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부터 꾸어오던 작은 꿈을 이룬 그의 얼굴은 행복해 보였다. 오랫동안 쉰 공연도 다시 하고 싶어졌다. 가수 임지훈(48)과 ‘작은 섬’에서 나눈 인터뷰는 와인처럼 향긋하고 자연스러웠다.
“편안하고 조용한 ‘섬’이 됐으면해요. 놀러 오세요. 좋은 사람들이 모이는 좋은 공간이니까요”
‘지후니의 작은 섬.’ 삐뚤빼뚤한 글씨가 쓰인 간판 위에는 굵은 선으로 그린 섬 하나가 떠 있다. 글씨는 임지훈 자신이 왼손으로 썼고, 그림도 직접 그렸다.
“원래 섬이라는 단어를 좋아해요. 제 노래에도 있어요. ‘섬이라는 단어 그 한 자가 너무너무 좋아서 섬으로 간다’ 하는. ‘누구나 가슴속에 섬 하나를 가지고 산다’는 시(詩)도 있잖아요.”
임지훈에게 섬은 평화와 고요다. 섬이라는 단어를 들어도, 섬을 찾아 여행을 가도 마음이 편하다. 쉼의 공간이고, 휴식의 공간이다.
“20년 전, 명동에 ‘섬’이라는 작은 카페가 있었어요. 거기서 술도 참 많이 마셨죠. 그때부터 생각했어요. 언젠가는 나만의 작은 공간을 만들고 싶다고. 음악하는 사람들은 노래를 할 수 있는 작은 무대가 있고, 친구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 지금 작게나마 그 꿈을 이룬 거죠.”
80년대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임지훈이라는 이름과 ‘사랑의 썰물’을 기억한다. 그의 1집 앨범은 87년 당시 방송 출연을 일절 하지 않고도 1백만 장의 판매고를 올려 밀리언셀러를 기록했다. 외로움과 우울함이 묻어나는 탁성으로 부르는 그의 노래는 당시의 감성과 어울려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다. 2000년 당시 1천8백 회 공연. 최다 라이브 공연 기록을 가지고 있는 그는 이제, 따뜻한 아날로그 감성을 가진 ‘친근한 형님’의 모습이다.
“여기 앉아서 가만히 보고 있으면 행복합니다. 해가 지고 조명들이 하나 둘씩 켜지면서 자기 역할을 할 때 행복하죠. 어둠이 드리울 때 조명을 밝혀주는 그 의미 자체가 좋아요. 빛 속에 사람들이 하나 둘 모이고 사람 사는 이야기를 하고. 그것이 사람 사는 의미가 아닐까요.”
‘작은 섬’에는 작은 무대가 있다. 한 평 남짓한 공간에 놓여 있는 의자와 마이크. 무대 뒤편에 걸려 있는 그림은 바다를 닮았다.
“통기타 가수들은 딱 한 평이면 돼요. 모든 통기타 가수들이 한 평 남짓한 공간에서 작은 의자에 앉아 노래를 부르죠. 지금이야 공연이 대형화돼서 무대를 뛰어다니면서 노래하지만, 저는 저 작은 공간이 좋아요. 조용히 앉아서 노래하는 사람의 눈빛과 감성을 듣는 사람들이 바로 느낄 수 있으니까요.”
사람을 좋아하고, 감성의 소중함을 알고 있는 그는 ‘작은 섬’의 요리사를 고용할 때도 요리사의 한마디가 좋아서 함께하기로 했다고 한다.
“‘나는 요리하는 것을 참 좋아합니다’라는 한마디에 같이하기로 결정했어요. ‘(돈을) 얼마를 주세요, 이 정도는 받아야 합니다’가 아니라 ‘제 요리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나누는 것을 좋아합니다’라는 말이 좋았죠. 그럴듯한 자기 말에 책임을 지는 건지, 맛이 좋아요(웃음).”
임지훈은 와인 한 병을 주문했다. 발두봉(Valdubon)이라는 이탈리아 와인. 부담 없고 깔끔하지만 깊은 잔향이 오랫동안 입 안에 머물렀다.
“제가 와인을 창완이형(산울림) 때문에 알게 됐어요. 저는 달지 않고 무거운 와인을 좋아해요. 아, 얼마 전에는 앙게리라는 이탈리아 와인을 알게 됐는데 너무 좋았어요. 아니나 다를까, 시실리 섬에서 만들어지는 와인이라고 하더군요. 저는 정말 섬과 인연이 깊은가 봐요(웃음).”
