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가들의 천국’ 이탈리아 피에트라산타

자전거로 찾아가는 문화기행

‘조각가들의 천국’ 이탈리아 피에트라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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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사진만 보고 피사의 사탑, 두오모 성당이 이번 여행기의 주인공인 줄 알았다. 그러나 미술평론가 이재언은 달랐다. 대리석 채굴 현장에서부터 수많은 장인들의 작품이 탄생한 작업장까지 돌아보며 피에트라산타의 진면목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편집자 주)

전 세계의 조각가를 부르는 카라라의 석산.

전 세계의 조각가를 부르는 카라라의 석산.

낯익은 두오모, 피사와의 조우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역에서도 가장 토스카나다운 역사 도시 하면 루카(Lucca)를 손꼽는다. 루카 성 안에 있는 대부분의 고색창연한 가옥들이 중세의 것이지만, 루카는 세계사 속에서도 자주 거명되곤 했던 고대 도시이기도 하다. 또 시저가 루비콘 강을 건너 제1차 3두정치를 도모했던 회담 장소이기도 하다.

필자가 방문한 8월 초에는 루카 출신의 지아코모 푸치니(Giacomo Puccini)를 기념하는 음악축제가 열리고 있어 인파들이 몰려든 상태였다. 원래 유명한 ‘푸치니 페스티벌’은 가까운 토레 델 라고에서 열리지만 루카에서도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성 안의 나폴레오네 광장, 산 미켈레 광장 등에는 세계 곳곳에서 온 음악 순례자들이 모여 있었다. 루카에서는 자전거로 성 안의 골목을 둘러보고 나서 성곽 위 도로를 따라 달리는 것이 백미다. 2차선 도로의 폭은 족히 될 정도로 성곽의 규모가 컸다. 성곽 위에서 달릴 때는 아푸안 알프스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토스카나의 아름다운 풍광을 즐길 수 있었다.

카라라의 관문 보카디 마그라 항.

카라라의 관문 보카디 마그라 항.

한나절 루카를 돌고난 후 15km 정도 떨어져 있는 피사(Pisa)로 향했다. 사탑 근처에서 차를 갖고 온 가족들과 합류해 피에트라산타(Pietrasanta)로 가기 위해서다. 남서쪽으로 나 있는 피사행 신도로를 따라 언덕을 넘으면 바로 평원 위에 자리 잡은 피사가 보이며 두오모와 사탑임을 한눈에 알 수 있는 낯익은 건축물들이 나타난다. 루카에도 사람들은 제법 있었지만 사탑 근처에 운집한 관광객들은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아무리 보아도 쓰러질 것만 같은 거대한 탑이 불안하게 서 있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다. 사탑과 두오모 주변에는 텅 빈 잔디밭이 시야를 시원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이 불가사의한 건축물의 기울기를 더욱 과장되게 느끼게 하는 것 같았다.

세계적인 조각가가 모이는 피에트라산타
구글 맵에서 리구리아 해안에 있는 카라라 산이 마치 만년설로 덮인 것처럼 하얗게 보이더니 실제로 눈앞에 펼쳐진 산이 정말 하얗다. 워낙 좋은 석재를 싸게 공급받을 수 있는 곳이다 보니 전 세계의 조각가들이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다. 또 미술대학이 있어 조각을 전공하는 유학생들이 각국에서 와 있다. 이런 이유로 카라라가 조각의 도시로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 세계적인 조각가들이 몰려들어 작업을 하는 곳은 그로부터 남쪽으로 약 17km 떨어진 곳에 있는 피에트라산타다.

루카의 성벽 위로 난 아름다운 도로.

루카의 성벽 위로 난 아름다운 도로.

