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귀병 ‘척수염’ 이겨내고 활동 재개한 타이거JK의 소망

희귀병 ‘척수염’ 이겨내고 활동 재개한 타이거JK의 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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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다발에 염증이 생겨서 마비가 오는 희귀병인데,
완치 여부는 아무도 몰라요”


힙합계의 맏형 타이거JK. 그가 희귀병인 척수염을 앓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많은 팬들이 그를 걱정하고 있다. 완치 여부도 불분명하고, 더 나빠지게 될지 좋아지게 될지도 모르는 상태다. 하지만 그는 음악 때문에 다시 일어났고, 앞으로도 음악과 함께 살 것이라며 맑게 웃는다.


디스크로 오인받은 희귀병 ‘척수염’
희귀병 ‘척수염’ 이겨내고 활동 재개한 타이거JK의 소망

희귀병 ‘척수염’ 이겨내고 활동 재개한 타이거JK의 소망

에픽하이, 윤미래, 리쌍, 바비 킴, 양동근, 드렁큰 타이거 등 이름만으로 무게감이 느껴지는 힙합 뮤지션들이다. 이들은 기획사는 서로 다르지만, ‘무브먼트 크루’라는 이름으로 식구처럼 활동하고 있다. 각양각색의 힙합 가수를 한 곳에 모을 수 있었던 것은 타이거JK(34, 본명 서정권) 덕분이다.

지난해 5월 무브먼트 크루의 콘서트장에 타이거JK가 퉁퉁 부은 얼굴로 출연하면서 팬들 사이에서 “무슨 일 있는 것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다. 많은 사람이 그의 근황을 궁금해했지만, 직접 자신의 병에 대해 이야기를 털어놓지 않아 궁금증은 더해만갔다.

기자가 타이거JK를 인터뷰한다고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괜찮은 것 같은데, 정말 아픈 거야?”라는 질문을 많이 던졌다. 그를 만났을 때도 겉보기에는 아픈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우리가 예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큰 고통을 받고 있다.

‘척수염’은 일반적으로 바이러스 감염으로 척수에 염증을 일으키는 질환이라고 알려져 있다. 척수는 뇌의 연수로부터 척추로 뻗어 있는 주요 신경로다. 쉽게 말하면 뇌에서 신호를 보내면 몸의 각 기관에서 응답을 해야 하는데, 신경다발에 염증이 생겨서 뇌의 신호를 몸에서 받지 못하는 것이다.

“언젠가부터 걷는 것도 힘들고 몸이 이상해서 병원에 갔더니 디스크래요. 1년 동안 병원에서 디스크 치료를 받았는데, 효과가 별로 없었죠. 그런데 어느 날 다리에 감각이 없어지고 일어나지도 못하겠는 거예요. 그래서 큰 병원에 갔더니 척수염이라는 진단을 받았죠. 희귀한 병으로 전문의도 몇 분 안 계신데요.”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였다. 태권도로 단련된 몸에 운동도 좋아해서 건강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몸은 의지와 상관없이 더욱 나빠지기만 했다. 배 밑으로 마비가 오기 시작한 것이다. 일어서지도 걷지도 못했다. 소변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고, 병원에서 의료 기구의 도움을 받아 소변 보는 게 빼내야만 했다. 소변이 신경 쓰여서 물도 제대로 먹지 못했고, 밤에는 너무 고통스러워 잠을 잘 수도 없었다.

희귀병 ‘척수염’ 이겨내고 활동 재개한 타이거JK의 소망

희귀병 ‘척수염’ 이겨내고 활동 재개한 타이거JK의 소망

매니저는 매니저대로 ‘난리’가 났다. 용하다는 점쟁이나 의사들을 찾아서 전국 방방곡곡을 다녀야만 했다. 좋다는 음식이나 약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어디든지 가서 구해왔다. 매일 밤마다 힘들다고 전화하는 타이거JK와 몇 시간 동안 통화하면서 진정시키는 것도 매니저의 몫이었다. 하지만 병세는 그다지 좋아지지 않았다.

“병원 치료로 신경다발에 있는 염증을 줄였지만, 완치 여부는 아무도 몰라요. 자료를 찾아봤는데, 19년 만에 척수염을 치료한 환자도 있더라구요. 계속 나빠지는 경우도 있고, 지금처럼 일상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지내는 경우도 있고. 지금은 1주일에 한 번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고, 약을 먹고 있습니다.”

척수염을 치료하는 약은 없고, 대신 스테로이드제 복용을 해야만 했다. 메이저리거 선수들이 근육을 키우기 위해 먹는다는 그 약이다. 하지만 타이거JK는 스테로이드제를 복용하면서 부작용이 생겼다. 바로 몸이 퉁퉁 붓기 시작한 것. 얼마나 부었는지 가족들조차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가 됐다. 얼굴과 몸이 부어 있을 때, 의사의 만류에도 그는 무브먼트 크루의 콘서트에 참가했고, 이는 팬들에게도 병세를 알리는 계기가 됐다. 요즘은 치료를 위해 변비약과 신경안정제 등을 복용 중이다.


