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이 사람의 정신을 바꾸는 경험을 통해 새로운 즐거움을 발견”
배우 이성재가 패션 브랜드를 론칭했다. 이름만 빌려주는 것이 아니라 투자와 기획은 물론 자신의 철학까지 녹여냈다. 모처럼의 인터뷰에 할 말이 많을 것 같았던 그는 동업자 이다연에게 모든 공로를 돌렸다. 연기파 배우와 유능한 스타일리스트의 조합 그 이상이 빚어낸 ‘스타일-디’의 탄생기를 들어봤다.
모노톤의 세상을 핑크빛으로 바꿔준 그 여자
이성재와 이다연은 일찍이 2003년 말 영화 ‘빙우’의 개봉을 앞두고 잠시 만났더랬다. 당시 매니저는커녕 코디네이터도 없이 활동하던 이성재를 위해 영화제작사에서 홍보 기간 동안 그를 도와줄 스타일리스트로 이다연을 소개시켜준 것. 첫 만남부터 그녀는 과감했고, 그는 지나치게 신중했다. 패션에 관해서 말이다.
“SBS ‘야심만만’ 녹화를 앞두고 대기실에서 만났는데, 글쎄, 분홍색 셔츠를 가져온 겁니다.”
원색 의상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모노톤을 고수하던 그에게 분홍색 셔츠는 모험과 다를 바 없었다. 그나마 준비한 옷 중 가장 ‘얌전한’ 의상이라는 얘기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정말 내키지 않았지만 마지못해 입고 스튜디오에 나갔거든요. 그런데 모니터를 보니까 그런 대로 괜찮더라고요.”
이다연은 “그날 출연진 중에 오빠가 제일 예뻤다”고 했다. 물론 이성재의 얼굴이 예쁘다는 의도도 있겠지만, 의상과 이성재의 조합이 근사했다는 뜻일 게다. ‘나에게 분홍색 셔츠를 입힌 여자’와 ‘싫지만 꾹 참고 입어준 고마운 남자’는 2년 뒤 영화 ‘홀리데이’로 다시 만났다.
여기서 그 ‘지독한’ 여자에 대한 얘기를 해야겠다. 도예를 전공했으나 옷이 너무 좋아서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던 이다연이 패션 학교 에스모드를 수석으로 졸업한 뒤 세계 유수 브랜드의 프러포즈를 마다하고 다시 돌아온 곳이 바로 ‘영화판’이다. 스물다섯 살의 나이에 의상 책임자로 크레디트에 이름 석 자를 올린 ‘귀천도’가 준 여운이 내내 그녀를 사로잡은 것이다. 지지부진 끌다가 결국 흥행에 참패한 ‘내추럴시티’ 이후 1년에 50~60편의 CF 스타일링 디렉터를 맡을 정도로 인정받으면서도 내내 충무로를 곁눈질하던 그녀는 결국 그렇게 ‘오 브라더스’와 ‘빙우’를 거쳐 ‘홀리데이’에 이르렀다.
“주인공이 최민수와 이성재라고 하면 다들 한마디씩 했어요. 만만찮은 사람이니 의상 담당하기 힘들 거라고. 그 얘기를 들으니 더 욕심이 생기더군요. 어깨 큰 옷을 좋아하는 그분 취향에 꼭 맞는 의상을 피팅하고는 큰 숨을 몰아쉬었죠. 얼마나 뿌듯하던지요.”
“촬영 3주 전에 다연이가 지나가는 말로 ‘얼굴 살이 좀 더 빠지면 캐릭터의 느낌이 더 살아날 것 같다’고 했어요. 원래 ‘홀리데이’ 앞두고 그렇게 살을 뺄 생각은 없었는데(웃음) 돌아서서 생각하니 살을 빼는 게 탈주범 캐릭터에 어울리겠다 싶더라고요. 그때부터 감량에 들어가 4kg을 줄였어요.”(이성재)
“촬영 직전에 의상 피팅을 하는데 허리가 무려 2인치 줄었더라고요. 아, 감동이었죠. 내가 연구한 만큼 배우가 반응을 해주는구나. 그날부터 행여 성재 오빠가 옷이 불편하다고 하면 손바느질을 해서라도 몸에 딱 맞춰드렸어요.”
