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다른 우리가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비결”
MBC-TV 드라마 ‘문희’에서 럭셔리 사모님으로 출연 중인 성병숙의 딸은 ‘궁s’에서 마나인(마용남)으로 출연했던 서송희다. 연극배우 30년 경력의 엄마와 이제 연극영화과 대학 졸업반인 딸이 비슷한 시기에 탤런트로 나란히 한길을 걷게 되었다. 서로 너무 다른 성향을 갖고 있지만 친구나 자매 못지않게 다정한 모녀를 만났다.
스튜디오로 들어오는 성병숙·서송희 모녀의 얼굴이 환하다. 서로의 얼굴만 쳐다봐도 웃음이 난다. 사진 촬영 직전 엄마는 딸의 옷매무새를 가다듬어주고, 딸은 엄마 얼굴에 있는 먼지를 떨어낸다. 사람의 거리는 두 사람의 관계를 말해준다고 하던가. 꼭 붙어 앉은 두 사람의 모습에서 이 모녀가 얼마나 다정한 사이인지 알 수 있었다.
“이건 내 목소리 아니야?”
오랫동안 성우와 연극배우로 활동해온 성병숙은 그녀가 맡았던 ‘뽀빠이’의 올리브를 연상시키는 낭랑한 목소리로 유명하다. ‘문희’의 럭셔리 사모님으로 캐스팅된 가장 큰 이유도 맑고 티 없는 그 목소리 때문이었다. ‘궁s’에서 마용남 역으로 데뷔한 서송희 역시 시청자 게시판을 통해 유독 ‘목소리가 좋아요’ ‘발음이 좋아요’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엄마와 딸 모두 목소리로 먼저 각인되었다.
사람들은 이 모녀의 목소리를 헛갈려 하기도 한다. 특히 전화 목소리는 거의 구별하지 못한다. 딸이 전화를 받으면 엄마 친구들은 누군지 묻지도 않고 본론부터 말하기 시작한다. 딸 친구들 역시 마찬가지다.
언젠가 성병숙은 자신이 맡게 된 만화에 성우로 딸을 소개하려고 했다. 그러기에 앞서 먼저 딸에게 배역 하나를 주곤 녹음을 시켜보았다. 그런데 녹음을 들어보곤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자신의 목소리가 녹음되어 있는 것이다. 녹음된 목소리는 그녀가 들어도 자신과 너무 똑같았다. 딸과 엄마 목소리가 똑같으니 한 만화에 등장하면 목소리가 중복되는 셈. 딸의 아르바이트가 무산되는 순간이었다.
“내가 네 엄마로 보이니?”
어린 시절 성병숙은 영화관에서 ‘월하의 공동묘지’를 보고는 블라우스 뒤에 달린 단추가 다 뜯어졌던 경험이 있다. 영화 내내 웅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는 공포영화는 절대 보지 않았다. 최근 용기 내어 친구 오미희가 출연한 영화 ‘스승의 은혜’를 모니터하기 위해 영화관을 찾았다. 역시 내내 얼굴을 가리고 영화를 보다가 결국 중간에 나와야 했다.
딸 송희 역시 공포영화를 무서워하기는 마찬가지다. 어느 날 그녀는 친구들과 공포영화를 보고 너무 무서워 엘리베이터를 차마 타지 못하고 엄마에게 내려와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성병숙은 딸의 전화를 받고 순간 장난기가 발동했다. 딸을 보고 ‘내가 네 엄마로 보이냐’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그 말에 딸은 소리를 지르며 울기 시작했고, 딸의 그런 모습에 더 놀란 엄마 역시 소리를 지르며 함께 울었다. 그날 모녀는 엘리베이터에서 서로 부둥켜안고는 엉엉 울었다.
“꿋꿋하다, 긍정적이다.”
서송희는 ‘궁s’ 촬영 당시 매니저도, 코디네이터도 없이 의정부와 화성 촬영장을 혼자 운전하며 오갔다. 촬영이 끝나고 시간이 생기면 의상을 구하고 흐트러진 머리와 메이크업을 고치기 위해 서울로 와야 했다. 시간을 쪼개 대사도 외웠다. 잠잘 시간은 하루에 2시간도 채 나지 않았다. 성병숙은 마냥 어린아이처럼 생각되던 딸이 독하게 일하는 것을 보고 한없이 대견스러웠다.
딸의 이런 꿋꿋한 면은 엄마를 닮았다. 성병숙은 아무리 힘든 일이 생겨도 주저앉지 않는다. 10년 전 외환위기로 10억이 부도가 났을 때도 꿋꿋하게 이겨내 지금의 안정적인 생활에 이르렀다. 그녀는 일에 있어서도 완벽을 추구한다. 대사가 외워지지 않으면 밤을 새워서라도 외운다. 엄마가 얼마나 잠을 좋아하는지 아는 딸은 밤을 새우며 대사를 외우는 엄마가 마냥 대단하다. 또 30년 넘도록 연기자라는 한길을 가고 있는 엄마를 존경하고 있다.
딸이 엄마와 같은 길을 걷기까지
성병숙이 ‘우리집 식구는 못 말려’라는 뮤지컬에 출연한 적이 있다.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이던 송희는 엄마가 보고 싶어 수업이 끝나지도 않았는데도 무작정 공연장을 찾았다. 학교에는 ‘엄마 일을 도와드려야 해요’라고 말했다. 어린아이가 꽤 먼 거리를 온 것을 보고 성병숙은 놀라면서도 ‘얘가 어딜 가도 굶어죽지는 않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단다. 송희는 집에 혼자 있는 것이 싫어서 자꾸 엄마가 있는 공연장에 오게 되었다. 촬영장이나 공연장은 그녀의 가장 편한 놀이터였다.
