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없이 친근한 캐릭터 ‘전원일기’의 ‘응삼이’, 원조 얼짱 ‘응사마’ 등으로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었던 탤런트 박윤배. 항상 즐거워 보였던 그가 실제로는 세 번의 이혼과 어머니 병간호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어왔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짙은 쌍커풀에 2:8 가르마, 구릿빛 피부, 겸손한 키. 전원일기가 끝난 지 벌써 5년이 됐는데도 박윤배의 모습은 변한 게 없다. 말투나 웃는 모습까지도 우리가 사랑했던 응삼이 모습 그대로다. 원조 얼짱 ‘응사마’ 열풍이 불었던 소위 제2의 전성기를 거쳤어도 마찬가지다. 비가 연일 내리던 어느 날 강남의 한 커피숍에서 박윤배와 만났다. 그는 하와이언풍 셔츠를 입고 만면에 웃음을 띤 채 나타났다.
응삼이는 대한민국 농촌 총각들의 애환이 담긴 캐릭터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농촌에는 혼기를 놓친 노총각이 수두룩했다. 그 시절 박윤배는 응삼이와 비슷한 점이 많았다. 비록 남매를 키우고 있는 입장이었지만 이혼과 결혼을 반복했고, 탤런트로 이름을 알렸지만 생활은 넉넉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는 그 시절 이야기를 ‘남희석, 최은경의 여유만만’에 나와 고백했다.
“아이들 엄마와 오랫동안 살다가 이혼했을 때 너무 힘들었어요. 갑자기 혼자가 되어 어떻게 아이들을 키울지 막막했어요. 당시 딸과 아들은 사춘기였죠. 그래서 아내가 다시 돌아오면 받아주고… 그러다가 한 사람과 세 번 이혼하고 결합을 했네요. 아무래도 아이들에게는 엄마가 있는 게 낫지 않을까 해서였죠. 그래도 인연이 아니었는지 결국 헤어졌어요.”
전 부인과 헤어진 이유에 대해서는 “이유 없는 이별은 없다. 그러나 말하기 힘든 부분이다”라면서 입을 굳게 다물었다. 다만 세 번 이혼 경력이 행여 여러 사람을 만난 것으로 비쳐질까 두려웠다고 덧붙였다.
“엄마의 빈자리는 엄청나게 크더군요. 당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를 거예요. 그땐 특별한 날이 그렇게 싫을 수 없었어요. 입학, 졸업, 소풍, 군 입대, 제대… 앞으로는 아이들 결혼식이 싫겠죠. 아무리 전날 바쁜 일이 있어서 늦게 들어왔더라도 새벽이면 일어나 도시락을 쌌어요. 도시락을 못 싸면 돈을 주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아이들이 빵을 먹어야 하잖아요. 그래서 죽어라 도시락을 쌌죠. 이제는 접시만 봐도 싫어요. 그래도 아이들이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뒷모습은 가장 견디기 힘든 일이었어요.”
그의 삶을 짓누르는 무게가 이뿐이면 다행이었을 듯싶다. 이혼 뒤 어머니마저 병환으로 자리에 누우셨기 때문이다.
“며느리가 있었으면 좋을 텐데, 이혼한 뒤 그렇게 되셔서… 3년이나 앓으셨어요. 누님이 오셔서 시중을 들려고 해도 꼭 나만 찾으셨죠. 이 때문에 ‘전원일기’ 외에는 아무 일도 못했어요. 돈도 없던 시절이었어요. 어머니가 고기를 먹고 싶다고 하면 슈퍼에 사정사정해서 외상으로 사드렸죠. 나중에는 도저히 내가 못 견뎌서… 힘들어서 못 살겠다고… 나를 봐서라도 돌아가시라고 했던 것 때문에… 지금까지 가슴이 너무 아파요.”
그는 어머니 이야기를 하며 참았던 눈물을 쏟았다. 여름휴가라는 것조차 모르고 살았을 만큼 힘든 시절이었다.
