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새’ 하면 가장 먼저 손꼽히는 억새 여행 1번지다. 벌거벗은 산이라는 이름처럼 큰 나무 한 그루 없이 드넓게 펼쳐진 언덕이 온통 억새로 뒤덮여 그야말로 은빛 바다 같은 장관을 연출한다. 다른 억새 명산에 비해 규모는 작은 편이지만 억새가 빽빽하게 한 곳에 몰려 피어 있는데다 시야를 가리는 나무가 없어 더욱 환상적이다. 여기에 바람이 자주 불기 때문에 바람에 우수수 머리를 모으는 억새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또, 민둥산 억새는 웬만한 사람 키를 훌쩍 넘는데다가 잡풀이 섞여 있지 않아, 억새 군락 속에서 사각거림을 즐기며 사진을 찍기에도 제격이다.
서남쪽 능선부터 시작된 억새는 1,119m 정상까지 이어진다. 민둥산 억새는 정상에서 볼 때 가장 빛난다. 정상까지 오르는 길은 증산초등학교로 들어가는 길과 능전마을에서 오르는 길이 있는데 포장도로가 있는 발구덕마을에서부터 길을 따라 오르는 것이 좀 더 수월하다. 30분 정도면 정상에 도달할 수 있다. 산길이 험난하지는 않지만 경사가 가파르기 때문에 만만하게 봐서는 안 된다. 다만 정상에서 바람을 맞으며 반짝이는 억새밭을 내려다보면 올라가느라 고생했던 기억을 싹 잊게 될 것이다.
수도권 최고의 억새 군락지인 명성산은 당일치기 나들이 코스로도 적합하다. 접근성이 좋을 뿐 아니라 식물원, 산정호수, 자인사 등 주변 볼거리도 풍부해 가족 단위의 여행객들도 많이 찾는다.
산자락에 산정호수를 끼고 있어 호젓한 매력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명성산 억새 여행의 가장 큰 특징이다. ‘산 속의 우물’이라는 산정호수에는 10월이면 억새꽃이 넘실대는 산의 그림자가 아로새겨진다. 마치 호수가 가을을 품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궁예가 왕건에게 패하고 나서 산이 떠나가도록 통곡하자 산이 따라 울었다고 해서 ‘명성’이라 이름 붙은 이곳은 원래는 울창한 산이었지만 6·25전쟁 때 초토화되면서 억새밭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명성산의 억새는 조금은 처연하고 쌉싸래한 맛을 남긴다. 완만한 경사를 이룬 정상 부근에 드넓게 펼쳐진 억새는 산 정상으로 가는 길과 산정호수 쪽으로 가는 길 사이에 자리한 팔각정에서 보면 더욱 잘 감상할 수 있다. 팔각정에서는 억새 물결뿐 아니라 멀리 한탄강 줄기와 단풍나무 숲도 함께 한눈에 들어온다.
3 장흥 천관산
단풍과 다른 억새의 또 다른 장점은 우리에게 더 많은 시간을 허락한다는 것. 순식간에 절정을 맞는 단풍과 달리 억새는 뺨에 와 닿는 바람이 차갑게 느껴지는 초겨울까지도 일렁임을 멈추지 않는다.
호남 지방의 명산으로 손꼽히는 천관산도 억새의 매력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대표적인 곳이다. 천자가 쓴 면류관을 닮았다 하여 이름 지어진 천관산은 정상을 중심으로 우뚝 솟아 있는 수십 개의 봉우리가 인상적이다. 하늘을 찌를 듯한 바위와 절벽이 주는 인상 때문에 정상까지의 발걸음을 주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숲과 바위길, 평탄한 길과 가파른 길이 적절히 섞여 있어서 생각보다 쉽게 정상에 오를 수 있다. 산 자체도 723m로, 그리 높지 않다.
정상에서 바라보면 구룡봉에서부터 연대봉으로 이어지는 4~5km의 능선 평원 가득 억새가 넘실댄다. 특히, 억새 뒤편으로 그림 같은 바다가 펼쳐진다는 것이 천관산의 가장 큰 매력. 올망졸망 떠 있는 다도해의 섬과 바다까지 유유히 흘러가는 강을 눈으로 따라가다 보면 산, 강, 바다 그리고 사람에 대한 생각에 잠기기도 한다. 능선을 타고 올라온 바람이 억새풀을 어루만지면 더욱 아름다움을 발하는 천관산이다.
4 제주도
‘환상의 섬’ 제주도에도 가을이면 어김없이 은빛 파도가 출렁인다. 마치 억새가 눈처럼 날리는 거문오름은 2007년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된 의미 깊은 곳이다. 용암 분출이 만들어낸 특이한 화산 지형을 관찰하며 오름 입구에서부터 발길을 떼면, 얼마 안 가 억새군락과 마주할 수 있다.
돌, 바람, 여자가 많다는 제주도인 만큼 제주도 억새의 가장 큰 특징은 모질게 불어오는 바람에 사각거리는 ‘소리’다. 한라산 자락 곳곳과 해안 도로를 지나는 길가마다 이 억새의 노래를 들을 수 있다. 쓸쓸한 듯하지만 낭만적인 노래는 동부 산굼부리 일대에서 절정을 이룬다. 영화 ‘연풍연가’의 배경이 됐던 산굼부리는 제주도의 대표적인 억새 관광지다. 한라산 백록담과 맞먹을 정도로 큰 분화구인 산굼부리는 산책로가 잘 정비되어 연인과, 가족과, 친구와 함께 걷기 좋다.
다른 지역에 비해 제주도의 억새 군락지는 곳곳에 조성되어 있고 특히 느긋하게 드라이브를 하며 감상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1119번 지방도로를 달리는 억새오름길, 1115번 도로에 펼쳐지는 구름 같은 억새길 등이 가을의 서정을 잘 보여준다.
5 태백 금대봉
한반도의 등줄기를 이루는 백두대간이 불끈 솟구치는 금대봉. 이웃 대덕산과 더불어 태백이 자랑하는 식물의 보고로 유명하다. 480여 종의 식물이 자생하는 금대봉은 사계절 내내 명성을 자랑하지만 특히 가을이면 트레킹을 하면서 물봉선화, 잔대, 며느리밥풀꽃, 오이풀, 오리방풀 등을 만나고자 하는 이들이 찾는 곳이다. 2시간가량 걸리는 정상은 경사가 완만해 힘들지 않게 오를 수 있다. 주변에 매봉산 고랭지배추단지, 삼수령, 구와우 해바라기 마을, 야생화 공원 등이 자리해 더욱 알차게 시간을 보낼 수 있다.
6 북천 코스모스
경남 하동군 북천면 일대에는 고운 자태로 가을을 부르는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 있다. 흐드러진 코스모스 군락을 지나면 소금을 뿌린 듯 숨 막히는 메밀꽃밭이 이어진다. 슬래브 지붕의 전형적인 시골역인 북천역에 가면 마치 여행 사진이나 엽서에서나 본 듯한 풍경을 확인할 수 있다. 역사 주변으로 흰색과 붉은색의 코스모스가 하늘거리고, 그 사이 역사로 서서히 진입하는 무궁화호가 시간을 붙잡을 듯 멈춰 선다. ‘코스모스역’이라 불리는 북천역은 특별한 구경거리는 많지 않지만 낭만적인 그 풍경만으로도 매년 인파로 북적인다. 평소에는 하루 이용객이 10명도 채 되지 않는데, 10월에만 하루 12대의 열차를 왕복 운행한다고 한다.
■글 / 이연우 기자 ■사진 제공 / 정선군청, 장흥군청, 하동군청, 태백군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