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초, MBC 홈페이지 시청자 게시판은 초코파이를 좋아하는 치매에 걸린 한 노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이 넘쳐났다. MBC 드라마 ‘고맙습니다’의 ‘미스터 리’를 통해 ‘야동순재’ 못지않은 인기를 얻고 있는 신구. 그는 요즘 늦게 얻은 첫 손자의 재롱에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른다.
“미스터 리 때문에 고맙다고? 늙은이 흉하게 안 봐줘서 내가 더 고맙지. 초코파이 하나 줄까?”
“나 같은 늙은이한테 뭐 궁금한 게 있다고 만나자 하는지 몰라. 그래도 날 좋게 봐주는 고마운 사람들인데 안 만날 수도 없고….”
“배우로서 살면서 요즘 같은 때가 제일 보람 있어”
기자가 신구를 만난 날은 그가 7년 넘게 출연하고 있는 ‘사랑과 전쟁’ 녹화가 있는 날이었다. “4주 후에 뵙겠습니다” “니들이 게 맛을 알아”란 유행어를 탄생시킨 신구는 요즘 “초코파이 줄까”란 새로운 유행어를 만들었다.
초코파이는 최근 인기리에 막을 내린 MBC-TV 드라마 ‘고맙습니다’에서 치매에 걸린 ‘미스터 리’가 가장 좋아하는 간식이다. 극중 신구는 매회 빠지지 않고 초코파이 먹는 장면을 연기했다. 물에 빠져서 기절했다가 정신을 차린 뒤 “초코파이 사주세요. 백 개 사주세요”라고 하고, 사람을 만날 때나 누군가 위로를 할 때 역시 “초코파이 줄까요?”라고 말해 시청자들을 웃고 울게 만들었다. 그리고 세상과 마지막 이별하는 순간에도 온 마을 사람에게 초코파이를 전달했다.
지난 5월 9일 밤, 극중 ‘미스터 리’가 사망하자 마치 실존 인물의 사망을 애도하듯 다음 날 MBC 시청자 게시판에는 애도의 물결이 넘쳐났다. 또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는 신구의 이름이 검색어 순위 2위에 올랐다. 반면 최근 한 제과회사는 초코파이 매출액이 급증해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지난 3월 21일 드라마 ‘고맙습니다’가 첫 방송을 탄 이후로 초코파이 3~4월 매출액이 전달보다 39%나 증가했다고 한다.
“하하, 알아요. 들었어요. 나처럼 연기하는 사람이야 그런 일이 생기면 기분이 좋지 뭐. 배우로 살면서 보람 있는 게 요즘 같은 때야. 남에게 해 안 입히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동료들과 하면서 사회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된다면 아무리 힘이 들어도 즐겁게 일할 수 있잖아. 그런 면에서 이번 드라마를 보신 시청자들이 내 연기에 감동을 받았다면 제목처럼 오히려 내가 고마운 일이지.”
“10년 가지고는 아무것도 안 돼”
신구가 ‘치매 노인’ 역할을 맡은 것은 드라마 ‘고맙습니다’가 처음은 아니다. 영화 ‘겨울 이야기’에서 그는 치매 노인 역할을 연기한 바 있다. 당시 그는 치매 노인 전문 시설에서 치매 노인들과 함께 생활하며 극중 인물을 연구했다고. 평생 연기만 하고 살아온 ‘연기의 달인’ 신구는 아직도 “매 작품마다 연기에 내 전부를 건다”라고 강조했다.
신구는 지난 1962년 연극 ‘소’로 연기자의 길에 들어섰다. 맡은 배역마다 독특한 캐릭터를 만들어내 인기를 얻고 있는 신구는 “TV에 비해 연극은 관객과 배우가 같은 공간에서 함께 호흡을 하기 때문에 쾌감이 크다”며 “관객과 그런 호흡을 하려면 철저히 해야 된다”고 말했다. 또 현재는 바쁜 방송 스케줄 때문에 연극 무대에 오르지 못했지만 “항상 무대에 오르고 싶은 마음”이라고 했다. 연극이 가지고 있는 매력에 대해 “관객과 숨쉬는 것”이라고 정의한 신구는 살면서 연기 외에 다른 곳에는 한 번도 한눈팔아본 적이 없다.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다른 직업을 가져볼까란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서 이 나이가 되어서도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어떻게 먹고사는지 오히려 신기해. 연극 쪽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아. 돈도 안 되고 배고프고, 그런데 그때는 뭔지 모르지만 필이 꽂혀서 힘든지도 모르고 했어. 하루 종일 먹고 자고 연극 연습하고 그게 다야. 그런데도 재미있고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몰랐어. 원래 끼가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고 내가 좋아했고, 선택했고 이제까지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내 속에 그런 끼가 있나 보다 하는 거지. 지금은 내 일에 만족하고 보는 사람들이 좋게 봐주니까. 잘 선택했다는 생각이 들어.”
신구는 처음 연극무대에 섰던 당시를 회상하면 “제정신이 아니었으니까 가능했지. 아마 남들은 미쳤다고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젊은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할 때 그런 마음가짐으로 몰입하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그는 “10년으로는 입문한 수준에 불과하다”는 단서를 달았다.
