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이후의 계획은 세우지 않았어요.
어느새 목표는 다 이뤘고, 앞으로의 인생은 ‘덤’ 같아요”
김동률은 조숙한 모범생이었다. 음악에는 빈틈이 없었다. 4년 만의 5집 앨범 「모놀로그(Monologue)」는 편하게 썼다. 솔직하고 개인적인 수필 같은 노래다. 전에 없던 빈틈이 반갑지만, 그렇다고 가벼워지지는 않았다.
수필처럼 편하지만, 무게는 덜하지 않은
이미 다섯 명의 인터뷰어를 만난 후였다. 이후 예정된 인터뷰도 하나 더 있었다. 일곱 명의 인터뷰가 새 음악과, 그간의 삶에 대해 물었을 거다. 김동률은, 예민하게 지쳐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같은 말을 반복해야 하는 질문이 없을 수는 없지만. 조금씩 다 달라요. 음악을 들은 느낌도. 중점적으로 묻고 싶은 것도 다르고. 여자와 남자도 다른 것 같아요. 나이에 따라서도 다르고. 힘든 것과 별개로 재미가 있었어요. 저는 사실 인터뷰 좋아하지는 않는 편이었어요. 기자들에게 인기도 없고. 할 말만 하는 스타일이었는데 나이 탓인지. 어제 오늘은 힘들다든지 재미없다든지 그런 것은 없네요. ‘중견 가수’ 대우를 좀 해주셔서 그런 건가(웃음).
정기자 이번 앨범은 비워냈다는 느낌이 커요. 그게 더 어렵지는 않았나요? 항상 욕심을 채우고 이것저것 덧붙이는 것보다 담백해지는 게 더 어렵잖아요.
소설과 수필의 비유가 가장 적합한 것 같아요. “에세이를 쓰고 싶었는데, 그게 더 어려웠어요” 그런 얘기는 아니고. 비웠지만 가볍게 날린 음악은 아니라는 의미로 “어렵다”는 말을 했어요. 4집 「토로」는 그랬어요. 뮤지션으로서 유학도 다녀왔고, 발라드를 하는 사람으로서 “여기까지는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과시욕도 있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치열했던 거죠. 이번 앨범은 여유가 생긴 것 같아요. 지난 3년의 삶도 그렇고. 음악도 단순해지고, 소박해졌죠. 수필처럼요. 편곡을 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채우는 음악보다 단순한 음악들이 어려운 면도 있더라, 라는 얘기였어요.
정기자 김동률씨의 새 앨범 소식을 들었을 때, 왠지 안심했어요. “잘살고 계셨구나”라는 느낌. 전람회와 김동률은 10대와 20대를 함께한 노래였으니까요. 새 앨범에 거는 기대보다는,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다가 길에서 우연히 만난 형, 오빠 같은 느낌이랄까요.
누구에게나 20대 초반은 중요한 시기잖아요. 그때 함께한 음악이었다는 표현에는 굉장히 자부심을 느껴요. ‘내가 큰일을 했구나’라는 생각도 들고(웃음). 저도 고등학교 때 힘이 되던 그런 음악들이 있었어요. ‘내가 정말 그 사람들 같은 역할을 했단 말이야?’ 놀랍기도 하고. 그래서 그런 얘기 참 고마워요. 언제까지 사람들이 앨범이 나왔다고 관심을 갖고 그런 얘기를 해줄지 모르겠지만.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는 욕심이 있어요.
김동률에 대한 평가는 후한 편이었고, 음악적 성과도 뚜렷했다. 하지만 버클리에서 만난 숱한 천재들 속에서는 열등감을 느꼈다. 절친한 친구인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히로미 우에하라도 그중 한 명이다. 한 인터뷰에서 김동률은 “히로미는 천재예요. 입이 딱딱 벌어지는 짓들을 예사로 해요. 그런데 내가 열등감 느끼고 힘들어 할 때마다 히로미는 ‘너는 왜 네가 갖고 있는 건 생각하지 않느냐’고 했어요. 자기는 힘들 때 내 음악을 즐겨 듣고 위안을 받는다고, 자신의 음악으로 사람들이 그런 감정의 위안은 받기 힘들다고요”라고 말했다.
