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이 저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예요.
그라운드에서 다시 뛰는 모습을 팬들에게 보여주고 싶습니다”
‘앙팡 테러블’ 고종수가 1년 6개월 만에 그라운드로 돌아왔다. 지난 1월 8일 무적 선수라는 꼬리표를 떼고 대전 시티즌에 입단한 것이다. 축구팬들은 그를 환영했고, 그는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으로 축구화를 질끈 동여맸다. 그를 따라다녔던 숱한 소문에 대한 해명과 속마음을 듣기 위해 전지훈련을 떠나는 그를 공항에서 만났다.
‘만약에…’라는 단어가 입안에서 맴돈다. ‘만약에 그에게 천재적 재능이 조금만 부족해 노력파로 거듭났다면!’ ‘만약에 2002년 월드컵 대표팀에 발탁되었다면!’ ‘만약에 일본 J리그에서 성공했다면!’ ‘만약에 부상이 없었다면!’ ‘만약에 연예인의 끼가 없었더라면!’ 등등. 과거 ‘왼발의 천재’ ‘앙팡 테러블’(무서운 아이)이라는 찬사를 들었던 고종수(29), 그러나 지금은 ‘비운의 천재’라 불리는 안타까운 신세가 되었다.
J리그에서 실패하고 돌아와 재기를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전남 드래곤즈에서 2006년 방출통보를 받고 무적선수가 된 지 1년 6개월. 축구팬들은 ‘이제 고종수는 끝났다’라며 안타까워했다. ‘온라인 게임에 빠져서 훈련도 안 한다’ ‘음식점을 개업했다’ ‘몸무게가 90kg 이상이다’ 등의 많은 억측과 소문들도 그의 재기불능을 뒷받침했다.
하지만 고종수는 이런 예측을 비웃기라도 하듯 다시 그라운드로 돌아왔다. 지난 1월 8일 대전시티즌에 입단해 ‘백의종군’을 선언한 것이다. 그리고 1월 11일 팀과 함께 키프로스로 전지훈련을 떠났다. 2년 전 전남 드래곤즈 소속으로 전지훈련을 떠났던 장소가 바로 키프로스였다. 전지훈련을 떠나기 위해 인천공항에 모습을 드러낸 고종수는 소문처럼 뚱뚱하지 않았다.
“의자에 앉아서 이야기하죠”라는 기자의 요청에 “앉으면 살이 쪄서요. 그냥 일어서서 이야기하겠습니다”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몸 관리를 얼마나 철저히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인터넷에 떠도는 몸무게 90kg은 뜬소문에 불과했다. 그는 “전성기 때의 몸무게가 77kg이었는데, 현재는 81kg이다”라고 말했다.
“1년 6개월 만에 팀에 합류했습니다. 오랫동안 쉬어서 그런지 설레기도 하고 겁도 많이 나요. 운동을 쉬다가 팀에 합류하면 감각이 많이 떨어지게 되죠. 이번 전지훈련에서 다른 선수들보다 두 배로 열심히 뛰어 반드시 극복해낼 생각입니다.”
그간의 모진 고통과 벗어나기 힘들었을 질곡 탓이었을까? 전성기 때 보여줬던 재기발랄함과 자신감은 간데 없고 그에게선 예의 차분하고 조심스러운 태도가 엿보인다. 고종수는 공항에서 다른 선수들과 어울리기보단 혼자서 조용히 사색하는 일을 택했다. 선배보다 낯선 후배들이 훨씬 더 많고, 오랜만에 전지훈련에 참가하는 부담감이 컸던 때문이었을 게다. 왁자지껄한 선수단 분위기에서 홀로 빠져나와 고독을 씹는 고종수의 모습이 왠지 낯설어 보였다.
“입단한 지 얼마 안 됐기 때문에 아직 어색하죠. 예전에 함께 뛰었던 선수들보다 처음 접하는 젊은 친구들이 훨씬 많아요. 젊은 선수들은 아직 저에게 말 걸기도 힘들어하고. 세대교체가 이뤄진 것 같아요. 전지훈련 다녀오면 선수들과도 많이 친해지겠죠.”
고종수는 대전시티즌 입단을 축구선수로서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한다. 그는 연봉을 구단에 위임했고, 계약서에 ‘시즌 중 문제가 생길 경우 언제든지 해고될 수 있다’는 조건을 스스로 내걸면서까지 이번 기회에 매달렸다. 이 사실 하나만을 두고 봐도 고종수가 그간 얼마나 그라운드를 그리워했었는지를 알 수 있다. 구단 역시 전지훈련 기간 동안 고종수의 몸을 예전처럼 만드는 데 힘을 보탤 예정이다. 이영익 수석코치의 전담 아래 강도 높은 체력훈련으로 고종수의 몸을 전성기 때로 되돌려놓겠다는 것.
대전시티즌 최윤겸 감독은 “절대로 서두르지 않고, 고종수에게 충분히 시간을 주겠다”고 말한다. 최 감독은 고종수의 재기에 가장 필요한 것이 ‘몸무게 감량’이라고 보고 있다. 전성기 때의 몸무게로 만든 후 개인기량 회복 훈련과 팀 전술 적응 훈련을 시킬 예정이다. 고종수는 전지훈련을 통해 몸무게를 얼마나 줄이는가에 따라서 그라운드에 서는 시기가 달라질 전망이다.