라이브 공연만 2천 회 이상 했던 그는 2003년 정동 심야 공연을 끝으로 휴식을 가졌다. 쉬고 싶었다. 2001년, 2005년에도 음반을 발매했지만 활동을 하지는 않았다. 몇 년 만에 찾은 방송국에서 낯선 느낌을 받았다.
“즐겨 찾던 카페가 있는데 오랜만에 갔더니 커피 맛도, 주인장도 바뀐 느낌이었어요. 내 집 같지 않았죠. 사람들은 ‘앨범이 좋은데 왜 활동을 안 하냐’고 했지만 저는 그냥 ‘분위기가 안 맞아서’라고 대답했어요. 그런데 요즘은 다시 하고 싶네요. 공부가 정말 하기 싫은데도 놀다 보면 다시 공부하고 싶어지는 것 처럼요(웃음).”
그가 라이브를 사랑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TV를 통해서 보는 방송은 닫힌 느낌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임지훈에게 라이브와 방송의 차이점을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바다가 보이는 카페가 있어요. 카페 안에서 창을 통해 바라보는 바다는 방송이고, 밖에서 파도 소리를 들으며 바라보는 바다가 라이브입니다.”
7080세대의 낭만과 아날로그 감성, 그리고 자연을 사랑하는 그는, 예전에 사랑받았던 동료들이 뚜렷한 자기 색깔을 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도 드러냈다.
“동료들이 방송을 하지 않고 있어요. 음반을 만든다고 해서 통로가 열려 있는 것도 아니죠. 그들의 자리를 언론과 방송, 인터넷 시장에서 마련해줘야 하는데… 사실 그것은 그들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문제이기도 해요.”
세상이 넓어졌다. 인터넷으로는 시간과 공간을 불문한 모든 자료를 보고 들을 수 있다. 같은 공간에서만 느낄 수 있는 분위기와 감성은 모니터와 스피커에 갇혔다. 마주하고 앉아 마음을 주고받는 일은 어느새 ‘지난 시절’의 낭만이 됐다.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은 각박하다. 인터넷 덧글은 요즘 사람들의 삭막한 마음의 표현이다.
“뉴스에서도 따뜻한 소식을 많이 전해줬으면 해요. 그래야 사람들도, 세상도 조금은 아름다워지지 않을까요.”
라디오를 진행할 당시에도 그는 뉴스에서는 듣기 힘든 따뜻한 소식으로 오프닝과 클로징을 했다. 청취자에게 작은 희망이나마 전달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노래를 부르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목가적이고 자연스러운 마음을 나누기 위해서다. 1:1로 남을 누르고 이기기 위한 게임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풀냄새가 나고, 하늘을 보고, 자연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주고 싶다.
“하지만 한 사람이 세상을 다 바꿀 수는 없잖아요. 세상이 기계적으로 바뀌면서 도태되는 것에 대한 슬픔은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가 있는 자리가 좋은 자리라고 생각하면 더 이상 슬프지 않습니다. 내가 이 자리에 있기 때문에 세상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거죠.”
해가 진 뒤의 조명이 각자의 몫을 밝히듯, 한 사람의 자리가 이 세상을 만들어내는 작은 도구라고 생각한다. 무심하게 시간이 흘러가는 것은 크게 슬퍼할 일도, 기뻐할 일도 아니다.
노래와 함께 떠오르는 추억
저녁 시간,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임지훈은 노래를 부른다. 옛 히트곡과 팝, 그가 기타를 안고 부르는 노래는 작은 섬을 가득 메운다. 다양한 노래를 부르지만, 웬만해서는 김광석의 노래를 부르지는 않는다.
“광석이와 저는 비슷한 구석이 많아요. 제가 지금 나이가 들어서 재킷도 입곤 하지만, 바지는 항상 진(청바지)을 입어요. 정장을 입고, 타이를 매고, 그런 꽉 조인 모습이 싫어요. 어딘가 비어 있는 모습이 좋죠. 광석이도 그랬어요.”
1982년 서대문 푸른 극장 소방서 앞 ‘말뚝이 소극장.’ 김광석은 임지훈을 쫓아다니며 노래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때 김광석에게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준 것이 임지훈이었다. 김광석과 김창기(동물원)에게는 매일같이 술을 사줬다. 김창완에게 그들을 소개해 ‘동물원’ 앨범을 제작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도 임지훈이었다.