장기자 ‘노바디’에서 히로미씨의 피아노를 듣고 놀랐어요. 유학 시절 김동률씨 주변에 있던 천재들 중 한 명이었죠. 버클리에서 받았던 자극과, 히로미씨의 위로는 어떤 계기가 됐나요?
유학 가서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많았어요. 과연 내가 서양 음악을 하는 것이 의미가 있나. 그렇다고 내가 국악을 할 수도 없는데. 그런 고민이었죠. 히로미가 저를 위로하려고 했던 말일 수도 있지만. 한 대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내가 질투에 마지않던 친구였으니까요. “지금까지 너무 이기적으로 음악을 했구나” 생각했어요. 전에는 음악 하는 선배나 동료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도 컸어요. 사운드도 더 좋았으면 좋겠고, “외국에서는 되는데 한국에서는 왜 안 될까” 그런 고민도 하고. 사실 곡은 옛날 곡들이 더 순수하고 더 감성적이에요. 솔직히 이제는 그렇게 못 쓸 것 같아요. 앞으로는 아마 못 쓸 것 같아요.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까 마음이 가벼워지고 대중음악인으로서 책임감도 생겼어요. 정말 소수의 마니아를 위해서 음악 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대중가수니까, 그 대중들이 듣는 음악이 좀 좋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대중음악 들을 게 뭐 있어?” 그런 얘기 듣고 싶지 않은 거죠. 내가 대중음악인이라는 것을 인정함과 동시에 결코 타협하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이 ‘좋은 대중가요를 만들고 싶었어요’라는 말로 집약이 된 거죠.
정기자 음악성으로 인정받은 가수의 새 앨범이 나왔을 때 “힘 뺐어요” “비워냈어요”라고 말하면 항상 오해와 대립이 뒤따르죠. 상업적으로 타협한 게 아니냐는.
팬들도 걱정을 많이 했어요. “상업적인 타협을 하지 않았느냐”는 거죠. 지금까지 그런 음반을 들었을 때, 어떤 노래들은 정말 ‘타협했네?’ ‘그냥 힘만 뺐네’ 생각 드는 음악도 많았어요. 그만큼 후져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제 앨범도 그렇게 들리면 어쩌나, 괜히 그랬나 보다’ 생각도 했죠, 그동안 힘들었던 것처럼 얘기하면 ‘그런가 보다’ 하고 들었을 수도 있었을 텐데(웃음).
정기자 그보다는 한결 가까워진 느낌이에요. 그동안의 음악, 그리고 개인에 대한 이미지는 고급한 지식인의 음악, 현학적인 가사 등이었죠. 이번에는 토닥토닥 계단에서 내려온 것 같은 느낌이에요. 반응은 어떤 것 같아요?
아직 모르겠어요. 앨범이 나와 봐야 알겠죠. 팬들은 “김동률씨가 트로트를 부른다 한들 들을 거예요”라고 말은 하지만 기대치에 따른 실망도 있을 테니까요. 기대도 되고. 재미도 있을 것 같고.
치열함이 가신 자리, 다시 느낀 노래의 힘
바쁘고 치열하다고 힘든 것은 아니다. 일상은 음악으로만 가득했다. ‘살아 있다’고 느꼈지만 머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치열함이 가신 서울은 적어도 음악적으로는 황량했다. 그런 느낌도, 고스란히 앨범에 담았다.
정기자 유학을 마치고 서울에 돌아왔을 때의 느낌은 어땠나요?
돌아왔을 때 너무 힘들었어요. 처음 갔을 때 힘들었던 건 각오가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즐길 수 있었죠. 그 안에 완전히 젖어 있었어요. 전 세계에서 “나는 음악에 목숨을 걸겠다”는 애들이랑 매일 음악 얘기만 하고 음악만 듣고, 공연 보고 공부하고, 피아노 연습하고, 서로 만든 음악 들려주고. 가장 그리웠던 게, 학교 건물 건너편에 던킨도너츠가 있었어요. 아침에 수많은 학생들이 거기서 커피랑 간단한 샌드위치나 베이글을 사서 먹으면서 수업 들어가요. 수업 시작하기 15분쯤 전에 강의실에 앉아서 커피 마시면서 창밖을 봐요. 정말 수많은 인종들이 기타 메고 드럼을 들고 너무 바쁘게 왔다 갔다 하는 그런 모습. ‘살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하루를 시작하는 느낌이 너무 그리웠어요. 적응하는 데 힘들었어요. 고작 4년이었는데도.