전원일기 응삼이에서 얼짱 응사마가 되기까지
‘대통령이 되기보다는 배우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연극영화과에 입학한 박윤배는 졸업하기 전 MBC 공채 탤런트로 배우의 길을 걷게 됐다. 크고 작은 조연을 거쳐 ‘수사반장’에서 주로 범인 역을 맡다가 ‘전원일기’에 합류했다.
“고향이 강원도 철원이에요. 사실 응삼이의 모델은 고향 친구죠. 그 친구는 고향 스타였어요. 궂은 일 있으면 나서서 다 도왔고, 동네에서 인기가 좋았죠. 그런데 워낙 가난했고,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결국 자살했어요. 응삼이는 그 친구의 재미있고 좋은 면만 따와서 만든 거예요.”
‘전원일기’에 대해서는 할 말도 많고, 추억거리도 많은 듯했다. 전원일기 팀은 특별한 모임은 없지만 경조사에서 만나면 마치 이산가족이 상봉한 것 같다고.
오직 ‘전원일기’에만 매달렸던 그에게 드라마 종영은 연기 생활의 끝을 의미했다. 그런데 그 끝은 새로운 시작과 맞닿아 있었다.
“드라마가 끝나면서 ‘내 연기 생활이 이렇게 끝나는구나’ 했죠. 어떻게 살아야 하나 막막했어요. 응삼이 캐릭터로 이미지가 굳었어요. 저를 모두 응삼이로만 보니 변신하기가 힘들더라고요. 새로운 배역을 맡기가 힘들었죠. 그런데 바로 그때 모든 것이 갑자기 달라졌어요. 여기저기서 섭외가 들어왔고, 힘이 들어서 출연을 못할 정도였으니까요.”
‘원조 얼짱’ 사건 때문이었다. ‘전원일기’의 응삼이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인터넷에 팬클럽을 만들었고, 팬클럽 회장이 젊은 시절 그의 사진을 올리면서 그는 응삼이에서 응사마로 다시 태어났다.
“처음에는 ‘얼짱’의 의미도 몰랐어요. ‘얼굴이 짱구라서 그런가?’ 했죠. 팬클럽 회장이 찾아와 옛날 사진을 가져가면서 ‘선생님, 대박날 겁니다’ 하더라고요. 그러더니 정말 얼짱으로 뜬 거죠. 그 친구가 나에게 귀인이었던 것 같아요. 내가 뜨니 어느 날 갑자기 ‘저는 할 일을 다 했습니다’ 말하고 떠났으니까요.”
그는 한편으로 ‘전원일기가 조금 더 일찍 끝났더라면’ 하고 생각한단다. 자신뿐 아니라 함께 출연했던 이계인이나 김수미 등이 인기를 얻는 모습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다.
“‘전원일기’가 끝나고 5년 동안 다양한 배역을 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그전에는 쇼나 연예 프로그램에 나갈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으니까요. 항상 드라마에서 농사만 짓다가 다양한 프로에 출연할 수 있어서 좋죠.”
그래도 ‘전원일기’는 여전히 행복한 기억이라는 그는 “그 많은 출연진 중 박윤배라는 인물이 각인됐다는 사실이 정말 감사하다”고 말한다. 응사마도 응삼이가 없었으면 존재하지 않았을 테니까.
클래식 좋아하고, 압구정동과 청담동을 누비는 응삼이?
막걸리를 마시다가 흥이 나면 트로트를 부르면서 춤을 덩실덩실 출 것 같은 농촌 총각 이미지. 그런데 실제 그는 이와 전혀 다른 기호를 가지고 있었다. 클래식을 읽으며 책 읽는 것을 좋아하고, 술도 압구정동이나 청담동에서 마신다고.
“남들은 제가 ‘오동추야 달이 밝아’ 같은 노래를 좋아할 거라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클래식 음악을 좋아해요. 비발디 ‘사계’ 중 ‘가을’을 가장 좋아하죠. 어떤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잘하고, 그런 건 잘 모르지만 운전할 때는 항상 클래식 음악 방송 채널(KBS 클래식 FM)을 듣지요. 노래방에는 절대 안 가요.”
