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언의 베트남 여행 두 번째 이야기
때 묻지 않은 자연의 신비로움과 더불어 순수한 베트남인들의 정감이 전해지는 이번 여행기는 그동안 접한 베트남 관련 글 중 단연 발군이다. 필자의 글을 읽노라면 마치 베트남으로 손을 내밀어 그들과 악수라도 하는 듯한 느낌이다. 자전거에 대한 로망을 한껏 키우게 만든 그의 여행기를 지난달에 이어 전한다. (편집자 주)
베트남은 어딜 가나 자전거와 오토바이가 누비고 다닌다.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오토바이를 타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보통 자전거를 탄다. 자전거를 많이 타는 것에 비해 우리처럼 관련 패션이 도입되고 있지는 않다. 그야말로 자전거 실용주의자들이다(그렇다면 우린 자전거 낭만주의자였던가?). 그저 구르기만 하면 탄다. 길을 가다 보면 너무 낡아 브레이크도 없이 달리는 자전거를 흔히 볼 수 있다. 위험천만한 자전거 타기가 경이롭다. 브레이크도 없이 타는 모습을 호기심으로 눈여겨보니 신발이 그 역할을 하는 것이다(그러고 보니 베트남 사람들의 다리가 신장에 비해 길어 보인다). 우리나라 자전거 보관소마다 방치되어 있는 자전거들을 수거해 수리한 후, 이들에게 보내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쾌적하고 아름다운 쿡푸엉에서 1박을 마친 탐사대 일행은 짐을 단단히 챙겨야 했다. 이제 플루엉까지는 뜨거운 태양 아래, 그것도 스릴이라면 스릴이 넘치는 다소 위험한 싱글(자전거 한 대만이 간신히 다닐 수 있는) 길을 달려야 하는 고된 여정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물을 많이 확보해야 했다. 도중에 갈 만한 식당도 없어 비상식량 역시 별도로 지참해야 한다. 다들 약간은 긴장한 표정들이다.
쿡푸엉 국립공원을 북쪽으로 돌아 쿠앙엔, 캄튜이를 거쳐 카낭까지만 가면 목적지인 플루엉 자연보존지구 인근에 도착하게 되는 코스다. 쿡푸엉에서 북서쪽으로 85km 정도 되는 거리지만 무더위에다 산이 많아 상당히 힘겨운 코스다. 북서쪽 플루엉을 향해 가다 보면 논보다는 밭이 많고 지형도 변화무쌍하다. 산이 많긴 하지만, 대부분의 도로는 언덕을 피해 평지로 나 있는 편이다. 대신 직선으로 된 길이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포장된 도로 역시 거의 만날 수가 없다. 그래서 풍경이 더 아름다운 건지도 모르겠다. 가는 곳마다 수려한 자연과 평화로운 마을 풍경이 이어져 사진 촬영 때문에 자주 대열이 흐트러진다.
화전을 일구었는지 까마득한 산꼭대기를 향하고 있는 경사진 밭들도 쉽게 목격됐다. 주요 작물이 사탕수수인지 여인들이 수수 줄기를 묶은 단을 메고 가거나 자전거에 가득 싣고 가는 모습들이 자주 보인다. 여기서 하나 눈여겨볼 것이 주로 농사일에 종사하는 주체가 여인들이라는 점이다. 들판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나 무거운 짐을 운반하는 사람들은 주로 여인들이다. 주로 여인들이 힘든 농사일을 도맡아 하는 이유를 나중에야 알았다. 오랜 세월 전쟁을 하는 동안 남자들은 군에 가고 농사일은 주로 여성들의 몫으로 정착됐다는 것이다.
플루엉으로 가는 마지막 코스의 백미는 마강(Song Ma: 베트남어로 송은 강이라는 뜻)을 따라 가는 싱글 코스다. 먼저 대나무로 된 다리를 건넜다. 그곳에서도 역시 아름다운 풍경에 넋을 빼앗겼다. 마강은 빼어난 봉우리들 사이로 흐르는 강으로 절경 중의 절경이었다. 대나무를 엮어 만든 다리의 모습도 일품이다. 다리를 건너면서 보니 강에서는 여인들이 사금을 채취하고 있었다. 조물주께서는 천하의 절경과 비옥한 땅도 모자라 금까지 선물로 주셨다는 말인가. 채취량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엘도라도가 바로 이 곳 아닐까.
드디어 카낭에 도착했다. 자연보존 공원 플루엉까지는 시내를 관통해 마강을 다시 건너갔다. 앞서 대나무 다리를 건넌 지점에서 상류로 올라온 위치에서 또 마강을 건넌 것이다. 이곳은 전형적인 농촌으로 음식, 잠자리, 목욕, 화장실 등에 대해서는 철저히 현지 방식과 형편에 따라야 한다. 현지 주민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생활하는 불편을 감수해야 하지만, 단 하루 동안의 체험이라 오히려 호기심이 가득해 보였다.