정기자 예를 들면 음악을 하든 글을 쓰든 거기에 인생을 걸고 있다면 모든 환경이 그걸로 가득할 때가 가장 행복하잖아요. 그런 치열함에 매진해 있다가 갑자기 풀린 것 같은 김동률씨의 황량함 때문에 조금은 허전했어요.
맞아요. 그것조차 5집에 들어가 있어요. 아쉬울 수도 좋을 수도 있는 부분이죠. 하지만 평생 그렇게 학생처럼 살 수는 없잖아요. 과제가 주어져서 수행하는 식의 음악을 하는 게 아니라, 제가 어떤 삶을 살고, 그 삶에서 나오는 음악을 하는 거니까요. 누구나 치열한 순간들을 겪지만. 그렇게 평생 가면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아요. 이번 앨범은 이렇게 살아서 이렇게 나왔어요. 거짓말하지는 않았어요. 지난 3년 동안 제가 그랬던 거예요. 앞으로는 또 어떻게 될지 모르죠.
‘거위의 꿈’이 사랑받는 걸 보면서 무척 놀랐어요. 그때는 사실 수험생에게 힘을 주고, 취업생에게 희망을 주는 게 고작이었는데 지금은 전국 방방곡곡에 있는 사람들에게 힘을 주잖아요. 같은 노랜데도 인순이 선배가 불렀기 때문에 메시지가 더 강력하게 전달된 거죠. 인순이 선배께 고맙게 생각을 하고 잘된 일이라고 생각함과 동시에 아까 얘기했듯 음악의 파급 효과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은 확실해요. 지금까지는 이기적인 음악을 해왔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사람이 듣고 힘을 얻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죠. 음악의 파급 효과는 엄청난 것 같아요. 그래서 음악 하는 것이 참 행복하다고 생각해요. 어떤 시절에 많이 들었던 음악을 우연히 딱 들었을 때 정말 그 시절의 모든 기억이 되살아나잖아요, 일기를 다시 읽어도 그렇게까지는 안 되거든요. 그 힘이 대단한 거죠. 음악이 유일하다고 생각해요.
김동률의 토양을 이룬 가족과 친구들
독보적인 중저음, 클래시컬한 편곡과 ‘하오체’의 가사는 그간의 그를 차별화했다. 남성적인 보컬이 부르는 예민한 감성의 역설은 힘이 있었다. 그러나 정작 김동률의 여동생은, 윤상을 집에 데려오기 전까지는 그를 가수로 인정도 하지 않았다.
장기자 김동률씨의 토양이 궁금했어요. 지금의 캐릭터를 만드는 데 가장 큰 영향을 준 환경이라면 어떤 게 있을까요?
부모님의 영향을 가장 먼저 받았어요. 클래식 음악을 무척 좋아하셔서, 어렸을 때부터 클래식을 듣고 살았어요. KBS FM 있잖아요(웃음). 두 분 다 어렸을 때 음악을 굉장히 하고 싶어 하셨는데 여건이 안 돼서 못하셨대요. 부부 동반 모임 나가면 항상 가곡을 부르세요. 그래서 저 어렸을 때 피아노를 시켰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리고 친구들의 영향이 있겠죠. 서동욱씨도 있고.
정기자 서동욱씨는 잘 지내세요?
‘매킨지’에서 일하고 있어요. 멋있는 친구죠. 그 당참이 굉장히 부러워요. 입사도 본인이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라, 선배 따라 갔다가 심심해서 원서를 냈는데 붙었어요. 그 형은 떨어지고(웃음). 그 친구가 시간을 헛되이 보내는 걸 무척 싫어해요. 보니까 오래 기다릴 것 같더래요. 그래서 원서를 받아와서 그냥 냈는데 붙은 거죠. 동욱이는 사고가 남달라요. 인터뷰의 답변들이 너무 기발하니까. 남들은 정답을 말하려고 애를 쓰는데 걔는 생각나는 대로 얘기를 한 게 먹힌 거죠.