팬들은 그가 그라운드를 떠나 있는 동안 어떤 생활을 했는지에 관해 무척이나 궁금해했다. 소문대로 온라인 게임에 빠져 있었는지, 아니면 청담동에 음식점을 개업했는지? 그는 쓴 웃음과 함께 이런 소문에 대해서도 해명을 아끼지 않았다.
“사람들은 자신이 직접 보지도 않은 것을 마치 진짜인 양 이야기를 만들어내곤 하죠. 사실과 전혀 다른 이야기가 인터넷에 많이 떠도는데, 확인되지 않은 추측에 의한 것들이 대부분이에요. 그런 소문들 때문에 저도 많이 힘들었고, 또 그로 인한 고충은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죠. 하지만 그런 소문들로 괴로워하며 허송세월하진 않으려 해요. 지난 1년 6개월간 꾸준히 개인 훈련을 했어요. 여름에는 양수리에서 운동을 했는데, 매일 산에 오르고 자전거로 30km씩 달렸죠. 그리고 11월부터는 홍익대에서 훈련을 했구요. 홍대 축구부 감독이 제 친구거든요.”
고종수는 소문 때문에라도 더더욱 인터넷을 잘 이용하지 않는 편이다. 자신에 대해서 비난의 댓글을 다는 네티즌들이 무섭기도 하고, 그런 소문 때문에 가족들도 많이 아팠했기 때문이다. 미니홈피의 메뉴들도 모두 닫아버린 상태. 하지만 그에게 힘을 보태준 사람들도 다름아닌 네티즌들이었다.
“미니홈피를 열어놓기만 하고 메뉴는 모두 다 닫아놓은 상태거든요. 그래서 팬들이 저에게 꼭 할 말이 있을 땐 쪽지로 메시지를 대신하곤 하죠. 대부분 빨리 그라운드로 돌아오라는 내용이에요. 그런 쪽지들 볼 때마다 너무나 고맙죠. 그래서 제가 다시 일어설 힘을 낼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일본 J리그 적응에 실패한 후 K리그로 돌아와 2005년 전남 드래곤즈에 입단했을 때만 해도 그에게 거는 팬들의 기대는 컸다. 비록 전성기 때의 몸은 아닐지라도 ‘축구 천재’ 고종수의 실력만큼은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초반에는 그래도 선전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과욕이 화근이었다. 몸에 이상이 오기 시작한 것이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지만, 이번에는 발목이 문제였다. 하지만 행여 변명처럼 들릴까 가능한 한 티 안내고 참아보려 애썼던 고종수다. 다시 주어진 더없이 소중한 기회를 그렇듯 허무하게 날려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입단 9개월 만에 그는 결국 다시 수술대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발목에서 뼈가 자라 신경을 자극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그렇게 또다시 그라운드를 떠나 있어야만 했다. 축구 인생 20여 년 동안 고종수가 수술대에 오른 횟수만도 무려 7번. 마음을 다잡으려고 하면 부상이나 사건이 터져 번번히 그의 발목을 붙잡고 들었다.
“1년 6개월 동안 많은 것을 느꼈어요. 축구선수로 한창 이름을 날릴 때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저를 찾더니만, 1년 넘게 혼자 있으니까 연락이 다 끊기더군요. 가족들의 격려가 없었더라면 정말 견디기 힘들었을 거예요.”
그러면서 그는 안정환, 이동국 선수를 이야기했다. 이를 악물고 훈련에 매진하며 자신과 싸워내고 있을 때 그들의 격려는 크나큰 힘이 되어 주었다 한다. 무적 선수의 아픔을 함께 겪었던 안정환과는 남산에서 훈련을 같이 하기도 했다. 특히 이동국 선수와는 흉금을 털어놓는 절친한 형, 동생 사이로 지내고 있다.
고종수, 안정환, 이동국, 이 세 명의 선수는 K리그의 흥행을 만들어낸 ‘트로이카’로 손꼽힌다. 안정환의 최근 수원 삼성 입단은 고종수의 입단과 맞물려 이번 시즌 최고의 흥행 카드가 되어줄 전망이다. 그 가운데 이동국은 현재 영국 미들즈브러 입단을 추진하고 있다. 트로이카를 한꺼번에 볼 수 없다는 것은 약간의 아쉬움으로 남는다.
“K리그가 저희가 돌아왔다고 인기가 높아지지는 않을 거예요. 축구 팬의 안목이 얼마나 높아졌는데요! 구단과 선수들이 모두 재미있는 축구를 보여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다들 이기려고만 하니까 게임이 재미없어졌어요. (안)정환이 형도 이번에 K리그로 복귀했는데, 잘할 거라고 믿어요.”
