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파 배우? 그 실력 제대로 한번 펼쳐 보일 게요!”
충무로에서 왕성한 활동을 펼쳐온 연기파 배우 이범수가 연기생활 17년 만에 처음으로 안방극장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드라마에서 그가 맡은 역할은 냉철하면서도 이지적인 의사 안중근. 극과 극을 오가며 변신 준비에 한창인 배우 이범수를 그의 새 작품 SBS TV 드라마 ‘외과의사 봉달희’의 제작발표회 현장에서 만났다.
영화는 ‘마라톤’, 드라마는 ‘100m 달리기’
지난 1월 12일, SBS TV 드라마 ‘외과의사 봉달희’ 제작발표회에 참석한 이범수(38)는 데뷔 16년 만에 드라마에 첫 출연하는 소감을 이렇게 전했다.
이날 제작발표회에는 드라마의 타이틀 롤을 맡은 여 주인공 이요원의 불참에도 불구하고 1백여 명의 취재진이 몰려와 불꽃 튀는 취재경쟁을 펼쳤다. 이에 대해 한 방송 관계자는 “이요원씨가 참석하지 않아 취재진들이 오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는데, 이렇게 많이 올 줄 몰랐다”며 “아무래도 드라마에 처음 출연해 화제를 모으고 있는 이범수의 힘 아니겠느냐”고 살짝 귀띔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룹 인터뷰 시간, 이범수 쪽으로 취재진들이 대거 몰리는 진풍경이 연출되며 상대적으로 다른 배우들은 소외감을 맛봐야 했다. 이범수에게 집중된 질문은 역시 “왜 이제서야 TV로 눈을 돌리게 됐는가”라는 것.
이에 이범수는 “그동안 영화 시나리오가 끊임없이 쏟아졌기 때문에 드라마에 눈길을 돌릴 새가 없었다”며 “시기도 좋고, 작품도 좋아 선택하게 됐다”고 그 이유를 밝혔다.
드라마 ‘외과의사 봉달희’는 흉부외과 1년차 레지던트인 봉달희(이요원)가 의사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담은 메디컬 성장드라마. 극중 이범수는 천재적이면서도 차갑고 이지적인 전문의 ‘안중근’ 역으로 분해 라이벌로 나오는 이건욱(김민준)과 봉달희를 사이에 두고 러브라인을 형성한다.
그동안 영화에만 출연해왔던 이범수에게 ‘드라마 시스템에 잘 적응하고 있는지, 영화와 차이점은 없는지’에 대해 물었다.
“영화는 수개월 동안 촬영을 하기 때문에 마라톤과 같아요. 반면, 드라마는 영화보다 빠른 템포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현장에서의 순발력이 절대적이죠. 하지만 영화나 드라마나 전 제 자신을 믿기 때문에 잘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웃음).”
이번 작품은 메디컬 드라마여서 대부분 병원에서 촬영이 진행된다. 때문에 그로 인한 재미난 에피소드도 상당하다는 게 이범수의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충무로에서 잔뼈가 굵은 이범수라도 첫 드라마 출연에 대한 심적 부담감은 어쩌지 못하는 듯했다. “그동안 감춰왔던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며 각오를 밝히는데 그 모습이 평상시 그답지 않게 어찌나 진지하던지. 그는 또한 “캐주얼을 입다가 양복을 입었다고 해서 이미지 변신에 성공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새 작품에서 그가 맡은 역할은 냉철한 의사. 그간 농촌마을 시골 이장, 삼류 깡패 등 순박하고 허점 많은 인생들을 주로 연기해온 그에겐 분명 대단한 캐릭터의 변화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범수는 캐릭터의 변화가 자신이 준비 중인 변신의 전부가 아님을 분명히 했다.
“완벽하게 이기적이고 차갑고 냉철한 이미지를 통해 그간 미처 보이지 못한 내 안의 또 다른 면을 보여드릴 생각입니다. 영화로 얻은 ‘연기파 배우’라는 타이틀, 안방극장서도 제대로 이어가야죠.”
배역만 확실하다면 비중은 중요치 않아
그렇다면 이범수의 이런 자신감은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바로 크고 작은 배역을 가리지 않고 출연해온 이범수의 ‘연기자’ 본연의 자세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범수가 1990년 데뷔 후 2007년 현재까지 출연한 영화는 무려 36편에 이른다. 하지만 대부분이 모두 조연이나 단역급이었고, 비중 있는 주연급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3년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
1990년 영화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로 연예계에 발을 들여놓은 그는 ‘개 같은 날의 오후’ ‘고스트 맘마’ ‘접속’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 ‘태양은 없다’ 등 조연급으로 출연해오다가 ‘오 브라더스(2003)’ ‘슈퍼스타 감사용(2004)’ ‘이대로 죽을 수 없다(2005)’를 통해 서서히 주연급 스타로 도약하기 시작했고, 2006년에는 그야말로 이범수의 전성시대를 누렸다. ‘짝패’ ‘잘 살아보세’ ‘음란서생’ ‘조폭마누라3’ ‘미녀는 괴로워’ ‘언니가 간다’ 등 2006년 한 해 동안 무려 6편의 영화에서 주·조연급으로 맹활약을 펼친 것이다.
이러한 특별한 이력은 감독들과의 의리가 대단한 그의 우정출연에서 기인한다. ‘짝패’ ‘미녀는 괴로워’ ‘언니가 간다’ 등이 모두 우정출연이었다.
대부분의 스타들은 일단 주연급으로 뜨고 나면, 조연 등은 거들떠 보려고도 않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이범수는 달랐다. 배역만 좋으면, 역할의 크고 작은 비중은 중요치 않다는 생각에 조연이어도 캐릭터만 확실하다면 과감히 출연을 결정한 것이다.
이범수의 이런 올곧은 연기관 때문이었을까. ‘짝패’에서 충청도 깡패 역할로 열연했던 그는 지난해 ‘제5회 대한민국영화대상’에서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영화 ‘잘 살아보세’에서는 성에 무지한 사람들에게 성교육을 시켜야 하는 시골 이장, ‘음란서생’에서는 조선시대 야한 책의 삽화를 그리는 선비, ‘조폭마누라3’에서는 한국의 삼류 조폭을 실감나게 연기하면서 ‘한국의 짐 캐리’라는 평을 받을 정도로 코믹한 이미지를 굳혀왔던 이범수. 그런 그가 180도 변신을 예고하고 나선 드라마에선 또 어떠한 평가를 받게 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글 / 김민주 기자 ■사진 / 이성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