결혼은 1년 후, 윤미래와는 친구 사이
병원에서는 ‘활동을 쉬어라’ ‘무리한 운동을 삼가라’ 했다. 하지만 그는 집 안에서 가만히 쉴 수만은 없었다. 척수염 진단을 받은 뒤 2개월 만에 생각을 고쳐먹었다. ‘어차피 못 고치는 거 하고 싶은 일이라도 마음껏 하자’라는 생각에 벌떡 일어났다. 그동안 못했던 운동도 하고, 음악 작업도 다시 시작했다. 남들은 다 말렸지만 그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기적처럼 그는 일어섰다.

“제 컨디션에 따라 몸의 상태도 달라져요. 어떤 때는 내가 언제 아팠는지 모를 정도로 몸이 가뿐하지만, 컨디션이 나빠지면 소변도 나오질 않고 다리에 마비도 와요. 갑자기 쓰러질 때도 있어서 요즘은 지팡이를 짚고 다녀요. 후유증으로 다리 감각이 이상해져서 온도를 반대로 느끼죠. 찬물은 뜨거운 물로 느끼고, 뜨거운 물은 찬물로 느끼고 있어요.”

지난해 아버지 서병후씨의 뒤를 이어서 대학가요제 심사위원으로 참여하기도 했고, 지난 12월에 열린 골든디스크 시상식에서는 직접 노래도 불렀다. 그리고 루게릭병으로 고통받는 전 기아자동차 농구코치 박승일씨를 위해 무보수로 곡을 만들기도 했다. 박승일씨가 직접 쓴 진솔한 글을 랩으로 만든 곡 ‘나는 다시 살아났죠’와 ‘행복의 조건’은 다큐멘터리 배경음악으로 쓰이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 노래를 다시 들을 수 없냐?’는 사람들의 요청으로 디지털 싱글음반으로 만들었고, 이 수익금은 모두 루게릭병을 앓고 있는 환자를 위한 요양소 건립에 사용하기로 했다.

그리고 싸이, 비, 에픽하이, 리쌍의 앨범 피처링에도 참여했다. ‘One Summer Night’을 부른 가수 진추하는 타이거JK에게 노래를 리메이크해달라는 요청을 해와 준비 중이다. 어린이 드라마 ‘외계인 샘’의 주제가를 만들기도 했다. 심지어 힙합 가수로는 처음으로 KBS ‘낭독의 발견’에 나가서 책을 읽기도 했다. 요즘은 윤미래의 음반 프로듀싱을 도와주고 있다. 그리고 얼마 전 몸담고 있던 소속사를 나와 가까운 동료들과 함께 정글엔터테인먼트라는 작은 레이블 회사를 차리기도 했다. 그의 활동을 보면 누구라도 아프다는 것을 눈치채기 힘들다.

희귀병 ‘척수염’ 이겨내고 활동 재개한 타이거JK의 소망

희귀병 ‘척수염’ 이겨내고 활동 재개한 타이거JK의 소망

“주위 도움이 컸죠. 어머니와 할머니도 많이 아프신데, 저 때문에 아프다는 이야기도 안 하세요. 어머니는 제가 아픈 것이 당신 탓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고. 동료들과 가족들이 없었으면 저는 못 일어나지 못했을 거예요. 너무나 고마워요.”

그에게 결혼 계획과 윤미래와의 열애설도 물어봤다.
“결혼은 준비가 되면 하고 싶어요. 지금은 돈이 없어요(웃음). 한국에 돌아와서 노력한 만큼 벌었는데, 부모님과 제 병원비로 많이 써버렸거든요. 경제력이 되는 대로 결혼하고 싶네요. (윤)미래요? (웃음) 결혼에 대해서 이야기해본 적도 없고, 그저 친구일 뿐이에요.”


LA 흑인폭동 때 힙합 페스티벌에서 래퍼로 데뷔
타이거JK는 초등학교 다닐 때 미국 마이애미로 건너갔다. 가족 중에 아버지를 제외하고 남자가 타이거JK 혼자였기 때문에, 여자처럼 되는 것을 막기 위한 아버지의 ‘고육지책’(?)이었다. 마이애미에는 그의 삼촌이 유일한 한국인이었고, 태권도 도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국 땅에서 소수민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녹록치 않았다. 타이거JK 역시 친구들과 수없이 싸우면서 자라야 했다. 다행히 태권도를 배운 탓에 미국 아이들에게 전혀 주눅 들지 않고 생활할 수 있었다. 공부보다는 음악과 태권도를 더 좋아했다. 음악을 좋아했지만, 래퍼가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운명을 뒤바꾼 사건이 터졌다. 바로 1992년 LA 흑인폭동 사건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아이스큐브가 ‘Black Korea’라는 노래로 한국인을 비하했는데, 너무 분했죠. 그래서 역사시간에 논문을 발표해야 했는데, 대신 음악을 틀고 그 노래 가사를 반박하는 랩을 했죠. 의미가 있었는지, 학교에서 상을 받았어요. 그게 소문이 났나 봐요. LA에서 흑인폭동이 터졌는데, 힙합 페스티벌에 초대된 거예요. 당시 한국인에 대한 감정이 상당히 안 좋았어요. 사람들이 거기에 가면 다친다고 다들 말렸죠. 저를 초대한 것도 ‘한번 당해봐라’였던 것 같아요. 거기에서 ‘Call Me Tiger’라는 노래로 즉흥 랩 부문 상을 받았어요.”

