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동’을 보냐고? 그 장면은 그냥 연기로 봐줘. 나도 많이 민망했어”
‘야동 순재’라는 단어가 요즘 화제가 되고 있다. 할아버지가 컴퓨터 앞에서 “야동, 야동” 하는 것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장면이었고 시청자들은 그 모습에 폭소를 터뜨렸다. ‘거침없이 하이킥’의 시청률 고공행진에 지대한 역할을 한 이순재씨는 ‘야동 순재’라는 별명으로 요즘 최고의 인기를 얻고 있다. 그에게 들어본 배우 인생 50년!
Story 1 첫 시트콤 도전
“야동 보는 장면 비난 많을 줄 알았는데, 예상 밖이야”
며느리와 함께 운영하는 한의원을 찾는 환자들은 며느리에게만 진료를 받기 원해 정작 자신은 할 일이 거의 없다. 한의원에 사람이 많이 올 것이라는 이야기에 방송출연을 결정했다가, 문제를 일으켜 그동안 지켜왔던 한의원 간판마저 교체해야 했다.
그는 그렇게 위엄 있는 가장의 모습에서 문제 덩어리 가장으로 변해가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모습에 환호하고 열광한다. 그의 엉뚱하고 황당한 모습을 보면 왠지 정이 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에게 ‘야동 순재’라는 별명을 붙여주고 ‘키득키득’ 웃는다. ‘야동 순재’ 이순재씨(71)는 그렇게 요즘 최고의 인기를 얻고 있다.
MBC-TV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이 요즘 화제가 되고 있다. ‘시트콤은 이제 죽었다’라는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 시청률은 고공비행 중이다. 그리고 각각의 캐릭터는 ‘식신 준하’ ‘주몽 해미’ 등으로 불리면서 모두 사랑을 받고 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캐릭터는 역시 ‘야동 순재’다.
“야동 많이 보냐고? 난 별로 관심 없어(웃음). 시트콤이니까 그런 연기를 했는데, 많이 민망했어요. 감독한테 왜 이런 것을 시키느냐고 말할 수도 없잖아요. 녹화 끝내고 ‘영감이 점잖지 못하게 뭐 하는 짓이냐!’는 비난이 쏟아질 줄 알았는데, 반응이 예상 밖이야. 다들 재미있다고 하는 거야. 애나 어른이나 그런 일들이 일반적인 상황이 되서 그런가봐(웃음). 사람들이 그런 장면을 보니까 오히려 인간적이라고 좋아하더라고.”
우연하게 아들 컴퓨터에서 야동을 본 후 원장의 머릿속에는 온통 야동 생각밖에 없었다. 가족이 모두 잠든 시간에 홀로 야동을 보고,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야동을 보다가 가족에게 걸려 도망가는 장면을 보면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특히 컴퓨터가 고장이 나서 새로 장만한 노트북에 대고 “야동, 야동”을 외치는 모습은 압권이었다. 그의 말대로 ‘늙은 영감’이 야동에 빠져 있는 모습을 너무 실감나게 연기했고, 시청자는 그에게 ‘야동 순재’라는 영광스러운(?) 별명을 기꺼이 붙여줬다.
하지만 ‘야동 순재’ 때문에 난감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가정도 늘었다. 어린아이들이 “야동이 뭐야?” “나도 야동 볼래”라는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란다. 부모 입장에서는 어린아이들에게 ‘야동’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난감하다는 우스갯소리도 많이 나온다.
‘야동 순재’라는 별명이 회자되면서 ‘거침없이 하이킥’ 제작진은 각각의 캐릭터에 별명을 붙여주는 이벤트를 벌이기도 했다. 마니아들이 좋아했던 시트콤은 ‘야동 순재’를 시작으로 입소문이 나면서 시청률이 오르기 시작했다. ‘야동 순재’는 시트콤의 인기를 끌어올린 주인공인 셈이다.
뒤늦게 인기를 끌고 있는 ‘거침없이 하이킥’은 ‘야동 순재’ 외에도 여러 가지 장면이 화제가 됐다. 윤호와 유미의 어설픈 ‘로미오와 줄리엣’ 연기나, 무당을 ‘포스’로 제압한 ‘주몽 해미’의 모습도 많은 웃음을 선사했다. 그리고 ‘거침없이 하이킥’은 웃음뿐만 아니라 진한 감동도 전하고 있다.