장기자 여동생 두 분 계시잖아요. 모니터도 해주시나요?
동생들은 전혀 영향을 주는 존재가 아니에요. 오히려 저를 무시했죠(웃음). 중학교 때 가요 비슷한 거 만들어서 들려주면 ‘표절이야!’ 하고 가버리고. 이번 앨범 재킷을 제 막내 동생이 했어요. 그 동생은 정말 “오빠가 가수가 돼서 윤상을 집에 데려오면 내가 인정해줄게” 그랬어요. 그런데 어느 날 정말 윤상씨을 데려갔어요. “오빠가 가수긴 가수구나” 그러더라고요.
장기자 하하, 윤상씨는 그 사실을 알고 가셨나요?
모르고 간 거죠. 사실은 저도 잊어먹고 있었어요. 그때는 가수가 되고 좀 지났을 때니까. 동생들은 성인이 된 뒤에 훨씬 많이 친해져서, 여행도 같이하고 제 친구들하고도 많이 친해요. 다 자기 동생인 줄 알아요.
장기자 윤상씨 아들, 무척 예쁘죠?
정말 예뻐요. 엄마, 아빠의 우성인자만 모였어요. 예뻐요. 너무 예뻐. 눈은 윤상씨와 똑같아요. 그 눈두덩이(웃음). 피아노를 칠 줄도 모르면서 피아노 방에 가서 계속 치는 거예요. 같이도 못 치게 해요. 그러면서 문은 닫지 말래요. “무서워서 그래?” 그러면 엄마가 들어야 한대. 누가 윤상 자식 아니랄까 봐(웃음).
뮤지션으로서 생각하는 결혼이란
항상 혼자일 것 같은 뮤지션들이 하나 둘씩 결혼했다. 김현철, 윤상, 이적까지. 안정과 창작은 상극일 수도 있다. 김동률은 두렵기도, 부럽기도 하다.
장기자 결혼은 어떠세요? 배우들은 결혼 이후 연기가 풍부해진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요, 음악 하는 입장에서는?
배우는 결혼하면 연기가 풍부해지는 것이 맞는 것 같아요. 음악은,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아닌 것 같아요. 한국 사회에서 가정을 가졌을 때 가장으로서 갖게 되는 여러 가지 패턴이 있잖아요. 끊임없이 벌어야 한다는 생각, 아이를 잘 키워야 한다는 생각도 들 것이고. 경제적인 것과 무관하지 않아요.
정기자 결혼에 대한 두려움이 느껴진다면 곡해하는 건가요?
두려운 것도 부러운 것도 있어요. 제가 만약 회사원이었다면 이미 결혼했을 거예요. 그건 결혼한 삶이 훨씬 더 어울리는 것 같아요. 그런데 제가 음악 하는 사람이고 음악을 끊임없이 만들어야 하니까. 당장 가사를 써야 하니까 난 너무너무 힘든데 애들이 막 뛰어다니고 그러면 그걸 극복할 수 있을까(웃음). 그건 아직 모르는 얘기라는 거죠.
장기자 윤상씨나 유희열씨는 뭐라고 하세요?
희열이 형은 결혼하니까 너무 좋대요. 이적씨는 얼마 안 됐고, 상이 형은 음악적으로 변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 가정에 충실하고 무척 소중하게 생각해요. 하지만 제가 앞에 얘기했던 문제들에서 벗어나서 살고 있지는 않겠죠. 자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런 고민이 있을 거예요. 한국 사회의 가장으로서 힘들어 하면서도 음악적으로도 욕심을 부리고 싶고, 어디 가서 꿀리지 않는 남편, 아빠가 되고 싶은 마음이 당연히 있겠죠.