그 대회에서 드렁큰타이거 멤버 DJ샤인도 만나게 됐다. 랩의 힘을 그때 느꼈다. 그리고 흑인 친구와 함께 힙합 앨범 한 장을 만들어 한국에 들어왔다. 한국어는 서툴렀지만, 힙합 문화를 한국에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는 달리 한국 사회는 그리 여유롭지 않았다. 방송국 PD나 음반 관계자들은 ‘검둥이와 함께 뭘 하느냐!’면서 문전박대했다.

“미국에서 당했던 인종차별을 제가 한국에서 목격하고 너무 놀랐어요. 저보고 ‘한국말도 못하는 놈이 뭘 한다고’ ‘너는 눈이 찢어져서 안 된다’ ‘안무가 없어서 안 된다’ ‘소음이다’ 등등 별의별 욕을 다 들어봤어요. 방송국의 어떤 PD는 ‘힙합은 이런 거’라면서 룰라의 노래를 틀어줄 정도로 힙합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어요. 다시는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울면서 떠났는데(웃음).”

미국에 돌아가서도 힙합에 빠져 지내던 타이거JK는 가족에게 골칫거리(?)였다. 함께 살던 두 여동생은 “제발 정신 좀 차려라”면서 울면서 하소연하기도 했다.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서 세 사람이 스스로 생활비와 등록금을 벌어야 했는데, 랩을 한다고 돌아다니는 오빠의 모습을 동생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나왔던 아버지는 지인들에게 “자식이 미국에 가서 양아치가 됐다”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정도다. 그의 아버지는 한국 최초의 팝칼럼니스트 서병후씨다.

가족들의 아픔을 보면서 타이거JK는 대학에 가기로 마음을 잡고 UCLA를 목표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누구도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는 해냈다. UCLA에 입학하기 위해 ‘내가 왜 UCLA에 다녀야 하나!’라는 장문의 편지를 학교에 보내기도 했다. 대학에 떨어졌다면 아마도 태권도에 인생을 걸었을 것이다.

“전공은 고등학교 때 은혜를 입은 선생님 때문에 ‘Creative Vriting’을 선택했어요. 입학해서는 노자와 장자의 철학과 문학에 빠져들었죠. 그때는 조용한 곳에서 글이나 쓰면서 지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한국에 있던 힙합 동호회에서 축제에 저를 초대한 거예요.”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초청에 응해 다시 한국에 들어온 것이 1997년이었다. 그런데 고등학생 시절과는 다른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길거리에서 공연도 하고, 미사리 카페나 양로원을 찾아가서 힙합 공연을 하기도 했다. 사람들의 ‘황당한’ 반응 자체가 즐거웠다. 그리고 타이거JK는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1999년 드렁큰 타이거의 1집 앨범 「Year of The Tiger」를 시작으로 「위대한 탄생」(2집, 2000), 「The Legend of …」(3집, 2001), 「뿌리」(4집, 2003년), 「One is Not a Lonely Word」(5집, 2004년), 「1945 해방」(6집, 2005년)까지 여섯 장의 앨범을 내게 된다. 그의 앨범은 힙합 장르에서는 드물게 수십만 장 씩 팔려 대박을 터뜨렸다.

“한국에서 힙합을 하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에요. 처음 활동할 때는 케이블TV PD를 찾아가서 공연 좀 하겠다고 조른 적도 있어요. 아이돌스타 팬들 앞에서 랩을 할 때 썰렁한 분위기가 창피해서 눈을 감고 랩을 하기도 했고. 그래도 그때는 정말 자신감이 많았죠. 그렇게 활동하면서 좋은 친구들을 만나게 됐고, 무브먼트 크루가 만들어지게 된거죠.”

그는 아직 졸업을 하지 못했다. 대학에서 입학금을 빌려서 돈을 갚기 전에는 제적당하지도 못하는 ‘웃기는’ 상황이다. 타이거JK는 언젠가는 대학으로 돌아가 공부를 마치고 싶다. 하지만 아직은 한국에서 할 일이 남아 있다. 남들은 그를 힙합계를 이끌어가는 리더라고 부르지만, 그는 손사래를 친다. 그냥 음악이 좋은 것뿐이라고. 그의 목표는 명예나 돈이 아닌 평생 음악과 함께 사는 것이다.

“저는 특별한 음악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단지 음악 없이는 못사니까, 이렇게 노력하는 거죠. 특별한 계획도 없어요. 지금처럼 음악을 하고 있을 것이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것이 제 꿈이죠. 힙합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면 그냥 가사라도 한번 읽어보세요.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거예요.”


글 / 최영진 기자 사진 / 안진형(프리랜서)·경향신문 포토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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