그러던 중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렸다. ‘데이지’ 관련 행사에 참석할 예정이던 이성재는 “옷 한 벌만 준비해달라”고 했으나 이다연이 보기엔 한 벌로 어림도 없는 자리였다. 결국 그녀는 평소 스케일에 걸맞게 넉넉하게 준비한 의상을 들고 직접 부산으로 향했다. 더욱이 ‘데이지’에 함께 출연한 정우성, 전지현과 함께 무대에 오를 것을 감안하니 가만 있을 수가 없다고 했다.
“턱시도 재킷에 진을 매치한 오빠의 모습을 다른 연기자들이 슥 훑어보더군요. ‘오늘 멋진데’ 이런 거 있잖아요(웃음). 다들 이성재의 변화를 두고 한마디씩 칭찬하는데 제가 더 기분좋았어요. 마침 현장의 조명이 너무 강해서 다른 연기자들이 눈을 찡그리기에 오빠에게 선글라스를 건넸는데, 그때도 역시나 ‘이걸 꼭 써야 하나’하는 반응이었어요.”(이다연)
“방송이나 공식석상에서 선글라스를 쓴 건 눈병 났을 때를 제외하곤 그때가 처음이었거든요. 왠지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꺼렸는데, 그날은 만족스러웠죠. 이후 탄력 받아서 한동안 실내든, 밤이든 선글라스를 쓰고 다녔어요. 그게 하나의 전환점이 된 것 같아요.”(이성재)
특수한 상황이 아닌 이상 영화배우들은 협찬 의상을 입는다. 그러나 이다연은 대부분의 의상을 직접 제작한다. ‘홀리데이’때도 이성재가 마지막 투항하는 장면이며, 포스터에서 입은 옷까지 거의 모든 의상을 그녀가 만들어냈다. 덕분에 이성재와 이다연의 패션 궁합은 ‘홀리데이’를 마친 뒤 가속도가 붙었다. 촬영 현장에서 서로를 지켜보면서 이미 상당한 신뢰 전선을 형성한 뒤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후로 아이보리색 실크 재킷 정도는 도전 축에도 못 꼈다.
“제 나이 서른셋에 처음으로 찢어진 청바지를 입어봤어요. 저런 걸 어떻게 입을까 싶었는데 막상 입고 거리를 걸어보니 사람들이 이 맛에 청바지를 찢는구나, 이해가 가더군요. 정신적으로 한 단계를 초월해 자유인이 된 듯한 느낌이랄까.”
‘데이지’ 개봉을 앞두고 해외 투어를 다닐 때는 빨간 재킷까지 진도가 나갔다. 한국이 아닌 외국이다 보니 이성재도 슬슬 실험정신이 발동되는 듯했다. 이 무렵 그는 몸에 착착 감기는 옷을 입을 때의 희열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그 정점의 순간은 ‘데이지’의 세 배우가 시상자로 나선 홍콩 금마장영화제였다고 기억된다.
“레드카펫 행사를 앞두고 배우끼리 은근히 경쟁을 하거든요. 정보에 의하면 정우성씨는 화이트, 블랙 슈트를 각각 준비했다더군요(웃음). 우린 화이트 슈트에 검정색 셔츠를 입기로 했어요. 좀 더 특별해 보이기 위해 한국에서 미리 준비해간 레이스를 네크라인에 달아서 근사한 러플 셔츠를 만들어냈어요.”
금마장영화제에서 선보인 이성재의 패션이 궁금하다면, 검색창에 ‘이성재 금마장영화제’라고 칠 것이 아니라 ‘이성재 회춘’이라고 치면 금세 찾을 수 있다. 블로그 주인에게 그날 이성재의 모습은 완벽한 회춘으로 보였나 보다.