적이 와이프가 발레 하잖아요. 국제발레단 소속이어서 일 년에 몇 개월씩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사는 친구가 있대요. 그 친구 남편은 소설가예요. 거기 따라다니면서 자기 일 하는 거죠. 환상적인 궁합 아닌가요(웃음)? 사실 그 둘이 따로 다른 사람을 만났으면 굉장히 힘들었을 것 같아요. 전 적이도 부러워요. 배우자 비자로 미국에 마음대로 있을 수 있잖아. 얼마나 좋아요. 세상에서 그게 제일 부러운 것 같애. 배우자 비자(웃음).
5집 수록곡 ‘오래된 노래’에서 김동률은 ‘네 맘이 어땠을까/라디오에서 길거리에서 들었을 때/ 부풀려진 맘과 꾸며진 말들로 행여 널 두 번 울렸을까’라고 노래한다.
정기자 김동률씨의 사랑 노래 주인공은 항상 예민한 남자죠. 배려하는 착한 남자. 느껴지는 건 아쉬움이나 후회예요. 실제로는 어떠세요? 항상 그렇게 아쉬운 사랑만 있는 건 아니죠?
정말 사랑하고 있을 때는 그런 얘기 못 쓰겠죠. 그냥 단순해질 걸요. 그렇다 보니 그런 기억들을 쓰게 될 수밖에 없어요. 전람회 때는 그런 뚜렷한 사랑 노래가 없어요. 의도적으로 쓰지 않았어요. 솔로 1집에 처음 그런 사랑 노래가 실리기 시작했죠. 걱정을 많이 했어요. 분명 이 친구는 자기 얘기라는 것을 알 테고. 나는 어쨌든 색깔을 가미할 수밖에 없는 입장인데 이걸 듣고 이 친구가 마음 아플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 때문에요. 허락을 받은 적도 있어요. 써도 되는지.
장기자 그분은 뭐라고 하시던가요?
웃으면서 쓰라고 하더라고요. “그래, 어떻게 쓰는지 보자” 그러면서(웃음).
장기자 가수들의 사랑 얘기는 오답 노트 같은 느낌이에요. 돌아보면, 뭐가 가장 부족했던 것 같으세요?
가사를 쓸 때 느낌보다는 그냥 살면서 따로 드는 생각이에요. 가사 쓸 때는 사실 좀 치사하죠. 슬픈 노래 쓸 때는 상대방이 굉장히 나쁜 사람처럼 보이게끔 쓸 수도 있는 거고. 아 다르고 어 다른 건데. 아무리 제 얘기, 감정을 소재로 하더라도, 노래에 맞춰 픽션이 되는 것 같아요.
정기자 홈페이지에 새로 올려놓은 사진과 글들을 봤어요. 스스로 소심하다고 생각하는 편이세요?
네, 소심한 부분이 있어요. 특히 저랑 같이 활동했던 서동욱씨나 이적씨에 비하면 확실히 소심한 게 맞아요. 저는 그게 좋아요. 제가 좀 피곤하긴 하죠. 하지만 음악에도 훨씬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남들이 아무리 얘기해도 “상관없다. 난 이게 좋다” 그런 분들 부러워요. 하지만 어떤 사람이 이렇다 얘기하면 분명히 어느 정도 일리는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한참 고민하고 결론을 내리죠. 그런 과정에서 한 번 더 생각하고 보강이 됐다면 저로서는 이로운 거잖아요.
김동률은 완벽주의자?
클래시컬한 짜임새의 음악과 단정한 중저음에 빈틈 같은 건 없을 것 같았다. 간단한 질문에도 깊이 고민했고, “이러면 좀 잘난 척하는 것 같지만” “정말 그런지는 모르겠지만”이라는 말을 자주 했다. 하지만 글쎄요, 김동률씨는 어디가 허술할까요?
장기자 지금 김동률씨의 고민은 어떤 건가요?
공연요. 공연을 좀 잘하고 싶은데 대관이 안 돼서 걱정을 하고 있어요. 공연장이 너무 없어요.
정기자 ‘공연장이라면 이래야 해’, 원하는 조건은요?
사운드가 좋아야 해. 그게 첫 번째고요. 아무리 음향이 좋아도 공연장의 사운드가 또 있잖아요. 그리고 관객 수. 제 노래가 일주일씩 연이어 할 수 있는 곡들이 아니라서 2회 공연 이상은 같은 컨디션으로 마지막 공연까지 할 자신이 없어요.