여기에서 주민의 집을 빌려 민박을 하기로 했다. 해외 자전거 투어 경험이 많은 대원 이희삼씨가 3년 전 우연히 길에서 만나 인연을 맺은 집을 다시 찾게 된 것이다. 마을은 주로 씨족 공동체인 것 같다. 인접 가옥들 대부분이 주인의 사위, 아들의 집이어서 세면장과 화장실을 함께 쓰도록 배려해주었다.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온 동네 사람들이 분주했다. 우리가 도착할 무렵에는 돼지 바비큐를 굽느라 자욱해진 연기가 지친 여행자를 다소 들뜨게 했다.
가옥들은 대부분 통풍이 잘 되도록 바닥이 높이 올라 있어 사실상 2층이나 다름없는 구조다. 부유한 정도에 따라 지붕에 수수 잎을 얹은 집도 있고 좀 더 여유가 있는 집은 현대식 기와를 얹었다. 우리 일행이 묵을 곳은 비교적 여유가 있는 집으로, 올라가보니 생각보다 실내가 상당히 넓었다. 화장실을 빼고는 대부분의 생활이 가능하도록 취사 공간, 침실, 거실이 통합형으로 되어 있었다.
드디어 식사시간이 되자 집안 어른이 윗마을에서 도착했다. 체구는 작지만 월맹군 고위 장성 출신답게 근엄한 얼굴을 한 가장이었다. 3년 만에 재회한 이희삼씨를 상당히 반가운 얼굴로 맞이했다. 가장의 인사말과 함께 아들 형제 및 내외, 손자 손녀 등을 일일이 소개하는데 정말 다 기억하기 어려울 정도로 대가족이었다.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우리 일행과 식사를 하는 동안 준비해온 선물을 교환했다. 우리 대원들은 한국의 전통 문화상품들을 전달했으며, 그쪽 사람들은 직접 수를 놓은 방석과 베개 등을 선물로 내놓았다.
서로 소통은 잘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표정과 제스처로, 아니 마음으로 통할 수 있었다. 손님에게 정성을 다하는 그들이 듣던 대로 아끼는 전통 술을 꺼내왔다. 술독에 대나무 관을 꽂고 함께 들이키며 우의를 다지는 술인데, 귀한 손님이 왔을 때만 마신단다. 우리의 막걸리와 비슷하면서도 상당히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이 일품이었다. 여독이 적지 않았을 터인데도 다들 강철 체력을 자랑했다. 일행은 우리말을 가르치기도 하며 또 금방 배운 베트남 단어 몇 가지를 조합해 구사하면서 즐겁게 대화하고 마시는 가운데 베트남에서의 마지막 밤이 깊어만 갔다.
오지에서의 라이딩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깊이 들어갈수록 길은 더 험해지고 노면은 거의 바위투성이나 다름없다. 그나마 우기가 되면 이 길도 한 걸음 옮기는 것조차 어려워진단다. 산책하듯 배낭을 메지 않고 마이처우 가까이 라이딩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잠시 다시 마강을 향해 갔다. 대나무로 엮은 현수교가 일행을 맞이한다.
다리를 건너자 우리의 눈길은 수차로 집중됐다. 강의 수력으로 거대한 수차가 돌고 있었는데, 수차 바깥에 달린 대나무통 바가지들이 물을 퍼서 멀리까지 송수를 하는 것이었다. 신기한 것은 모두가 쇠붙이 하나 없이 대나무로만 만든 것인데, 물이 전달되는 송수 파이프조차 대나무관이다. 강 이곳저곳에 설치되어 있는데 농사와 생활에 매우 요긴하게 사용하는 공동체의 주요 시설이자 문화재로 여기는 듯하다. 실제로 자연을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지혜가 놀랍다.
플루엉을 떠나기 전 점심으로 쌀국수를 먹었다. 이제 다들 쌀국수는 주저 없이 즐기는 메뉴가 됐다. 힘겹게 산 넘고 강을 건너다 보니 음식을 가리는 사치는 버린 지 오래된 느낌이다. 이제 하노이로 돌아가야 한다. 하노이로 귀환하는 버스 속에서 바라보는 베트남의 풍경이 더욱 아름답다. 자전거 안장 위에서 긴장이 돼 베트남의 절경들을 주마간산 격으로 지나쳤기 때문이 아닐까. 그들의 아름다운 자연이 주는 신비로운 기운, 게다가 따뜻하고도 티 없이 맑은 그들의 미소를 선물로 한아름 안고 돌아간다.
1958년생. 강원대 미술교육과를 졸업하고 홍익대 대학원 미학과 석·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상명대 겸임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선갤러리 아트디렉터 및 한국공예학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1989년부터 미술평론가로 활동하는 한편 2006년부터 인천-서울, 일산-서울 장거리 ‘자전거 출근’과 함께 자전거 문화와 미술을 접목한 집필 및 강연 활동을 해오고 있다. 역서 「존 듀이 경험으로서의 예술」(책세상)
■글 / 이재언(미술평론가) ■사진 / 이재언, 김관수, 이희삼 ■탐사 진행 / 이범석, 이범원 ■탐사 협조 / 울프 라운치(Wolf Laun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