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답은 없는 것 같아요. 세상은 다양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재밌죠”
이정수가 극복해야 했던 것은 두려움이었다. ‘우격다짐’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다 연극판으로 발길을 돌린 지난 2003년, ‘배우’라는 타이틀은 그에게 일종의 강박이었다. 그리고 4년, 연극 무대는 그를 강박으로부터 자유롭게 했다. 두려움도 사라졌다.
‘우격다짐’은 새로웠다.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이정수(29)의 내면은 채워지지 않았다. 웃음을 위한 웃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자신을 사랑하는 대중과 더 많은 것을, 그리고 더 진지한 것을 공유하고 소통하고 싶었다. 연기자의 길은 그래서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진지한 편이에요. 즐거운 분위기는 좋아하지만 웃음을 만들어내는 목적에 대해 고민했어요. ‘우스개’로 넘어가는 것은 즐기지 않아요. 고등학교 때도 연극을 했었고, 내 천성은 연기자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는 대중의 박수가 마냥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대로 가다가는 언젠가는 사장되리라 생각했다.
“MC 제의도 많이 들어왔지만 당시라면 잘 안 됐을 거라고 생각해요. 방송은 냉정하니까,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실패하면 알아주는 경우가 거의 없죠.”
‘미친 짓’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처음 연극 무대에 섰다. 그에게는 ‘배우’라는 강박관념이 있었다. 인터뷰를 하면, ‘나는 (개그맨이 아니라) 배우 이정수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것이 혼잣말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대중이 저를 기다려야 해요. 그들이 제 개그를 기다리면 저는 여전히 개그맨인 거죠. 제 연기를 기다리면 그제야 연기자가 됐다고 생각해요. 아직 멀었죠. 미완의 연기자예요. 하하.”
그는 ‘개그맨’이라는 타이틀을 벗으려고 고민하고 노력했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우격다짐’의 이정수로 기억했다. 무대에 오르는 순간, 관객들이 웃음을 터뜨리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람들의 기대치도 인정하고 있다. 오히려 이를 자신만의 강점으로 승화시킬 생각이다.
‘많이 안정된 느낌이네요’
예전 인터뷰를 보면, 연기자로 진화해가는 그의 변화가 뚜렷이 드러난다. 첫 공연의 인터뷰에는 두려움과 강박으로 ‘절대 웃기지 않겠다’는 긴장이 묻어 있다. 두 번째는 ‘배우인 척’했다. 세 번째 작품의 인터뷰에서는 배우가 된 줄 알았다. 하지만 네 번째 공연을 하면서 깨달았다. 내가 아무리 우겨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말이다. 이제는 대중이 자신의 연기를 기다려야 비로소 배우가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처음에는 관객이 무섭지 않았어요. 자신감이 있었죠. 세 번째 공연을 하면서 관객이 무섭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들이 없으면 제가 서는 무대는 의미가 없거든요.”
관객은 돈을 내고 무대를 찾아오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감각적으로 무대를 느끼고 판단한다. 왕년의 인기는 소용없다. 관객이 보고 싶어 하지 않는 배우의 연기는 무대 위에서 의미를 잃는다.
“그래도 인기가 좀 있었는데, 막연히 ‘나를 찾아주겠지’하는 기대가 있었어요. 하지만 ‘우격다짐’의 이미지가 강해서 찾아주는 사람도 없고, 역량도 모자랐죠. 깨졌어요. 제가 별거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죠. 끝까지 가보겠다는 오기가 생겼어요.”
무대는 냉정하다. 열정만으로는 설 수 없다. 의지와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매번 무대에 설 때마다 그는 상을 받는 느낌이다. 객석에 앉아있는 관객을 보면 더 행복해진다. 저 사람들에게 내 연기를 보여줄 수 있다는 사실이 그를 벅차게 한다.
연기가 마음대로 되지 않는 날도 있다. 그런 날은 무대에서 내려올 때 무너져내리는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이정수는 지치지 않는다. 목표했던 바를 이룰 때까지, 제 풀에 지치는 일은 없다.
‘재미있는 일도 많았을 것 같아요, 무대에서’
대학로에서 연극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관객이 한 명 있다. 이상하게 표를 사지는 않는데, 항상 객석에 앉아 있는 아주머니다. 허름한 차림, 아무도 그가 누군지 모른다. 하루는, 이정수가 출연하는 공연장에, 그 아주머니가 ‘출몰’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극단 대표가, 들여보내지 말라고 했죠. 그런데 어떤 관객이 표를 사는 순간 그 아주머니가 그걸 낚아채서 도망쳤어요. 잡으러 뛰어갔지만 결국 못 잡았죠. 표를 도둑맞은 관객은 새 표를 줘서 입장시키고, 입구를 지켰어요. 그런데 어떻게 들어왔는지 그 아주머니도 객석에 앉아 있더라고요. 심지어 맨 앞줄에.”
