 내성적인 성격으로 공부와 집만 알았고, 대학 졸업 후에 일찍 시집을 갔다. 하지만 윤희씨는 아직 솔로로 살아가고 있다. 그녀의 끼는 고등학교 때부터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시작했던 피겨스케이팅은 그녀의 전부였다. 그녀는 국내 최초로 피겨스케이팅 부문 국제대회에서 메달을 딴 선수이기도 하다. 중학교 때부터 국가대표 선수로 활동할 정도였다. 하지만 욕심이 많았던 탓에 공부 또한 남들에게 전혀 뒤쳐지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운동과 공부를 함께 잘하는 아이로 소문이 나면서 학교에서 왕따를 당했다.

“고대 실기시험이 남자 위주로 되어 있어서 여자들이 드물었어요. 당시 제가 입학했을 때 70명 정원에 여학생이 저를 포함해서 두 명밖에 안 됐어요. 한 명은 거제도에서 올라온 친구로 양궁을 했는데, 학교에 거의 나오질 않았어요. 그러니 제가 공주 대접을 받았죠. 다른 운동하는 친구들에 비해 몸도 좋잖아요. 그때 농구선수 양희승이 동기로 들어왔는데, 저를 얼마나 쫓아다녔는지 몰라요(웃음).”
윤희씨는 학교에서도 유명 인사였다. 다른 여학생들이 청바지에 티를 입을 때 그녀는 선글라스를 끼고 학교에 나타났을 정도. 그렇게 화제를 몰고 다녔다. 그러다 국가대표 선수 생활을 그만두면서 자연스럽게 배우에 대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녀가 찾아간 사람은 학교 선배였던 주철환 PD. 하지만 주 PD가 그녀에게 한 말은 “너는 개그 시험 보면 된다. 너는 여자 이휘재다”라는 말이었다.
말없이 가만히 있으면 도도한 여자지만, 한번 말문이 터지면 모든 사람들을 웃기는 재주가 있었기 때문이다. 방송국에서 만난 사람들마다 모두 개그맨을 하는 게 좋겠다고 말했을 정도로 그녀의 유머 감각은 뛰어났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개그맨이 될 만한 능력은 없다는 생각이었고, 배우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했다.
“피겨스케이팅 선수를 은퇴하고 얼마 안 돼서 오디션을 봤어요. 연예인에 대한 꿈이 있었거든요. 학교에서 유명인사다 보니 전 당연히 연예인을 해야 하는 줄 알았죠.”
1995년 우리나라 최초의 시트콤 ‘간큰남자’를 시작으로 장동건과 함께 드라마 ‘아이싱’에 출연했고, 리포터와 MC 등으로 신인 탤런트 박윤희라는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백남봉씨 역시 어렸을 때부터 남을 웃기는 일이 가장 좋아했다. 그는 어렸을 때 전쟁과 피난을 경험한 전후세대다. 어렸을 때 아버지를 여의면서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가난과 싸워야만 했다. 가난으로 고아원에 맡겨지기도 했고, 껌을 팔기도 했다. 잣대공장 사원, 구두닦이, 아이스케이크 장사, 장돌뱅이 등 수십 가지의 일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나갔다.
“지금 내가 사용하고 있는 8도 사투리와 장타령, 사설 등이 모두 장돌뱅이 생활을 하면서 배운 것입니다. 장터에 가면 여러 사람이 장사를 했지만, 제 앞에 손님이 가장 많았어요. 제 창 소리가 가장 구수했거든요.”

“서른세 살 때 라디오 공개방송에 나가서 제가 개발했던 ‘김장마라톤’을 선보였죠. 김장에 들어가는 마늘, 양파, 고춧가루 등 양념들이 모여서 마라톤을 벌이는 모습을 중개방송하는 것이었는데, 극장 안이 웃음 바다였죠. 첫 방송이 나간 뒤 여기저기서 출연 요청이 쇄도했어요. 7천원이던 일당이 방송이 나간 후 한 달 만에 4만5천원이 됐으니까요.”
그 후 백남봉씨는 성공가도를 달리기 시작했고 서른일곱 살이 되던 해 TBC ‘명랑백화점’을 시작으로 TV에 출연하면서 원맨쇼의 대부 백남봉은 탄생했다.
부전여전 셋. 도전과 성공
“귀하게 자란 딸이었는데 연예계에 들어와서 고생만 했죠”
vs “경험이 부족했고, 연예계의 현실을 잘 몰랐던 거죠”
대학교를 다닐 때도 윤희씨의 통금시간은 저녁 6시였다. 5시 30분 정도 되면 함께 놀던 친구들도 윤희씨를 집으로 들여보낼 정도였다. 윤희씨는 집에서 너무나 아꼈던 딸이었다. 윤희씨는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했다. 어렸을 때부터 7년간 치과에 다녔을 정도였고, 찬바람만 조금 쐬도 밤새 기침을 하던 딸이었다. 금이야 옥이야 키운 딸이었기에 학교, 아이스링크, 집만 오가면서 살았다.