아름다운 리구리아 바다를 끼고 있는 세계적인 휴양지인데다 바로 인근의 카라라에서 생산된 백옥 같은 대리석을 유통하고 가공하는 곳은 피에트라산타다. 그러다 보니 옛날부터 수없이 많은 조각의 거장들이 찾아와 휴양 겸 작업을 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로 정착하거나 체류하는 곳이 되었다. 특히 르네상스의 발상지라 할 수 있는 피렌체에서 소요되는 대부분의 역사적인 조각 작품들이 피에트라산타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익명의 장인들, 예나 지금이나 거장들의 작품들이 사실은 이곳 장인들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경우는 드물다 한다. 르네상스의 거장 도나텔로, 미켈란젤로, 20세기 헨리 무어, 이사무 노구치, 마리노 마리니, 페르난도 보테로 등의 거장들이 바로 이곳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던 것이다.

이곳 피에트라산타에 정착해 작업하는 유일한 한국인 조각가 박은선씨(45)의 자택에 잠시 머물기로 하고 찾아갔다. 17년 전 유학을 와서 조각으로 인정받은 뒤 이곳에 정착하게 된 박은선 작가. 필자는 실제 그의 작업 내용도 보고 싶고, 또 세계적인 거장들의 작업 환경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던 것이다. 아담한 피에트라산타 광장과 연결된 가리발디가를 따라 걸어가면 박은선 작가의 집이 나오는데 올리브 정원까지 갖추고 있는 저택이다. 그 모습에 반한 우리 가족이 흡족해하는 가운데 여장을 풀었다.

산 미켈레 성당(사진 위). 두오모 성당.

산 미켈레 성당(사진 위). 두오모 성당.

저녁 식사를 하고 나서도 해가 많이 남아 있어 박은선 작가와 함께 자전거 산책을 나섰다. 작가는 집에서 작업장까지 자전거로 출퇴근을 한다. 마침 도착한 때가 주말이어서 작업을 방해하지 않아 다행스러웠다. 가장 먼저 간 곳이 유서 깊은 피에트라산타 광장이다. 광장에는 해수욕장에서 돌아온 휴양객들이 모여들어 활기가 넘쳤다. 여름철 이 광장은 해가 질 때부터 주변 카페나 레스토랑만이 아니라 화랑들도 문을 여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인구가 3만 명이나 될까 싶은 조그만 도시에 갤러리가 무려 30여 개나 있다 한다.
광장과 전시장으로 개조한 공회당에서는 동물 생태계 파멸을 경고하는 스테파노 봄바르디에리의 작품전이 열리고 있었다. 1년에 두 명의 작가를 시에서 선정해 전람회를 개최한다는데 상당히 비중 있는 전시라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전 유럽에서 휴가 온 부호 관광객들에게 선보이는 전시인지라 그 파급 효과가 대단히 커 보인다. 박은선 작가는 작년에 이 전시에 초대를 받았다고 한다. 밤이 깊어지자 우리는 미켈란젤로가 머물렀다는 ‘미켈란젤로 바’에서 자정을 넘긴 줄도 모르고 대화를 나누었다.