장기자 김동률씨는 완벽주의자라는 평가가 있어요.
음악에 있어서는 그래요. 그래서 완벽한 음악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웃음).
정기자 오케스트라 편곡을 컴퓨터로 하나하나 다 찍으셨다면서요, 악보를요.
그건 런던에서 녹음해서 그래요. 런던 필하모닉이랑 같이 녹음했을 때요. 거기는 1초 1초가 정말 돈이에요. 너무 비싸니까, 이래서는 안 되지만 시침이 움직일 때 천원 2천원이 나간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근데 악보가 완벽하면 두세 번 연주하면 바로 끝나요. 연주 굉장히 잘하니까. 그때 완벽한 악보 만드는 버릇을 들였어요. 그렇게 해놓으면 편하거든요. 수정도 편하고. 공연 다시 할 때도 꺼내서 고치면 되고. 얼마든지 프린트할 수 있고. 연습할 때 보통 가수들은 “악보 만들어와~” 하고 시디 나눠주곤 하는데, 저는 모든 악보를 다 프린트해서 그 자리에서 파일로 만들어서 나눠줬거든요. 코드도 막 텐션 하나까지 딱 이렇게 연주해야 한다는 지시를 명확하게 적어서 주니까 애들이 표정이 어두운 거예요. 겁을 먹어서. 저는 그것도 모르고 “왜 악보 이상해?” 그랬죠(웃음). 그 애들 중 한 명이 한 얘기가 아닐까?
정기자 김동률씨의 의외의 허점이라면 어떤 게 있을까요. 난 이런 건 정말 허술해 그런 건 없나요? 전 자꾸 넘어져요.
그렇지는 않아요(웃음). 글쎄요. 어디가 허술할까요.
장기자 보통 깔끔하고 멋진 분들이 먹으면서 잘 흘리는 경우 있잖아요.
맞아요, 잘 흘려요. 그렇다고 지저분한 것은 아닌데 방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편도 아니고. 물건을 잘 잃어버리지는 않는데, 사람 얼굴과 이름을 잘 잊어요. 직업적인 특성도 있는 것 같아요. 그쪽은 날 알고. 워낙 많은 사람 만나다 보니. 지금 생각하려니 잘 모르겠어요. 주변 사람들 얘기 들어야 알 것 같아요. 아, 가사도 잘 까먹어요(웃음).
정기자 다니다 보면, 사람들이 “와, 김동률이다-” 그러지는 않죠? 사람들이 알아보는 것을 인식하나요?
전혀 안 그러죠(웃음). 그리고 알아보는 사람들이 없을 거라는 인식으로 살아요. 예를 들어 이적 공연을 갔다, 그러면 알아보는 사람이 있겠죠. 하지만 일상생활 중에는 별로 없어요. 그러니까 오히려 저 같은 경우가 더 불의의 급습을 많이 당해요. 아, 전에 공익근무 할 때, 감기가 너무 심하게 걸려서 콧물이 비 오듯 쏟아지는 거예요. 휴지로도 한계가 있었어요. 지하철 타고 가는 중이었는데, 초췌한 것은 둘째치고 너무 괴롭고 힘들었어요. 누가 알아봐서 힘든 게 아니라 그냥 사람으로서 창피한 정도 있죠? 그래서 신문으로 가리고 읽는 척했어요. 그런데 며칠 뒤에 홈페이지에 어떤 분이 그때 바로 내 앞에 앉아 있었다는 거예요. 너무 안쓰러워서 휴지 주고 싶었는데 민망해 하실까 봐 참았다는 얘기를 듣고 아, 참 창피했어요. 평소에 조심해야겠구나 생각했죠. 이 얘기만 기사에 나오는 거 아냐(웃음)? 그렇지만 그럴 때는 휴지를 주셔도 돼요. 고마웠을 거예요.
