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사베이
“새로운 ‘잇백’이 등장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로고도, 브랜드도 중요하지 않다. 대신 가방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가 곧 스타일이 된다.”
최근 해외 패션·라이프스타일 시장에서 주목받는 트렌드는 이른바 ‘아날로그 가방(analogue bag)’이다. 스마트폰 대신 낱말퍼즐, 소설책, 공책, 뜨개질 도구, 스케치북 등을 넣어 다니며 의도적으로 ‘오프라인’을 선택하는 가방이다. 밀레니얼 세대와 Z세대를 중심으로 ‘스크롤을 멈추는 가방’이라는 별칭까지 붙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이를 “디자이너 라벨이 아닌, 가방 속 내용물이 가치를 결정하는 새로운 ‘잇백’”이라고 소개했다. 온라인 피로와 정보 과잉 속에서, 패션이 역설적으로 ‘디지털 절제’의 도구로 진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집중력을 위한 장난감 상자…폰 공백 채울 ‘대안’
아날로그 가방은 스마트폰을 아예 두고 다니자는 운동이 아니다. 핵심은 대체재를 준비하는 습관이다. 휴대폰을 꺼내는 순간을 다른 행동으로 치환하는 방식이다.
아날로그 문화의 부활을 다룬 <아날로그의 복수(The Revenge of Analog)>의 저자 데이비드 색스는 “우리가 모두 명상 자세를 취하고 곧바로 평온에 빠질 수 있다는 생각은 대부분의 사람에게 비현실적이다. 휴대폰은 원하는 모든 것을 제공하기 때문에, 그 공백을 채울 ‘대안’을 손에 쥐고 있어야 한다”라고 영국 일간 가디언에 말했다. 그는 아날로그 가방을 “집중력을 위한 장난감 상자”에 비유했다.
이 용어를 처음 사용한 인물은 미국 캘리포니아에 사는 콘텐츠 크리에이터 시에라 캠벨이다. 그는 틱톡 영상에서 “내 가장 큰 두려움은 죽기 직전에 내가 휴대폰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썼는지를 후회하는 것”이라고 영국 일간 가디언에 말했다. 역설적으로 이 아이디어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고, SNS에서 사람들은 각자의 아날로그 가방 구성품을 공개하기 시작했다.
가방은 목적별로…소파용, 여행용, 연인용
이 트렌드는 점점 세분화되고 있다. 소파 옆에 두는 위커 바스켓형 가방, 장거리 이동을 위한 여행용 가방, 심지어 ‘로맨틱 주말용’ 가방까지 등장했다. 휴대폰으로 각자 워들을 푸는 대신, 함께 단어 찾기 퍼즐을 하자는 제안도 나왔다.
캠벨이 공개한 1월 영상 속 아날로그 가방에는 뉴요커 정기구독 잡지, 젤펜, 스케치북이 들어 있었다. 해당 영상은 단기간에 수십만 조회 수를 기록했다. 가디언은 이 현상을 “스크린 피로와 둠스크롤링(스마트폰 화면을 끝없이 내려보는 습관)에 대한 문화적 반작용”으로 해석했다.
실제 수치도 이를 뒷받침한다. 영국 통신 규제기관 오프컴에 따르면 영국 성인은 평균 12분마다 한 번 휴대폰을 확인한다. 또 영국의 비교사이트 조사에서는 업무용을 제외하고 성인의 하루 평균 스마트폰 사용 시간이 5시간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비닐·잡지·필름카메라…‘아날로그 리바이벌’의 일부
아날로그 가방은 고립된 유행이 아니다. LP 레코드, 종이 잡지, 콤팩트 필름카메라 같은 아날로그 기술의 부활, 도자기·뜨개·자수 같은 ‘코지 취미’, 오프라인 모임과 디너 파티의 증가와 맞물려 있다. 디지털이 일상을 점령할수록, 사람들은 오히려 손으로 만지고 시간을 들여야 하는 활동에서 안정과 몰입을 찾고 있다.
캠벨은 이 습관 전환의 계기로 찰스 두히그의 <습관의 힘>을 언급했다. 두히그는 습관을 단서(cue)–행동(routine)–보상(reward)의 구조로 설명한다. 캠벨의 선택은 ‘휴대폰을 드는 단서’를 없애는 대신, 같은 보상을 주는 다른 행동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그는 “뉴스가 필요하면 신문을 가방에 넣고, 오락이 필요하면 책을, 창작 욕구가 있다면 스케치 도구나 뜨개질을 넣어라. 운동과 마찬가지로, 실제로 하게 될 활동이 가장 좋은 선택”이라고 영국 일간 가디언에 말했다. 그 결과 그의 일일 화면 사용 시간은 7시간에서 3시간으로 줄었다고 한다.
‘디지털 디톡스’가 아니라 ‘관계 재설정’
이 흐름을 일시적 디지털 디톡스로 보기는 어렵다. 심리학자이자 <잠금 해제: 스크린 타임의 진짜 과학 (Unlocked: The Real Science of Screen Time)>의 저자 피트 에첼스는 “우리는 휴대폰에 중독됐다기보다, 사용 습관을 형성했을 뿐이다. 아날로그 가방의 확산은 사람들이 기술과의 관계를 새롭게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신호일 수 있다”고 영국 일간 가디언에 말했다. 그는 이어 “우리는 시간을 어떻게 쓸지에 대해 선택권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사용 방식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다른 선택지를 찾고 그 접근성을 높이려는 시도는 매우 긍정적”이라고 덧붙였다.
패션이 ‘절제’를 입다
아날로그 가방의 흥미로운 지점은 패션이 더 이상 과시의 도구만이 아니라, 생활 태도를 드러내는 장치가 됐다는 사실이다. 로고 대신 책과 연필, 퍼즐이 스타일이 되는 순간, 소비의 방향은 ‘더 많이’에서 ‘더 깊게’로 이동한다.
스마트폰을 내려놓게 만드는 가방. 화면 대신 종이를 꺼내게 하는 가방. 지금 유행하는 아날로그 가방은 단순한 소품이 아니라, 우리의 시간을 되찾기 위한 가장 일상적인 도구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