“어떤 분야든 한 가지 일을 평생 한다면 무조건 성공해. 하지만 10년 정도 해서는 이제 좀 그쪽 일을 잘 안다 정도밖에 안 돼. 굳이 연기가 아니더라도 10년 가지고 전문가 소리를 듣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10년이란 시간은 전체 판을 읽고 입문하는 정도지 전문가 소릴 들을 때는 아니야.”
“잠들기 전, 반주처럼 마시는 소주 한 병이 보약”
2007년은 노배우들의 약진이 두드러진 한 해였다. 이순재가 MBC 일일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야동순재’로 일찌감치 초등학생들에게까지 인기를 얻었고 상대역인 나문희 역시 폭넓은 사랑을 받았다. 이 밖에 MBC 드라마 ‘하얀 거탑’의 이정길과 ‘고맙습니다’의 강부자, 전원주 역시 노배우들의 곰삭은 연기를 기다리던 시청자들의 갈증을 풀어주며 인기를 얻었다. 올해로 연기 인생 45년을 맞는 신구는 노연기자들의 이유 있는 인기 반란의 중심에 서 있다.
“글쎄, 나는 특별히 다른 생각 안 하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열과 성을 다해 보여준 것뿐이야. 내가 잘해서라기보다 드라마 안에서 노인 역할이 상대적으로 줄어든 이유도 클 거야. 이젠 현역으로 활동하는 우리 연배들이 많이 없지. 드라마는 늘어났지만 상대적으로 나이 든 사람이 할 수 있는 역은 줄어들었잖아. 또 배우를 캐스팅하는 PD들로선 한창 촬영 중에 배우가 건강이 안 좋아 중도 하차하면 낭패거든. 우리 나이쯤 되면 건강이 나빠지는데, 자기 건강 관리를 철저히 하는 것도 배우의 몫이라고 생각해.”
그가 고희를 넘긴 나이에도 여전히 다양한 작품을 소화할 수 있는 비결은, 잠들기 전 마시는 소주 한 병과 조깅 그리고 선천적으로 부모님께 물려받은 건강 덕분이다.
“늦게 얻은 손자 보고 또 봐도 보고 싶어”
신구는 요즘 주말이면 두 해 전에 얻은 첫 손자 보는 재미에 푹 파져 지낸다. “우는 모습마저 귀엽다”며 손자 얘기를 늘어놓는 그의 얼굴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난 결혼을 늦게 해서 이제야 첫 손자를 얻었어. 이제 1년 반 정도 됐는데 아직 기저귀 차고 있어. 웃는 것도 귀엽고 우는 것도 귀여워. 요즘은 그 애 보는 게 낙이야. 주말에 아들 내외가 손자 안고 찾아오면 하루가 금방 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몰라. 보고 또 봐도 돌아서면 또 보고 싶어. 남들은 처음 손자 안았을 때를 많이 얘기하는데, 나는 요즘이 더 좋은 것 같아. 매일 주말이 기다려져. 그런데 사람들 말이 잠깐이라네. 다섯 살 때까지 예쁘다가 좀 지나면 왔다가 빨리 갔으면 한다고.”
“왜 결혼을 늦게 하셨나요?”라고 묻자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어려웠는데 남의 식구 데려다가 굶길 일 있어”란다.
“흔히 하는 말로 숟가락 젓가락 두 짝이면 결혼한다고 하는데, 나는 그런 스타일은 아니었어. 그렇다고 내가 돈을 많이 벌어서 결혼한 건 아니고 그나마 간신히 결혼할 수 있을 때, 결혼했지. 그전까지 아버님은 돌아가셨고 어머니랑 살았는데, 어머니가 나 때문에 걱정을 많이 하셨지. 그래도 나는 연극하러만 다녔어. 지금 생각하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서른아홉까지 장가도 안 가서 속이 검게 타셨을 거야. 내가 잘못했지.”
고희가 된 노배우 얼굴에 새겨진 주름 하나하나는 순간순간 만 가지 표정을 만들어냈다.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늙은이 얼굴이지 뭐”라고 말하는 신구는 어머니 얘기를 하면서 눈초리가 살짝 내려가는 게 꼭 극중 ‘미스터 리’의 모습이다. “푸근한 외모 덕을 많이 보셨겠다”고 묻자 “그래요?”라며 다시 눈을 치켜뜨는데 이번에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신구는 드라마 ‘고맙습니다’를 끝내자마자 곧바로 SBS-TV 수목드라마 ‘쩐의 전쟁’에서 사채업자 ‘독고철’을 맡아 연기하고 있다.
“몇 년 전에 영화 ‘피노 눈물도 없이’에서 고약한 사채업자 역을 맡아서 비참하게 죽잖아(웃음). 그런데 이번에는 남모르게 선행도 하고 인간미가 있는 인물이라 비참하게 죽진 않을 거 같아(웃음).”
잠시도 쉬지 않고 연이어 드라마에 출연하는 이유를 묻자 그는 “일을 하면서 쉬어야지.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쉬는 건 쉬는 게 아니야”라고 말했다. 고희가 넘은 나이에도 쉬는 날 집에 있기보다는 사람을 만나고 산책을 즐기는 사람. 자신의 일을 즐기며 그 속에서 새로운 에너지를 얻는 노배우 신구의 모습에서 청년의 열정이 느껴진다.
■글 / 김성욱 기자 ■사진 / 원상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