“클래식은 감정의 폭을 넓고 깊게 만들어줘요. 사람을 고급스럽게 만들죠. 트로트의 가사 내용이나 박자로는 절대 따라갈 수 없어요. 음악을 듣다 보면 어떨 때는 눈물을 흘리기도 해요. 좋은 책을 읽는 게 3천 년을 더 사는 기쁨이면, 좋은 음악을 듣는 건 3만 년을 더 사는 기쁨일 거예요.”
서울 잠원동에 살고 있는 그는 매일 한강 둔치를 돌며 조깅하고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몸을 다지고 있다. 젊은 시절에는 운동을 열심히 해서 근육이 제법 붙었지만, 이제는 나이를 생각해서 쉬엄쉬엄 하는 편이라고.
“예전에는 운동이 취미였지만 지금은 보신을 위해서 하고 있어요. 매일 하다 보니 일주일만 안 하면 몸이 근질근질해요. 요즘에는 골프에 관심을 갖고 있어요. 골프를 치면서 사람들도 사귀려고요. 그동안 방송에만 매달리다 보니 쉬어본 적이 없네요.”
스타의 고독을 자기 암시로 이겨내다
그는 지난해 말 ‘연개소문’ 촬영을 끝으로 단막극이나 쇼 프로 출연을 빼고는 쉬고 있다. 데뷔 이래 실로 오랜만의 휴식인 셈이다.
“이렇게 장기간 쉬는 건 처음이에요. 그러다 보니 기분이 자꾸 가라앉더군요. 올 초 후배들이 죽었잖아요. 그들의 마음이 이해가 돼요. 예전처럼 스케줄은 안 들어오지, 사람 많은 데는 마음대로 다닐 수도 없지. 그래서 하는 일이 밤에는 술을 먹고 낮에는 잠을 자는 거예요.”
어느 날 그는 이런 낙서를 써내려갔다. ‘인간이 태어나서 꼭대기를 올라가보니, 이제 내려오는 것밖에 없더라’ 극심한 고독에 시달린 것이다.
“제 자신의 문을 열고 허물없이 나가고 싶은데 조금만 말을 이상하게 하면 ‘공인이 이래서 되나’라며 손가락질을 받아요. 사람들과 더 친해지려고 하면 ‘연예인 같지 않네, 왜 그래?’하고 손가락질 받죠. 연예인에 대해 테두리를 쳐요. 그럼 더 고독해지거든요. 그러니 밤에 술을 안 먹을 수 있겠어요? 이렇게 힘들 때는 운동을 해도 역효과가 나요. 맛있는 음식도 먹으러 가기 힘들고요.”
고독이라는 마음의 병을 이겨낸 건 자기 암시를 통해서였다.
“끊임없이 마음을 정화하면서 다잡아야 해요. ‘나는 행복해’, ‘아직까지 안 죽었어’ 스스로에게 말하죠. 그리고 술을 먹으면서 기쁘게 놀아요. 절대 짜증내면서 술을 먹지 않죠. 그래서 그런지 요즘처럼 힘들 때도 ‘얼굴에 평화가 있어요’라는 말을 들어요. 그럴 때마다 내가 ‘생각하는 대로 되는구나’ 생각하죠.”
요즘 그의 소망은 행복과 불행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반려자를 찾는 것이다. 그 반쪽을 찾아 울릉도 같은 섬으로 여행을 가고 싶다. 그동안 아이들 키우느라, 어머니 돌보느라 즐기지 못했을 것이다.
“이상형이요? 아침에 클래식 음악을 함께 들으며 눈을 뜰 수 있는, 그런 여성을 만나고 싶어요. 그러면 술도 끊을 수 있을 것 같고 함께 여행을 다니며 살고 싶어요. 그런데 올해는 여자 운이 없는 것 같네요.”
■글 / 두경아 기자 ■사진 / 박형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