한때 ‘고종수 존(zone)’이라는 것이 있었다. 골문 앞의 ‘아크 서클’ 부근인데, 고종수가 이곳에서 프리킥을 하면 대부분 골로 연결됐다. ‘고종수 존’에서 그가 프리킥을 찰 때면 팬들은 마치 골이라도 넣은 것처럼 환호했다. 특히 그의 왼발 프리킥은 ‘예술’이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명예로운 기록은 국내 최연소 ‘고교생 국가대표 선수’다. 18세 어린 나이에 올림픽 대표팀에 발탁된 것이다. ‘앙팡 테러블’(무서운 아이)이라는 별명은 여기에서 비롯됐다.
고종수는 여수서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축구를 시작했다. 구봉중학교와 광주 금호고를 거치면서 청소년대표팀, 올림픽대표팀에 연이어 발탁, 축구계의 희망으로 사랑받았다. 그리고 1996년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1억원의 계약금을 받고 수원 삼성에서 프로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1억원의 계약금은 당시 고졸 선수로는 최고액이었다.
그는 K리그의 흥행 보증 수표였다. 뛰어난 실력과 함께 연예인 못지않은 ‘끼’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랩부터 트로트까지 못하는 노래가 없었기에, 축구 시즌이 끝날 때면 각 방송국에서는 그를 섭외하기에 바빴다. 시트콤에서 연기도 하고, 토크쇼에서는 화려한 언변을 뽐내기도 했다.
“축구 선수가 축구나 하지, 왜 방송에 출연하냐면서 욕도 많이 먹었어요. 그런데 저는 시즌 끝나고 휴식 기간에만 방송에 출연했거든요. 당시에는 팬 여러분들께 축구 선수의 모습뿐만 아니라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그랬던 건데, 지금도 그때의 행동에는 후회가 없네요.”
그는 다른 축구 선수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는 선·후배 관계가 철저한 축구계에서 거침없는 행동으로 적잖이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청소년대표팀에 있을 때는 평가전에서 8골이나 넣었지만, 튀는 행동으로 한 달 만에 방출됐다. 감독이 어떤 지시를 내렸음에도 그가 선수들을 다시 불러모아 작전을 바꿀 정도로 고종수는 거침이 없었다.
대표팀에서는 나이에 맞게 잔일도 해야 하지만, 그런 것에 전혀 구애받지 않아 ‘대학 5학년생’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던 그다. 머리를 염색도 하고, 목걸이를 비롯한 액세서리까지 걸치기도 했던 그는 ‘축구 천재’이면서 그라운드의 ‘말썽쟁이’이기도 했다.
하지만 팬들은 그런 그에게 열광했다. 심지어 구단에서 그의 팬클럽을 다 관리했을 정도다. 무엇보다 고종수의 탁월한 축구 실력은 그의 튀는 성격을 충분히 덮어주고도 남음이 있었다. 1998년에는 한국프로축구 MVP로 선정됐고, 2000년 아디다스컵 득점왕, 2001년에는 AFC(아시아축구연맹) 선정 ‘이달의 선수상’도 수상했다. 호주 4개국 축구대회 국가대표, 1998년 프랑스월드컵 국가대표, 2000년 시드니 올림픽 국가대표, 2001년 한·일 올스타 대표 등 그는 국제대회에서도 좋은 활약을 보여줬다. 고종수의 해외진출은 누가 봐도 충분히 실현 가능한 일로 보였다.
하지만 그의 성공가도는 2002년 월드컵 대표팀 탈락과 함께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2002년 한일월드컵이 끝나고 J리그 교토 퍼플상가에 입단했다. 하지만 J리그 적응에 실패했고, 돌출행동이 문제가 되어 2004년 수원 삼성으로 복귀했다. 그리고 그후 신분 논란으로 또 한차례 문제를 야기, 2005년 전남 드래곤즈로 이적하게 된다. 하지만 9개월 만에 부상으로 경기를 마감해야 했고, 급기야 2006년에는 구단에서 방출 당하는 수모까지 겪었다. 그후로 1년 6개월. 그렇게 끝인가 보다 싶던 그가 돌아왔다. 대전시티즌에 다시 둥지를 튼 것이다. 고종수의 그라운드 복귀 소식에 팬들은 따뜻한 박수로 그를 맞아줬다.
“제 소원요? 부상 없이 운동장을 뛰는 것입니다. 10분을 뛰건 90분을 뛰건 그건 중요치 않아요. 다시 그라운드에만 설 수 있음 더 바랄 게 없습니다. 이번이 저의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해요. 남들보다, 그 어떤 때보다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지켜봐주세요.”
고종수는 2월 15일 전지훈련을 마치고 돌아온다. 전지훈련의 성과가 어떨지는 아직 미지수지만, 그의 재기가 아무쪼록 성공적이기를 바란다. 비운의 축구 천재로 그렇게 조용히 그를 잊고 지내기엔 축구팬들이나 축구계 모두의 손실이 적잖다. 골을 넣은 후 그라운드에서 멋지게 덤블링을 해보이던 고종수의 통쾌한 골 세리머니를 이번 시즌 우리는 만나볼 수 있을까?
■글 / 최영진 기자 ■사진 / 이성원·경향신문 포토뱅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