백수 생활 5년 만에 직장을 잡고 출근한 정준하가 퇴근 후 회사의 합병으로 해고됐을 때 보여준 눈물 연기와, 축제용 토끼 의상을 입고 민용에게 사랑 고백을 한 서민정의 모습도 화제를 몰고 왔다. 이순재씨가 배우 생활 50년 만에 처음으로 시트콤에 출연한 것도 ‘웃음’과 ‘감동’을 함께 줄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이순재씨는 시트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캐스팅 제안도 없었지만, 제안을 받아도 쉽게 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예전에는 모 드라마 감독에게 “시트콤을 하려면 노인 시트콤을 해보라”고 했을 정도다. 젊은이들만 나와서 억지로 웃기려고 하는 것이 못마땅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코미디 영화 중에 ‘파니’라는 작품이 있어요. 두 노인이 젊은이들을 골탕먹이는 내용인데, 노인들은 희노애락을 알고 있거든. 그래서 만일 시트콤을 하려면 ‘노인 시트콤’을 해보라는 거였죠. ‘거침없이 하이킥’은 가족 코미디극이고 웃음뿐만 아니라 진지한 내용도 담고 있어서 좋아. 감독에게도 메시지가 있는 내용이 자주 들어가야 한다고 말하죠.”
시트콤 첫 도전에 ‘야동 순재’로 대박을 낸 이순재씨가 코믹 연기에 도전한 것은 처음은 아니다. TBC에서 연기자로 활동할 때 사미자, 이덕화, 차화연과 함께 ‘아롱이 다롱이’(1980)라는 코믹 드라마에서 연기한 적도 있지만, ‘야동 순재’는 그가 선보인 최고의 코믹 연기다.
하지만 70이 넘은 배우에게 일일 시트콤은 꽤 힘든 도전이었다. 1주일에 4일을 촬영하는 일정은 생각보다 훨씬 피곤한 일이었다. 대학 강의와 연극 스케줄이 겹쳤을 때는 “이러다 쓰러지는 건 아니지 모르겠다”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다행히 시간이 갈수록 배우들끼리 호흡도 잘 맞아서 촬영이 수월해지는 걸로 위안을 삼고 있다. 그리고 시트콤에 많은 애정을 갖게 됐다.
“시트콤이니까 관객에게 즐거움을 줘야지. 하지만 가슴 뭉클한 가족간의 사랑도 많이 보여줬으면 좋겠어요. 그런 가치관이 마지막까지 가야 해. 가족 드라마로서 품격을 잃지 않도록 나도 노력해야죠. 시트콤 출연은 재미있는 경험이야(웃음).”
Story 2 소문난 영화광
“나는 연기도 예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
이순재씨의 이력 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이 서울대 철학과 출신이라는 점이다. 전도유망한 철학도가 연기에 빠져든 것은 ‘영화’ 때문이었다. 50년대 중반 대학에 다닐 때 그의 별명은 ‘영화 박사’였다. 감독과 배우의 계보를 정리해서 친구들에게 알려줄 정도.
그는 문화원에서 영화의 세례를 받았던 세대도 아니었기에, 영화관을 순례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는 1천 석 규모의 대규모 극장이 대부분이었다. 국제극장, 스카라극장, 국도극장, 피카디리극장, 단성사, 우미관 등을 순례하면서 대학 시절을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좌석 지정제 시절도 아니었기에, 한 번 입장해서 맘에 드는 영화가 있으면 몇 번이고 볼 수 있었다.
기억나는 영화로는 ‘제3의 사나이’ ‘올리버 트위스트’ 등이다. 특히 영국의 캐롤 리드 감독의 ‘심야의 탈주’는 일곱 번이나 봤을 정도로 인상 깊은 영화다. 당시 국내에 개봉한 영화 1백여 편 중 90편 이상을 봤을 정도로, 영화는 대학 시절 가장 친근한 벗이었다.