사춘기를 혹독하게 앓으며 송희는 변해갔다. 아무것도 하기 싫었고 누가 말을 시키거나 참견을 하는 것을 못 참았다. 게다가 엄마가 연기자라는 사실도 싫어했다. 당시 딸은 자신의 엄마가 ‘남 앞에서 재롱 떠는 것 같아’ 보였다고 한다. 그래서 연기를 해보는 게 어떠냐는 엄마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런데도 송희는 여전히 영화나 뮤지컬 보는 걸 제일 좋아했고, 점점 ‘나도 연기를 해보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곤 점점 엄마를 배우로 인정하는 소리를 듣게 되면서 엄마에 대한 생각, 배우에 대한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송희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서 연기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엄마가 딸의 뜻을 반대했다. 머리를 삭발한다고 했을 때도 반대하지 않던 엄마였다. 성병숙은 딸이 연기자가 되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딸은 뜻을 굽히려 하지 않았다. 성병숙은 반대해도 소용없다는 생각이 들자 딸을 시험해보기로 했다. 상황을 주고 즉흥 연기를 해보라고 주문한 것이다. 그런데 송희는 즉석에서 진지하게 연기를 해보였다. 딸의 집중력은 대단했다. 게다가 수능 70일을 앞둔 때부터 공부를 시작해 경희대와 서울예대 연극영화과 두 곳에 합격한 것이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다정한 모녀의 비결
성병숙은 전형적인 모범생 스타일이다. 방학이 되면 계획표를 짜는 것으로 시작하곤 했다. 계획대로 일과를 보내고, 될 수 있으면 그 틀을 벗어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리고 성인이 되어서는 전형적인 아침형 인간이 되어 일찍 자고, 아침 5~6시면 일어났다. 그녀에게 절대 지각이란 건 없었다. 돈에 대한 생각도 그랬다. 아무리 사고 싶은 것이 있어도 발품을 팔아 가장 싼 것을 구입했고, 꼭 필요한 데에만 돈을 썼다.
그런데 딸은 엄마와 정반대의 습관을 갖고 있었다. 친구들과 만나다 보면 밤 11시, 새벽 1시, 어떨 때는 5시가 넘어서 집에 들어오기도 했다. 그리고 정오가 되어 일어났다. 아무리 엄마가 큰돈을 상금으로 주며 고치려 해도 고쳐지지 않았다. 또 사고 싶은 것이 있으면 집착을 버리지 못했다. 그것이 명품이든 하다못해 5백원짜리 목각인형이든.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면 아예 사려고 들지 않았다.
얼마든지 사사건건 갈등이 일어날 수 있는 모녀의 전형이다. 그런데 성병숙은 과감하게 딸과 자신의 다름을 인정함으로써 갈등을 피해갔다. 딸이 늦게 귀가하는 것을 인정하되, 꼭 밤 11시와 새벽 1시, 어디에서 누구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리게 했다. 딸이 새벽 5시에 들어오는 날에는 그때 쯤 일어나 딸과 30분가량 대화하고 나서 아침을 시작한다(딸은 침대로 간다).
어려서부터 송희는 엄마에게 비밀이라는 것이 없었다. 남자친구가 생기면 제일 먼저 엄마에게 보여주었고, 엄마가 싫다고 하면 다시 만나지 않았다. 친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일들을 엄마에게는 말했다.
송희가 중학교 때 집을 나간 적이 있었다. 친구들이 가출을 하는 분위기였고, 마침 답답했던 송희는 친구들을 따라 집을 나왔다. 그런데 막상 집 밖에서 하루를 보내니 씻지 못해서 답답해지더란다. 결국 하루 만에 집으로 돌아갔다. 하루 만에 돌아온 딸을 본 엄마는 태연스럽게 말했다. ‘역시 집만한 데가 없지?’ 딸은 엄마를 영원한 아군이라고 말한다.
“당신은 나에게 이런 존재예요”
최근 송희는 엄마가 공연하고 있는 연극 ‘친정엄마’를 보았다. 이 연극에는 엄마에게 못되게 구는 딸이 등장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딸에게 헌신하는 엄마가 등장한다. 그녀는 연극을 보는 내내 오열했다. 자신과 어머니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성병숙은 두 번의 이혼과 친정어머니의 건강 악화 등 많은 어려움을 겪어왔다. 그런 상황에서 딸 송희가 없었더라면 지금처럼 열심히 살지 못했을 거라고 고백한다. 아무리 힘들어도 딸을 보며 ‘더 열심히 살아야지’ 다짐했고, 딸은 존재만으로도 언제나 행복을 주었다. 성병숙은 딸을 ‘내 삶의 척추’라고 표현한다.
송희는 어려웠던 외환위기 시절 유학을 떠났다. 그때는 몰랐다. 자신을 위해서 엄마가 얼마나 고생하는지를. 유학 생활을 혼자 하면서 하나부터 열까지 엄마의 손을 거치지 않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까지 암흑 속에 살았던 그녀에게 꿈이 생겼다. ‘내가 잘되어야 엄마가 기쁘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살기 시작했다. 송희에게 엄마는 삶의 원동력이었다.
■글 / 두경아 기자 ■사진 / 이성원 ■헤어&메이크업 / 김청경헤어페이스(02-3446-27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