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선수가 셋인 집안, 이젠 김병지 아닌 ‘산이 아빠’라 불려요
한국 최고의 골키퍼 김병지 선수의 집에는 축구선수가 두 명이나 더 있다. 여덟 살 난 큰아들 태백은 학교 축구부 육성반의 유망주고, 여섯 살 난 둘째 산은 슛돌이에서 맹활약 중이다. 집에서도 항상 축구공과 함께한다는 원칙이 있을 정도로 축구가 곧 삶의 일부인 세 부자. 볕 좋은 주말 오후, 이들 세 부자의 일상에 합류했다.
벅찬 가슴으로 구리로 향했다. 일주일 전쯤 김병지 선수와 전화로 인터뷰 약속을 했다. 요즘 한창 경기가 많아 바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그는 시합이 끝난 다음날인 일요일 오후에 찾아오라며 흔쾌히 대답했다.
사실 이들 가족을 만나고 싶었던 이유는 김 선수의 둘째 아들 김산에게 있었다. 산이는 기자가 요즘 즐겨 보고 있는 프로그램 ‘빅마마’에서 고민상담소 상담가 역할을 맡고 있다. 이제 겨우 5년 남짓 살아온 산이가 무슨 고민을 해결해줄까 하지만, 제법 재치 있고 유쾌한 해결책을 내놓곤 한다. 지난 17일 방송분에서는 밤마다 악몽에 시달린다는 슛돌이 친구의 고민에 “축구공을 안고 자봐. 그럼 축구하는 꿈을 꿀 거야”라며 진심 어린 충고를 했다. ‘날아라 슛돌이’에서는 부주장으로 활약하며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산. 산이 때문에 슛돌이를 보고 있다는 팬들도 적지 않다. 여섯 살짜리 꼬마아이의 인기 비결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오후5시, 산이네 집
구리에 도착했다. 아이들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아파트 부근 제과점에서 곰돌이 모양의 초콜릿 케이크를 샀다. 고구마나 치즈케이크를 사려했지만, 점원이 아이들은 초코 케이크를 좋아한다고 귀띔해주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6월 28일이 산이 생일이었다.
딩동.
익숙한 얼굴의 김병지 선수가 반갑게 맞는다. 그의 뒤에는 이제 산달에 접어든 미모의 아내, 김수연씨가 웃으며 서 있다. 두 어린 축구선수들은 만화 채널을 보느라고 정신이 없다. 목소리톤을 높여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안녕?” 예상대로 귀여운 산이, 의젓한 태백이와 인사를 나누는 사이 김수연씨는 무거운 몸으로 수박화채와 커피를 내왔다. 보기 좋게 담긴 화채와 얼음을 곁들인 냉커피가 먹음직스럽다. 그녀는 현재 섬유공예가로 활동하고 있다.
축구 못하게 하는 것이 가장 큰 벌
TV를 보고 있던 아이들은 어느새 축구공을 가지고 나와 축구를 하고 있다. “산아, 세게 차지 마! 유리창 깨져. 우리는 이게 일상이에요. 창문은 아니지만 액자는 많이 깨먹었죠.” 공을 주고받는 두 형제의 호흡이 제법이다. “슛돌이에서 태석이, 동화 형과 가장 친해요. 그래도 우리 형이 제일 좋아요.” 공을 차며 산이 말한다. “우리 집에서는 원칙이 있어요. 집에서는 늘 공을 갖고 있어야 해요. 그걸 어기면 아빠가 벌칙을 줘요.”
아빠의 벌칙이라는 것이 이렇다. 간지럼을 태우거나 수염으로 부비거나 공으로 맞는 것. 모두 장난 같은 벌칙이다. 그러나 아이들 입장에서 충분히 괴로운 모양이다. 벌칙을 설명하며 못 견디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어떤 벌칙이 가장 무서운지 물으니 태백이는 “간지럼이요!” 산이는 “공으로 때리는 거요. 우리 아빠 슛은 선더(천둥)보다 강하고, 파이어(불)보다 세요! 우리 아빠는 살아 있는 전설 김병지예요! 그런데 경기에서 질 때는 (기분이) 안 좋고요, 이길 때만 좋아요”라고 외친다. 아빠에 대한 자랑스러움이 여간하지 않다.
“저는 아이들을 좀 강하게 키우고 싶지만, 아내는 그렇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는 절대 아이들에게 매를 들지 않죠. 매를 들면 딱 거기까지거든요. 때린다고 해서 더 발전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그렇다면 아이들을 혼내야 할 때 어떤 방법을 쓸까? 누구든 약점이 있기 마련이다. 아이들에게는 축구였다.
“축구 못하게 한다고 하면 그걸 제일 무서워해요. 산이는 ‘슛돌이 못 가게 할 거야’하면 꼼짝 못하죠. 이렇게 쉬는 날에는 공원에 나가서 공을 차는 걸 제일 좋아하는데, 말을 안 들으면 안 나간다고 해요. 그럼 그것처럼 잘 먹히는 게 없어요.”
아이들이 누굴 닮았는지 물어보니 아이들이 일제히 “아빠!”라고 대답한다. 엄마가 서운하지 않을까? “아뇨! 아이들이 아빠를 잘 따르니까 좋아요. 산이는 아빠가 목욕시켜주고 머리 말려주는 걸 제일 좋아하죠.” 엄마의 대답은 진심이었다. 임신한 엄마에게 두 아들이 달려들면 얼마나 힘이 들까. 그런데 옆에 있던 태백이가 거든다. “산이는 엄마가 없으면 울어요. 만날 엄마 옆에서 자잖아!” 약이 올라 형에게 달려드는 산이. “형아가 막 때려서 그런 거예요. 진짜 어이없어.”
