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희(딸)를 업고 창밖을 내다보는데 눈물이 주르륵 흘렀어요”
도회적 세련미를 풍기며 각종 CF와 드라마를 섭렵했던 배우 김남주. 동료 배우 김승우와 결혼, 연이은 출산으로 화제를 뿌렸다. 그간 사생활을 전혀 공개하지 않아 세간의 궁금증을 더하기도 했던 그녀. 그런 그녀가 6년 만에 돌아왔다. 출산과 결혼으로 여인의 인생, 한 페이지를 무난히 써냈기 때일까? 침착하고 한층 성숙해진 모습이다. 반가운 그녀에게 결혼 생활과 딸아이 이야기를 들어봤다.
‘실제’와 ‘연기’ 혼동했던 그녀의 깊은 모성
“아이 목소리라도 듣게 해주세요.”
“돈을 인수할 때까지 아이 식사를 중지하겠습니다. 아이에 대한 애착이 없군요. 형호 위에 형 있죠? 걔도 조심하십시오.”
범인의 차갑도록 침작한 목소리가 섬뜩하기 그지없다. 지난 1991년 1월 29일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놀이터에서 이형호 유괴사건이 발생했다. 44일간 이어진 범인의 협박과 함께 추격전이 벌어졌지만 결국 한강 배수로에서 아이의 처참한 사체가 발견됐다. 그놈 목소리… 60여 차례의 협박 전화 속 범인의 목소리가 고스란히 녹음되어 자료로 남아 있지만 끝내 범인을 잡지 못했다. 당시 경찰은 수사 인원 10만여 명을 투입했다. 지난 2006년 1월 공소시효가 만료됐고 지금까지 사건은 미제로 남아 있다.
영화는 아이를 잃어버린 부모들의 애끓는 심정, 그 끔찍한 시간들을 그려냈다. 6년 만에 스크린으로 컴백한 김남주(36)는 모성애가 강한 엄마 ‘오지선’역을 맡았다. 이 역할은 아이를 잃은 모성,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절망적인 기분을 표현해야 했다. 아이를 낳은 경험 없는 미혼의 여 배우가 과연 이 애끓는 심정을 표현할 수 있을까? 엄마가 된 지 1년, 한창 딸 재롱에 푹 빠져 지내던 김남주에게 적격인 역할이었다. 그녀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다. 적어도 촬영을 시작하기 직전까지는 말이다.
“처음엔 한 아이의 엄마라는 사실이 이 역할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어요. 하지만 극이 진행될수록 오히려 아이의 엄마라는 게 너무너무 힘들었죠. 자신의 아이가 유괴된다는 것. 아무리 연기라 하더라도 너무 끔찍한 일이었어요.”
그녀는 눈물 연기를 한 후에는 촬영이 끝나도 감정을 추스르기가 힘들었다고 했다. 언제나 구급차가 필요할 정도로 실신 직전까지 감정을 몰아가 연기했다. 아이를 잃어버린 기분은 아무리 연기라고 자각을 한들, 가슴이 아파 견디기 힘들었다. 박진표 감독은 그녀에게 너무 깊은 감정에 빠지지 말라고 주문하곤 했다. 김남주는 인터뷰 중에도 아이에 관한 답변을 할 때마다 눈시울을 붉히며 울먹였다. 도회적인 매력이 물씬 풍기던 그녀가 지금은 뜨거운 모성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다. 새삼 모성의 힘이 느껴진다.