“고전 영화는 모두 휴먼 스토리예요. 스크린에서 본 명배우들의 연기를 보면서 ‘연기도 충분히 예술이 될 수 있구나’라는 것을 느꼈지. 로렌스 올리비에의 ‘햄릿’을 보면서 너무 놀랐어요. 캐롤 리드 감독의 작품도 좋아했고. 당시에는 영화가 재미도 있었고, 예술성도 살아있던 시대였지. 명배우들의 연기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연기에 빠져들었어요.”
그리고 3학년 때 ‘서울대연극연구회’를 만들면서 연극을 시작했다. 당시 연극동아리는 각 단과별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이순재씨가 ‘서울대연극연구회’라는 이름으로 묶으면서 활발한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초대 회장은 극단 성좌의 권호일 대표가 맡았고, 이순재씨가 2대 회장을 역임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 입대를 했다. 군에서 3년을 보낸 후에도 그는 취직이나 사법고시 등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머릿속에는 연기만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집안의 반대는 불보듯 뻔한 것이었다. 당시는 배우로 산다는 것이 ‘사서 고생’하는 시대였다.
“어느 날 아버지가 나를 불러서 그러더라고. 앞으로 뭐든지 열심히 하면 밥은 먹고 살 것이라고. 최선을 다하라고 허락해주셨어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연극배우로 살게 됐지. 만일 내가 연극을 하지 않았으면 정치인이 일찍 됐을 거예요.”
1957년 이순재씨는 극단 ‘떼아뜨르 리브’에 입단해 본격적으로 배우 생활을 시작했다. 그의 첫 작품은 ‘지평선을 넘어서’였다. 그리고 1960년 10월 대학에서 함께 연극을 했던 친구, 고대, 연대 출신 연극 배우들과 함께 ‘실험극장’을 결성해 창단 멤버로 활동했다.
“처음 신혼집은 장인어른이 도와줘서 원효로에 있는 한옥에서 살았어. 그러다가 처가의 도움에서 벗어나기로 하고 그곳을 나와 전셋집을 전전했지. 30대 후반에 처음으로 홍은동에 집을 지었어. 당시 평생 살려고 지은 집인데, 아이들 교육 때문에 안 되겠더라고. 그래서 압구정동으로 이사를 갔다가 지금은 면목동에서 살고 있어요.”
이순재씨는 1965년 TBC 개국과 함께 전속 탤런트가 됐다. 이후로 연극과 드라마, 영화를 오가면서 다양한 활동을 펼쳤지만, 수입은 그리 좋지 않았다. 먹고살기 위해서는 하루에 4편의 영화를 촬영할 때도 있었다. 남편 뒷바라지 때문에, 아내는 무용을 그만두고 분식집을 열어 장사를 하기도 했다. 이순재씨가 빛을 보기 시작한 것은 1966년 연극 ‘천사의 고향을 돌아보라’를 통해 한국연극영화예술상 연극 부문 대상을 차지한 후부터다. 그때 받은 상금이 신혼살림에 큰 도움이 됐단다.
드라마와 영화, 연극을 오가면서 바쁘게 생활하다 1978년 ‘세일즈맨의 죽음’을 끝으로 드라마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그 후로 ‘사랑밖엔 난 몰라’ ‘풍운’ ‘허준’ ‘상도’ ‘토지’ ‘장희빈’ 등을 통해 많은 인기를 얻게 됐다. 언제부턴가 서울대 철학과 출신이 아닌 뛰어난 연기력을 가진 배우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내 자랑 같지만 난 몇 가지 기록을 가지고 있어. 최장수 일일 드라마였던 ‘보통 사람들’에도 출연했고, 최고 시청률 기록을 가지고 있는 ‘허준’에도 출연했지. 그리고 일일연속극으로는 최고 시청률이었던 ‘보고 또 보고’에도 나왔으니까, 운이 좋은 사람이지(웃음).”
Story 3 1인 다역의 아버지
“너무 바빠서 자식들에게 아빠 역할도 못했어”
지난 12월은 이순재씨가 가장 바쁜 때였다. ‘거침없이 하이킥’ 촬영에다 얼마 전 끝난 연극 ‘늙은 부부 이야기’ 연습과 공연, 그리고 석좌교수로 있는 세종대 수업까지 그는 일주일 내내 쉴 틈 없이 움직여야만 했다. 특히 2000년 ‘세일즈맨의 죽음’ 이후 5년 만에 도전했던 ‘늙은 부부 이야기’는 많은 인기를 얻어서 앵콜 공연까지 했다.
