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이 노란빛으로 물들길 기다렸다. 정동길을 지키고 선 은행나무의 노란 잎이 눈처럼 내리고, 지나는 사람들의 속삭임, 발걸음, 바람마저 짙은 옷으로 갈아입는 정동의 가장 아름다운 한때. 그 가을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10월의 어느 날, 어느새 찾아온 가을이 정동을 물들이고 있었다.
[동네 이야기]가을, 정동에서 쉬어가다
서울에서 가장 걷기 좋은 길을 꼽으라면 단연 정동길이 아닐까. 덕수궁에서 서울시립미술관을 지나 경향신문사까지 이어지는 정동길은 아무리 바쁜 사람이라도 한번 들어서면 발걸음이 한 템포 느려지는 곳이다. 기억에도 없는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덕수궁 돌담길, 계절마다 표정을 바꾸는 가로수, 역사의 숨결을 간직한 건물들과 고즈넉한 산책로가 자리한 이 길은 서울 한복판에서 가장 잔잔한 고요를 품고 있다. 한 걸음 한 걸음 더딘 시간 속으로 발길을 옮기다 보면 도시의 시름은 어느새 저만치 물러나 있다.
1 다양한 미술 전시가 열리고 있는 서울시립미술관. 고딕풍의 본관 건물은 일제시대 때 지어진 것으로 서초동으로 옮겨 가기 전 대법원이 있던 곳이다. 2 캐나다 대사관 앞 벤치에서 세 명의 중년 여성이 담소를 나누고 있다. 3 1967년 개교한 사립예술중학교, 예원학교.
데이트 나온 연인들과 망중한을 즐기는 직장인들, 아이와 함께 나들이를 나온 가족들…. 이보다 더 평화로운 풍경이 어디 있을까 싶지만 정동은 500년 조선왕조의 상처와 아픔을 지닌 곳이다. 원래 이름은 정릉동으로, 태조 이성계의 두 번째 왕비 신덕왕후의 묘가 있었고 임진왜란 후 선조가 덕수궁의 전신인 경운궁에 머물렀다. 조선 후기, 낯선 이방인들이 새로운 바람을 몰고 와 신세계를 이루었던 이곳은 독립운동의 중심이 되었던 서구 세력의 각축장이기도 했다.
4 1897년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회인 정동제일교회. 고딕풍의 붉은 벽돌 건물이 이국적이다. 5 덕수궁 돌담길에 놓여 있는 미술 작품들. 6 가을 정동길에서 만날수 있는 정겨운 호박엿 장수.
조선의 파란만장한 마지막 역사를 지켜본 덕수궁의 대한문과 명성왕후가 시해당한 후 고종황제가 몸을 피해 머물렀던 러시아 공사관, 미국인 아펜젤러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회 정동제일교회, 우리나라 근대 교육을 이끌어온 이화학당(현 이화여고)과 배재학당(현 배재 역사박물관) 등은 여전히 이곳에 남아 진한 역사의 향기를 뿜어내고 있다.
7 납작한 가족 동상이 유머러스하다. 8 100여 년 전 서구문물로 신세계를 이루었던 정동. 역사의 흔적은 여전히 길 곳곳에 남아 있다.
[동네 이야기]가을, 정동에서 쉬어가다
가을, 정동길은 한 편의 노래가 되고 시가 된다. 10월 정동문화축제를 시작으로 맞이하는 정동의 가을은 11월, 이곳을 온통 노란빛으로 물들이며 절정을 이룬다. 올 가을, 은행잎 가득한 정동길을 걸으며 시인이 되어보는 건 어떨까.
정동 가는 길
지하철 1, 2호선 시청역에 내려 대한문 옆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직진하면 서울시립미술관과 정동극장을 지나 경향신문사까지 정동길이 이어진다. 시립미술관 앞에서 우회전하면 덕수궁 미술관을 지나 광화문에, 좌회전하면 서소문에 다다른다.
■글&사진 / 노정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