서른넷, 김동률
김동률의 음악은 조숙했다. 성숙을 위해 자신을 몰아세웠다는 증거다. 하지만 서른 이후의 계획은 세운 적이 없다. 지금까지는 그것만 보고 달렸다. 어느새 다 이뤘고, 남은 인생은 ‘덤’ 같은 느낌이다. “저는 이제 내리막”이라고 말해도 측은하지 않은 건 믿음 때문이다.
장기자 노후 계획까지는 아니더라도, 앞으로 하고 싶은 게 있을 것 같아요.
그런 그림은 없어요. 어릴 때 서른까지만 계획을 세웠어요. 그 이후는 계획 세운 적 없어요. 왜인지는 모르겠어요. 그걸 30대 안에 이룰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 사실 다 이뤘어요. 남은 인생은 덤 같은 기분도 들어요. 제 커리어에서 저는 사실 내리막인 거잖아요. 제가 누릴 수 있는 정상은 다 누렸다고 생각해요. 그러다 보니, 남들이 50대, 60대에 했던 생각을 지금 하는 부분도 있어요. 당장 먹고살 걱정은 없고. 어쨌든 일을 계속할 수 있으니까요. 만족도와 대가는 낮아질 수 있겠지만. ‘이 뮤지션은 이렇게 살았다더라. 내가 살아보고 싶지는 않지만 재밌었을 것 같아’ 그런 인생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정기자 가까운 미래에 하고 싶은 것은 뭐가 있으세요?
막연한 계획으로는, 올 하반기 서너 달은 외국에 나가서 좀 있고 싶어요. 어디가 될지는 모르겠어요.
장기자 부러운 삶을 살고 계시네요.
그러니까요. 남들이 부러워할 수 있는 삶이더라고요. 그걸 깨달은 지 얼마 안 돼요. 내 안의 고민들에 너무 휩싸여 있었어요. 옛날에는 바쁘니까, 난 일을 해야 하고, 빨리빨리 해야 하니까. 소소하게 느낄 수 있는 재미를 다 제쳐 두고 살았어요. 옛날에는 저기를 바라보면서 “비켜, 비켜” 하면서 정신없이 올라갔다면, 지금은 꽃도 보고 나무도 보고 차도 마시고. 그런 기분이에요. 여유죠, 나태와는 다른. 하고 싶은 것도 많이 생겼어요. 음악적으로 할 걸 다했다는 기분, 커리어가 끝났다는 위기의식은 아니에요. 결국 음악은 평생 갈 거고. 어떻게든 나와 함께 가는 거니까. 그것 외에 지금 기회가 있을 때. 혹은 내가 이런 느낌이 있을 때. 관심 가는 것들을 해보는 것이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해요.
정기자 음악 외적인 활동 계획은 전혀 없으세요?
책도 사실 제의 굉장히 많이 받았어요. 번번이 거절했죠. 내 마음에, 욕심에 차는 글을 아직 쓸 준비가 안 됐어요. 또 이적이 살벌한 책을 하나 내서. 짜증나게(웃음). 하지만 지금 드는 생각은 걔는 걔고. 걔보다 내가 글을 잘 쓴다는 얘기를 들을 필요도 없는 건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따로 있으니까, 언젠가 책을 쓸 수 있다면 쓰는 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생각해요. 피아노 연주 앨범도 무척 하고 싶었는데 못했죠. 피아노 못 친다는 이유가 95%였어요. 하지만 피아노를 좀 못 쳐도, 뭔가 내가 할 수 있는 능력 안에서 할 수 있는 게 있을 것 같아요. 이런 제가 좀 타성에 젖은 것처럼 느껴지시나요? 느슨해진 것일 수도 있을까 봐 경계도 해요.
하고 싶은 말이 생겼을 때 음악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싱어송라이터의 특권이다. 앨범에는 김동률이 건네고 싶은 말도, 그간의 일상도 고스란히 담겼다. 그동안의 음악적 성과가 목표를 향해 내달린 결과라면, 이제 시작할 김동률의 덤 같은 여생은 ‘여행’의 기록이다. 분주한 일상에서 한 발 물러난, 날것의 김동률이 드러나는.
■기획 / 장회정·정우성 기자 ■글 / 정우성 기자 ■사진 제공 / 뮤직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