소극장의 맨 앞줄은 흔히 사석(死席)이라고 한다. 공연할 때는 비워두는 자리다. 관객이 무대를 볼 때 시야가 가리기 때문이다. 몰래 들어온 아주머니는 혼자서 계란을 까먹더니, 방귀를 뀌기도 하고, ‘별짓’을 다 하더니 공연을 끝까지 보지도 않고 나갔다.
“아, 진짜 그러면 안 돼요. 배우에게나 관객에게나 피해가 가요. 몰입할 수가 없어요.”
첫 공연 때는 유난히 키스신이 많았다. 바람둥이 역할이었다. 세 명의 여자와 바람을 피우는 동안, 세 명 모두와 키스를 한다. 처음에는 떨렸지만 공연이 넉 달쯤 진행되다 보니 익숙해졌다.
“배우들끼리도 점점 친해진 거죠. 하하. 처음에는 그냥 ‘쪽’ 했더니 객석에서 야유가 나오더라고요. 그런데 공연 막판에는 키스가 점점 진해지니까, 객석에서 아무 소리도 안 들려요. 그냥 침 삼키는 소리만 나죠. 그 공연의 최대 단점은 한 명이 감기에 걸리면 나머지 세 명도 다 감기에 걸린다는 거였어요. 우리끼리 ‘몹쓸 공연’이라고 했죠. 하하.”
얼마 전 막을 내린 ‘쉬어매드니스’ 공연은 4개의 엔딩이 짜여져 있었다. 범인이 누구인지를, 관객과 함께 추리해가는 과정이 극의 재미를 더했다. 관객이 배우를 취조해서 범인을 맞추는 형식이다.
‘사진은 상반신 누드로 갈 생각인데, 어떠세요?’
이정수의 몸은 전에 비해 긴장이 풀려 있었지만, 그가 어떻게 자기 관리를 하고 있는지 짐작케 하는 적절한 근육이었다. 더 멋져 보이기 위해서 몸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더 유연하게, 더 다양한 역할을 몸으로 표현하기 위해 다듬고 있는 중이다.
“심할 때는 하루에 운동을 하러 세 군데를 가요. 헬스, 권투, 쿵푸. 그러다 보니 깨달은 것이 있어요. 연기 잘하는 배우들을 보니 근육질은 아니더라고요. 일상적이지 않은 몸매는 연기를 해도 딱딱해 보여요. 그림은 잘 나오지만, 연기를 잘하기 위해서는 보편적인 몸이 좋죠.”
이정수는 모범생이었다.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살고 싶어서, 어제보다 더 멋진 사람이 되려고 빡빡하게 하루를 설계했다. 요즘은 자신을 풀어주는 연습을 한다. 한 번 더 깨지기 위해서다.
“드라마를 통해서 ‘끝’에 서고 싶어요. 예전에 부산영화제에 갔는데, 그 때는 나름 스타 의식에 싸여 있었죠. 그런데 아무도 제게 깊은 얘기를 하지 않더라고요. 눈인사는 하는데. 제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해운대에 나가서 결심했어요. 반드시 이곳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겠다고.”
이정수는 곧 드라마를 통해서 대중을 만나게 된다. 한국에서, 이미 정해진 ‘정답’의 힘은 강력하다. 한때는 모두가 선택하는 정답에서 벗어났다는 점이 그를 괴롭히기도 했다. 하지만 정답은 자신이 만들어간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깨달았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답은 사실 몇 개 안 돼요. 정상적인 사람만 있으면 재미없잖아요. 제가 가지고 있던 것을 버리고 새로운 일을 하니까, 힘들 때마다 공연을 보러 오면 용기가 난다는 팬들이 많아요. 내가 다른 사람에게 영감을 주고, 새로운 것을 만든다고 생각하면 즐겁죠. 세상은 다양해야만 해요. 그래야 재미가 있죠.”
지금은 드라마를 준비하고 있지만, 내년에는 다시 연극 무대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다. 연극 무대만은 꾸준히 설 계획이다.
“여태까지 연기하지 않았던 재미있는 캐릭터를 하고 싶어요. 재미가 있고, ‘저 배역은 이정수다, 그래서 잘 어울렸다. 네가 배역을 살렸다.’ 그런 얘기가 듣고 싶어요.”
■글 / 정우성 기자 ■사진 / 이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