“더블 캐스팅이었는데, 드라마 때문에 나만 빠졌어. 대신 다른 배우가 합류해서 연극은 계속 올라갈 거야. 앵콜 공연까지 한 5개월 정도 했는데, 이제는 후회 없어.”
빡빡하게 채워져 있는 스케줄에도 연극 무대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연극에 대한 진한 사랑 때문이었을 것이다. 연극에 대한 사랑을 학생들에게 물려주기 위해, 1998년부터 세종대 연극영화과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그가 맡은 수업은 이론이 아니라 워크숍 위주의 실습이다. 이론 수업처럼 시간을 딱 정해서 진행하기 어렵기 때문에, 시간이 있을 때마다 학교에 찾아가 연기지도를 하고 있다.
“아무래도 워크숍 수업이기 때문에 강의 시간은 별 의미가 없어요. 내가 시간이 날 때마다 학생들을 찾아가서 지도하고 있지. 보통 저녁 7시부터 11시까지 수업을 할 때도 많아. 그래도 연극영화과 학생들인데, 졸업하면 대사라도 잘하게 만들어줘야 되잖아요. 학생들 가르치면서 나도 배우는 게 많아요.”
그리고 이순재씨는 봉사활동에도 참여하고 있다. 5년 전 중랑구청에서 만든 사회복지협의회 일인데, 기관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틈새계층을 위해 봉사하는 단체다. 그가 국회의원으로 활동할 때 지역구가 중랑구였다. 1987년 13대 총선에 후보로 출마했다가 낙선했지만, 14대 총선에서는 ‘대발이 아버지’의 높은 인지도를 밑바탕으로 국회에 입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4년 후 ‘배우가 천직’이라면서 정치권을 떠났다. 정치권을 떠났지만, 인연을 맺은 지역주민을 떠나지 못하고 봉사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1966년 결혼 후부터 지금까지 그는 숨가쁘게 살아왔다. 드라마, 영화, 연극, 대학 강의 그리고 정치까지 수많은 영역을 넘나들었다. 드라마에서 보여준 ‘대발이 아버지’라는 이미지는 실상 집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아이들 교육과 가사 일은 오로지 아내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바쁜 생활 탓에 아이들에게 신경을 써주지 못한 것이 미안하다는 생각뿐이다.
“아이들 얼굴도 자주 못 봤는데, 어떻게 엄한 아버지가 될 수 있어. 아이들 볼 때마다 미안한 마음에 뭐라고 하지도 못해요. 남들은 내가 깐깐한 아버지라고 생각들을 많이 하는데, 실상은 전혀 아니야.”
그래서였을까? 아들 종혁씨와 딸 정은씨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연기자가 되고 싶다는 말을 한 번도 꺼내지 않았다. 그리고 아들과 딸은 어느새 한 가정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됐다.
‘야동 순재’로 최고의 인기를 얻고 있는 이순재씨는 올 한 해도 바쁘게 보내야만 한다. ‘거침없이 하이킥’에 이어 지난 1월 15일 첫 방송된 KBS-TV 드라마 ‘꽃피는 봄이 오면’에서 전과 4범 아버지 역을 맡았다. 그리고 가을에는 이병훈 연출의 작품을 통해 또 한 번 사극에 출연할 예정이다. 이번에도 선이 굵은 왕 역할을 맡을 예정이다.
“최고의 전성기가 언제였냐고? 연기자로 살아오면서 그런 생각은 안 해봤어요. 연기는 혼자서 튄다고 되는 게 아니지. 손해보는 것이 있더라도 함께 맞춰가야 하는데, 요즘 젊은 배우들은 그걸 못하는 것 같아요. 인기가 높다고 연기력이 좋다는 것은 아닌데 말이죠.”
연기도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뛰어든 배우 생활이 벌써 50년이 넘어가지만, 이순재씨에게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다. 매순간 최선을 다하고, 매순간 새로운 연기를 보여주려는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70이 넘은 나이에도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연기자로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다. ‘야동 순재’는 어느 한순간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 50여년의 연기 경력이 만들어낸 노력의 결과라는 것을 알게 됐다.
■글 / 최영진 기자 ■사진 / 박형주·경향신문 포토뱅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