그녀의 처절한 연기는 메이킹 필름에서도 쉽게 볼 수 있었다. “아저씨, 살려주세요. 우리 애 밥은 먹여야 되잖아요, 아저씨”라며 협박범에게 울부짖는가 하면 “저 지금 전화를 받으며 무릎 꿇었어요”라는 애끓는 대사를 외치기도 한다. 그녀는 격앙된 감정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스태프들에게 부축을 받은 채 눈물을 멈추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김승우·김남주 부부의 복덩이 딸, 라희
김승우·김남주 부부의 딸인 라희가 지난해 11월 첫돌을 맞았다. 그녀는 자신의 딸아이 이야기만 나오면 각별한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대중 앞에서 잠시 멀어졌던 시간 동안 여느 엄마처럼 딸과 함께 평범한 일상에 푹 빠져 있었던 모양이다. 가정생활과 육아에 집중했던 탓이었을까? 그간 그녀가 작품 활동에 소홀했던 것은 사실이다. 모습을 보여준 건 단지 몇 편의 CF뿐이었다. 그녀가 ‘연기’를 보여주지 않았던 탓에 항간에서는 본업에 소홀하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그녀는 그런 비판을 의식한 듯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CF도 하나의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연기 활동을 쉬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촬영장에 복귀한다는 부담도 적었고요. (CF와 다른 연기 활동) 서로 크게 시스템이 다르지 않다고 봐요.”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그녀가 컴백작으로 영화를 선택했다는 점이다. 김남주는 지금까지 브라운관의 스타였다. 톡톡 튀는 연기는 가벼운 트렌디드라마에 더 어울렸다. 게다가 스크린 데뷔작인 ‘I Love You’는 톱스타 김남주가 주연으로 나섰음에도 참패를 면치 못했다. 그녀는 배우로서 첫 영화의 실패를 늘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귀작을 이번 영화로 선택한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터. 김남주는 빈틈없는 시나리오와 ‘너는 내 운명’을 연출한 박진표 감독에 대한 믿음으로 출연 제의를 승낙했단다.
“시나리오가 머리가 쭈뼛쭈뼛 설 정도로 무서웠고 너무 슬퍼 밤새 울었어요. 연기자를 떠나 한 아이의 엄마로서 공감은 갔지만 ‘내가 과연 해낼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이 든 것도 사실입니다.”
비록 4개월 동안 촬영장에서는 아이를 잃은 엄마로 눈물로 밤을 지새웠지만 실생활에서의 김남주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가정주부다. 이제 막 말을 배우기 시작한 딸의 재롱과 조금 무뚝뚝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자상한 남편 김승우(38)의 외조가 있기 때문. 그녀는 촬영을 앞두고 늘 냉정해지려고 다짐했지만 쉽지만은 않았다.
촬영장에서의 감정을 집까지 가져오면 딸과 남편에게 미안할 것 같아 촬영 기간만큼은 일부러 일터와 집을 철저히 분리해왔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편안해야 할 가정에서도 왠지 힘들어질 것만 같았단다. 촬영 4개월 동안을 눈물로 보냈지만 그만큼 가정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 시간이기도 했다.
딸아이 라희는 부부에게 말 그대로 복덩이다. 아이가 태어난 이후로 두 사람의 연예 활동이 그 어느 때보다 순조롭기 때문이다. 지난해 김승우는 ‘해변의 여인’과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 두 편의 작품성 있는 영화로 연기의 성장을 거듭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번에는 김남주 차례다. 6년 만에 컴백한 그녀가 과연 어떤 연기를 보여줄지 기다렸던 팬들의 기대가 날로 높아지고 있다.
“너무 기대하시면 곤란한데… 승우씨와 저 둘 다, 결혼하고 라희를 얻으면서부터 일이 잘 풀리고 있는 건 확실해요. 흥행 결과도 중요하겠지만 진심이 전달된다면 더 기쁠 것 같아요.”
모성을 바탕으로 한 그녀의 절절한 연기는 영화의 비극을 생생하게 재현했다. 그녀는 배우이기 전에 한 아이 엄마로 진심을 담아 이야기한다.
“이번 영화가 진짜 완성되는 날은 크랭크업이 아닙니다. 미제 사건으로 남은 실제 범인이 잡히는 날이 이 영화의 진정한 크랭크업이 아닐까 생각해요. 더 이상 그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연기했습니다.”
남부러울 것 없던 한 가정을 파탄에 이르게 한 범인은 아직 잡히지 않았다. 영화 ‘그놈 목소리’는 실제 범인의 목소리를 중간 중간 들려주며 관객의 마지막 도움을 구하고 있다. 영화는 비극을 다뤘지만 절망만을 이야기한 것은 아니다. 범인이 잡히기를 바라는 마지막 희망을 이야기한 영화다. 딸아이와 함께하는 행복한 실생활 탓에 영화 속 비극이 더욱 슬프게 와닿았고 가슴속 깊은 곳의 모성애까지 끌어내 연기했던 김남주. 그녀가 6년 만에 컴백해 혼신의 힘을 다해 관객에게 호소한다. 한 가정에 지울 수 없는 아픔을 준 ‘그놈 목소리’를 찾아달라고.
■글 / 이유진 기자 ■사진 / 박형주·영화사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