“그래서 광석이 노래는 부르지 않아요. 노래 부르면 자꾸 그 녀석이 생각나요. 한번은 누가 자꾸 불러달라고 해서 싸운 적도 있죠.”
하지만 술을 마시다 문득 ‘그 녀석’ 생각이 나면 노래를 불러 그리운 마음을 달랜다.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서른 즈음에’ ‘거리에서’ 등을 즐겨 부른다.
대학로에 맞닿아 있는 두 소극장. 임지훈은 ‘충돌 소극장’에서, 그리고 김광석은 ‘학전 소극장’에서 공연을 했다. 50m 정도 떨어져 있는 두 공연장에서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계속되던 공연을 마치고 나서면, 골목에서 마주치는 일도 흔했다. 같이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불렀다.
“슬퍼요. 세월이 참 빠르죠. 제가 노래할 자리를 만들어줬으니, 더 애틋합니다. 아직도 그 얼굴과 목소리가 눈에 선해요.”
데뷔 20년. 40대 후반에 접어든 그는 작은 것에서 깊은 행복을 느끼며 살아간다고 한다. 세월이 흐르는 것에 대한, 나이가 들어가는 것에 대한 조바심은 없다.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더 많은 곳으로 여행을 떠나고 싶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크다. 아내와 아이들에게 가장으로서 가장 중요한 시기에 음악에 미쳐 소홀했던 기억이 많아서 항상 미안하다.
“슬프지는 않아요. 작은 슬픔이 밀려올 때도 있지만 그전에 누군가를 만나고 얻었을 때 느껴지는 행복이 더 크죠. 사람을 만났을 때, 아름답고 낯선 여행지에 섰을 때의 느낌. 그리고 시간이 허락한다면 아이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요.”
누나가 남기고 간 기타 하나
누이와는 열 살 차이가 난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임지훈이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그의 누나는 대학을 졸업해서 간호사가 됐다. 독일로 떠나는 누나가 남기고 간 기타 한 대는 그가 노래를 시작하는 계기가 됐다.
“외로웠습니다. 기타가 제 친구였어요. 노래를 부르면서 외로움을 지운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어느 날 노래하는 사람이 됐습니다. 지금도 제 인생에 노래가 없었다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요. 다시 태어난다면, 지금 세대보다 더 좋은 노래를 만들고 싶어요.”
자연스럽게 잡은 기타가 그를 노래하는 사람으로 만들었고, 한 평 남짓한 작은 공간에서 팬들과 소통하며 노래를 불렀다. 자연이 좋아 라이브를 고집하는 그에게는 지금까지의 짧지 않은 여정도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런 그에게 ‘도전과 실패’에 관해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허탈했다.
“도전도, 실패도 없었어요. 매번 앨범을 내면서도 ‘아, 이 음반도 좋은 친구로 다가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제 인생관이 ‘바보’거든요. 남들에게 이용을 당해도, 놀림을 당해도 좋다는 거죠. 바보는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몸과 마음이 있잖아요. 바보의 행동에는 악(惡)이 없죠.”
하지만 ‘바보’의 삶이 마냥 편한 것은 아니었다. 앞뒤 재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하다 보면 경제적으로 힘이 들었다. 그는 철 없는 가장이었다. 젊었을 때, 아내가 마이너스 통장을 가지고 있는 것도 그는 몰랐다.
“그러다 어느 순간 깨달았어요. 안에 있는 사람들이 가장 소중하다는 것을요. 지금은 좀 늦었더라도 가장으로서 해야 하는 일을 많이 하려고 노력합니다. 한 10년 됐어요(웃음). 철없는 남편 만나서 마음고생한 아내에게는 항상 감사하죠.”
공연을 통해 여유 있는 자금이 마련된다면 사회에 봉사하며 작은 보탬이 되고 싶다. 좋은 일을 하면서, 노래하는 아저씨, 할아버지로 보여지고 싶다.
“공연으로 좋은 일에 봉사하고 싶어요. 노래하는 사람이니까, 좋은 노래는 항상 만들어야죠. 몇몇의 사람이라도 제 노래를 통해서 자연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글 / 정우성 기자 ■사진 / 박형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