김 선수에게 예민한 질문을 던졌다. “누가 더 축구를 잘해요?” 질문이 떨어지자마자 공을 차던 아이들은 동작을 멈추고 아빠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서로 “저요, 저요” 하기 바쁘다. 그는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고, 아이들은 아빠의 답에 자존심이 달린 듯 애절하다.
“축구에 대한 관심은 산이가 더 많아요. 모든 FC응원가를 다 외우고 있죠. 태백이는 축구에 대한 지식이 해박해요.”
태백이가 축구선수다운 제안을 한다. “그럼 너 PK해볼래? 어우, 페널티 킥 말이야.” 페널티 킥은 거실에서 하기에 한계가 있어 스트레칭으로 대결한다. 태백이는 다리를 180도로 벌리고 머리를 바닥에 찧는 묘기를 선보인다. 산이도 따라 하지만, 잘 안 되는 모양이다. 아빠 등 뒤에 가서는 “나 못 해!”라며 귀엽게 배시시 웃는다.
산이가 요즘 출연 중인 ‘빅마마’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슛돌이 하면서 카메라에 예쁘게 잘 잡히니까 ‘빅마마’에까지 출연하게 된 것 같아요. 슛돌이는 그냥 놀이고 축구를 워낙 좋아해서 괜찮지만, ‘빅마마’는 연출이 필요한 거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녹화 시간이 길어서 아이가 힘들죠. 어떨 때는 아침부터 밤 10시까지 녹화할 때도 있으니까요. 동현이만 해도 괜찮은데 산이는 어리니까 오랜 시간 자리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대견해요. 그래도 요즘에는 말이 많이 늘었어요.”
산이의 똑똑함은 이게 다가 아니다. 여섯 살인 산이는 어느 틈엔가 혼자 한글을 깨우쳤다고 한다. 특별히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혼자 글자를 볼 때마다 “엄마 이게 무슨 글자야?” 묻더니 나중에 한글을 읽고 있더라고.
오후 6시, 아파트 근처 공원
아이들의 열화와 같은 바람으로 공원으로 나가기로 했다. 계속 공원에 나가자고 졸랐지만 볕이 무척 따가웠다. 6시가 되니 볕은 견딜 만해졌다. 두 녀석이 꽤 답답했나 보다. 나가자는 말에 환호성을 지르며 자전거를 타고 쏜살같이 앞장섰다.
일요일 오후 공원은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산이나 태백이 또래의 아이들이 자전거나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고 있었고, 한쪽에서는 문화 공연이 열려 사람들이 잔뜩 몰려 있었다. 이 틈으로 두 형제가 자전거를 타고 자유롭게 누비고 다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산이를 알아본 사람들이 산이를 둘러싸고 모여들었다. “와, 슛돌이 부주장 산이잖아!” “정말 귀엽다!” “산아, 여기 한번 봐봐” 휴대폰 카메라를 들고 모여든 아이들이 왁자지껄하다.
아이들 곁에 서 있는 김병지 선수에게도 아줌마 팬부터 아이들까지 종이와 펜을 들고 몰려들었다. 어떤 청년은 그의 옆을 지나가면서 “올리버 칸보다 더 좋아요!”라고 외친다. 더 이상 이야기를 하거나 사진을 찍기 곤란했다. 기자가 그 틈을 파고들어 산이 손을 잡았다. “우리 저쪽으로 가보자. 이리 와. 얘야, 잠깐만 비켜줄래? 산이 나가야 하거든.” “누구야? 산이 엄마야?” 뒤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목소리.
“오늘은 그나마 몰려드는 사람이 적은 편이에요. 항상 엄청나게 사람들이 몰려들어요. 산이가 정말 인기가 많긴 많나 봐요. 저를 보면 ‘산이 아빠다’할 정도니까요. 지난번에 산이가 어느 초등학교에 갔는데 정말 대단했어요. 전교생이 다 나와서 산이를 봤을 정도니까요.” “산이 보려고 어떤 형들은 넘어 다니지 말라고 심어놓은 장미 담장을 넘어 오더라고요.” 태백이도 거든다.
“산이는 아직 팬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잘 몰라요. 사진을 찍겠다고 하면 막 도망가는데, 상대방은 그것 때문에 버릇없다고 말하기도 하더군요.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어려서 그런 건데요. 그건 이해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정말이었다. 공을 차고 있는 산이를 찍으려고 한번만 쳐다봐달라고 부탁했지만 절대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놀이에 집중하고 있다. 연신 뛰어다니며 사진을 찍어야 하는 고생을 했지만, 그런 모습이 천생 아이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멋진 슈팅 모습이 아닌 자연스럽게 공을 차고 노는 평범한 아이의 모습을 담았다. 곁을 지나가는 중년의 아저씨가 산이와 김병지 선수를 발견하고는 말을 건넨다.
“이야~ 산이 공 잘 차는구나. TV에서는 왜 못 차는 모습만 보여줄까! (김병지를 바라보며) 큰애도 축구 잘하나?” “그냥 하죠, 뭐”
산이를 따라 다니며 여기저기 뛰다 보니 체력이 바닥나 버렸다. 더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그만 돌아가야 했다. 산이에게 다가가 아쉬운 마음에 인사를 건넸다. “산아, 생일 축하해. 나중에 또 보자!” 역시 산이다운 대답이 돌아온다. “에이, 생일 축하는 집에 가서 케이크에 촛불 켜놓고 해야죠!”
■글 / 두경아 기자 ■사진 / 박형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