윤희씨 역시 자신이 있었다. ‘간큰남자’ ‘아이싱’ 등에서 연기를 선보이면서 TV 리포터와 MC 등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방송국은 생각만큼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경험 부족과 연예계의 이면을 보면서 차츰 방송 생활에 회의를 느끼게 됐다.
“운동은 제가 노력한 만큼의 대가를 얻을 수 있쟎아요. 그런데 연예계는 그렇지 않아요. 실력이 어떻든, 누가 데리고 와서 소개시키느냐에 따라 성공과 실패가 결정나요. 술도 못하는데 억지로 마셔야하는 것도 힘들었고. 운동 세계와는 전혀 달랐어요. 실력이 있어도 좌절을 맛보는 배우들을 보면서 많이 힘들었죠. 당시에 국가대표 코치도 하고 있었으니까, ‘방송 일을 계속해야 하나?’라는 생각도 많이 들었죠. 헝그리 정신이 부족했던 것 같아요.”
그렇게 그녀는 자연스럽게 방송국에서 멀어졌고 배우가 아닌 피겨스케이팅 코치나 피겨스케이팅 해설위원으로 살아가기 시작했다. 배우에 도전한 지 3~4년 만에 처음으로 실패라는 것을 맛본 셈이다.
자신의 소중한 딸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가만히 있을 부모는 없을 것이다. 백남봉씨 역시 자신의 인맥을 통해 딸을 도와주려고 노력도 해봤다. 하지만 자신의 부탁이 실상 딸에게는 도움이 안 되는 것이었다. 백남봉씨가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 현장을 떠나 관리직으로 승진했기 때문이다. 남들에게 딸을 봐달라는 부탁을 하는 것도 못할 짓이었다. 밤마다 집에서 연예계 생활에 대해 회의를 느끼는 딸을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백남봉씨는 이제 다시 딸과 함께 당당히 방송을 시작했다. 윤희씨가 방송국을 떠나 있던 동안 많은 경험을 했고, 성숙해졌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케이블 TV에서 딸과 함께 공동 진행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딸에 대한 신뢰가 있기에 가능했다. 윤희씨 역시 여전히 배우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연예계에서 나름대로 맘고생 많이 했어요. 하지만 아빠한테 누가 안 되는 선에서 뭐든 열심히 하고 싶어요. 솔직히 드라마가 너무 하고 싶어요. 예전에 저랑 작업했던 분들이 제 연기력은 인정해주셨어요. 기회가 된다면 당연히 연기를 다시 하고 싶어요. 요즘 오디션 보러 다니고 있는데, 좋은 소식이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윤희씨의 이상형은 아버지 같은 남자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항상 밝고, 집에서는 언제나 웃는 백남봉씨의 모습은 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줬다. 두 사람은 속 이야기까지 주고받을 정도로 다정한 부녀지간이다. 또한 닮은 것이 너무나 많은 부녀이기도 하다. 배우의 꿈에 도전하는 딸,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것이 가장 큰 도전이라는 아버지, 두 사람의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해본다.
취재 뒷이야기
제2의 ‘고춘자-장소팔’같은 뛰어난 입담의 부녀
인터뷰를 위해 백남봉씨를 처음 만났을 때 표정이 약간은 뾰루퉁했다. 무서운(?) 막내딸 때문이었다. 백남봉씨는 기자에게 편안한 모습으로 사진 촬영을 하자며, ‘한강 고수부지’를 인터뷰 장소로 선택했다. 기자 역시 인터뷰 시간에 맞춰 고수부지로 나갔다. 하지만 얼마 안 돼 윤희씨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인터뷰 장소로 적당하지 않다는 것이었고,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예쁜 커피숍으로 장소를 옮겼다. 백남봉씨는 딸에게 “왜 인터뷰 장소를 그런 데로 정했느냐?”며 한 소리를 들었고, 딸에게 한바탕 혼(?)이 난 후였기 때문에 백남봉씨의 표정이 뾰루퉁했던 것. 하지만 얼마 안 가서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웃음 띈 얼굴로 금방 변했다.
두 사람은 그만큼 격의 없이 지낸다. 백남봉씨는 아버지의 권위를 전혀 내세우지 않고, 딸은 아버지에게 모든 고민을 털어놓을 정도다. 딸의 입담 역시 원맨쇼의 일인자인 아버지에게 절대 뒤지지 않았다. 기자 입장에서는 두 사람의 화려한 입담이 편하기도 했지만, 어려운 점도 있었다. 질문을 하나 던지면 두 사람은 10분이건 20분이건 이야기를 술술 풀어냈다. 처음 두 사람은 인터뷰 질문에 대한 답을 이야기하지만, 나중에는 인터뷰 장소에 있는 손님들과 대화를 하는 백남봉씨를 발견하게 된다. 이야기가 터지기 시작하면 쉽게 정지시킬 수 없는 인터뷰이가 두 부녀였다. 이들은 마치 만담의 대가 ‘고춘자-장소팔’처럼 기자를 앞에 두고 쉼 없이 이야기를 이어나갔고 기자는 그들의 만담에 키득키득 웃는 관객이 되었다.
글 / 최영진 기자 사진 / 이준기(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