꿈을 향해 달려가는 두 사람
스타일-디의 브랜드 jnd(제이앤디아나)와 di(디아이)는 그저 성실한 배우와 유능한 스타일리스트의 조합이 빚어낸 결과물로 보기엔 아쉬운 구석이 많다.
“‘홀리데이’ 촬영을 위해 지방으로 내려가는 차 안에서 오빠가 ‘넌 꿈이 뭐냐’고 물었을 때 ‘전 꿈을 먹고 살아요’라고 했거든요. 그러자 대뜸 ‘그거 맞는 말이야. 그런데 내가 그런 말을 하면 호응해주는 사람이 별로 없더라’라고 했어요. 이어 제가 ‘내 꿈은 몇 년 뒤 내가 만든 청바지를 입은 오빠의 사진이 홍콩 중심의 대형 광고판에 걸리는 거’라고 했던 거 같아요. 그 꿈은 지금도 변함없고요.”(이다연)
사업에 관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오간 건 SBS-TV 드라마 ‘천국보다 낯선’ 촬영차 캐나다에 머물 때였다. jnd(제이앤디아나)라는 이름도 거기서 지었다. 이미 패션에 관한 한 여러 차례 합을 맞춰봤고, 꿈을 향한 열정까지 알아봤으니 이제 저지르는 일만 남았던 것. 이성재는 이름만 빌려주는 ‘얼굴 사장’이 아닌 실질적으로 지분을 소유하고 경영에 참여하는 이사다.
“자금 지원을 받은 뒤 벤처기업이라는 타이틀을 획득하고, 올 초에 아는 누나의 도움을 받아서 제품의 로고와 라벨을 만들었어요. 돌아보니 준비할 때가 참 재미있었어요. 브랜드 이름은 뭘로 할까, 사람들이 어떤 옷을 좋아할까. 핑크빛 미래를 상상하는 건 즐거운 법이잖아요.”
철학이라고 하기엔 거창하다며 얼굴을 붉히던 이성재는 “jnd(제이앤디아나)와 di(디아이)가 누구든 원하면 멋지게 입을 수 있는 옷이 됐으면 한다”고 전했다. 그건 환갑이 넘어서도 멜로영화에 출연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처럼 되고 싶은 그의 배우로서의 소망과도 일맥상통하는 대목이다.
스타일-디는 자존심이 세다. 온라인 판매를 한다면서 홈페이지(style-di.com)에서는 직접 판매하지 않고 위즈위드나 패션플러스 등의 패션몰로 이동하도록 한 것이나, 여느 온라인 쇼핑몰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비싼 가격이 그렇다. 거기엔 배우 이성재의 이미지에 마이너스가 될까 봐 우려하는 이다연의 배려와 디자이너로서의 자존심을 버리지 말라는 이성재의 조언이 있었다.
“우리 끝까지 함께 가자, 이런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아요. 저도 사람들과 이런저런 약속을 해봤기에 굳이 말로 꺼내기보다는 마음으로 가지고 있는 편이 낫다는 걸 알거든요. 내가 왜 연기 외에 이런 일을 하는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이 친구가 잘 알고 있어요. 서로 지향하는 바가 한곳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냥 자연스럽게 흘러가려고 합니다.”
어느 날 이다연이 이성재에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지금 계획하는 추세로 가면 10년 뒤 연매출은 75억원이 된다는 도표였다. 유치하다고 내칠 줄로만 알았던 이성재의 반응은 의외로 선선한 동의였다. 재수생 시절 그는 어렵게 동국대 학생수첩을 구해 ‘연극영화과 이성재’라고 큼지막하게 이름을 써서 가지고 다닐 만큼 그 학과를 열망했고 결국 이듬해 동국대 신입생이 됐다. “언젠가 이뤄질 거라는 믿음을 가졌더니 어느새 그 일을 하게 되더라”고 말하는 그의 말간 얼굴이 오래도록 뇌리에 남았다.
■ 글 / 장회정 기자 ■사진 / 이명헌(프리랜서)·스타일-디 제공 ■장소 협찬 / 밀레니엄 서울 힐튼 오크룸(02-317-3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