치열한 예술의 현장
다음날 아침 카라라로 발걸음을 향했다. 대리석 채굴 현장을 보기 위해서다. 정확한 지명은 마사카라라이다. 마사(Massa)와 카라라(Carara)를 합쳐 지어진 이름이다. 석탄 광산촌 같지는 않지만 광산 마을 특유의 황량함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해발 1,850m나 되는 엄청나게 높고 큰 산 전체가 대리석으로 되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침 일요일이어서 작업이 없어 예상했던 소음이 들리지 않아 오히려 적막하게 느껴졌다. 카라라에서는 양질의 고급 대리석이 2천 년 전부터 채취되기 시작해 앞으로도 2천 년 정도 더 채취할 양이 남아 있다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다시 피에트라산타로 돌아온 우리는 박 작가의 안내로 몇 군데의 작업장을 둘러보았다. 나 혼자 찾아갔으면 문도 열어주지 않았을 곳을 박 작가가 있음으로 해서 굳게 닫힌 거장들의 작업장 문이 열리는 것을 보며 작가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들른 곳은 조각가 줄리아노 반지의 작업장이다. 그는 바티칸 도서관 로비나 일본 하코네 조각공원 등에서 볼 수 있는 거대한 석조 군상을 만든 사람으로 현재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작가다. 일본에서는 이 작가의 작품만을 소장한 조각공원이 있을 정도로 인기가 많다. 현재 제작 중인 작품이나 과거 제작했던 작품들의 모형들이 마치 미술관처럼 잘 정돈되어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곳 작업장들은 기본적으로 공장과 비슷한 규모다. 물론 워낙 정리 정돈이 잘 되어 작업장이라기보다는 대학 캠퍼스와도 같은 분위기다. 세계적인 거장들의 작품 제작을 의뢰받아 제작하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이색적이다. 놀라운 사실은 수많은 장인들의 수작업을 통해 현존하는 거장들의 작품뿐만이 아니라 세계적인 박물관의 주요 소장품들, 복제품들이 완벽하게 이곳의 작업장에서 제작되고 있다는 것이다. 박 작가의 작업장에도 잠시 들렀다. 얼마 전 덕수궁에서 전람회가 있었던 페르난도 보테로의 작업장 바로 옆에 자리 잡고 있는 박 작가의 작업장에는 하얀 돌가루가 눈처럼 쌓여 있었다. 휴일이어서 쉬고 있지만 그 돌가루가 내려앉은 모습을 통해 작가가 얼마나 치열하게 작업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유럽의 여러 미술관과 갤러리들에 보내야 할 작품들로 바캉스도 잊은 채 작업하고 있었다. 조각의 본고장이라 일컫는 이곳에서 우리나라 작가가 널리 인정받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대견해 보였다.

1 ‘포획된 고래’. 스테파노 봄바르디에리 작품. 2 피사의 사탑. 3 피에트라산타 세례당의 보테로 벽화. 4 미술 시장 최고의 흥행 카드인 다미엔 허스트의 작품이 제작 중이다. 5 광장에서 전시 중인 스테파노 봄바르디에리 작품.

1 ‘포획된 고래’. 스테파노 봄바르디에리 작품. 2 피사의 사탑. 3 피에트라산타 세례당의 보테로 벽화. 4 미술 시장 최고의 흥행 카드인 다미엔 허스트의 작품이 제작 중이다. 5 광장에서 전시 중인 스테파노 봄바르디에리 작품.

예술가들이 부러워지는 곳
다음날 피에트라산타를 떠나기에 앞서 다시 찾아간 몇 군데 작업장에서 조각 작품들이 제작되고 있는 모습을 보았는데 참으로 장관이었다. 살아 움직이는 거대한 미술관 같았다. 피에트라산타의 조형 작업 인프라는 모든 예술가들이 부러워할 정도의 규모와 수준을 갖추고 있다. 좋은 재료와 시설, 기술을 갖추고 있다 보니 유명 작가들이 작품 제작을 위해 모이고, 작가들이 많이 모이다 보니 그 작업 모습을 보고자 또 많은 순례객들이 찾는다. 작가에게 작품을 구하기도 용이하고 사람이 많이 보여 팔기도 좋은 환경이다 보니 엄청난 명문 갤러리들이 설립되어 활동하는 예술도시가 된 것이다. 우리나라도 석재와 브론즈나 스테인리스스틸 가공 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그런데 우리의 예술 진흥은 지나치게 사람에게만 집중되어 이러한 인프라의 역할과 그것이 가져올 커다란 부가가치의 창출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상태다. 파주 헤이리 같은 아트빌리지에서도 피에트라산타와 같은 곳을 벤치마킹할 만한 내용들이 적지 않아 보인다.

[자전거로 찾아가는 문화기행 ]‘조각가들의 천국’ 이탈리아 피에트라산타

[자전거로 찾아가는 문화기행 ]‘조각가들의 천국’ 이탈리아 피에트라산타

필자 이재언은
1958년생. 강원대 미술교육과를 졸업하고 홍익대 대학원 미학과 석·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상명대 겸임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선갤러리 아트디렉터 및 한국공예학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1989년부터 미술평론가로 활동하는 한편 2006년부터 인천-서울, 일산-서울 장거리 ‘자전거 출근’과 함께 자전거 문화와 미술을 접목한 집필 및 강연 활동을 해오고 있다. 역서 「존 듀이 경험으로서의 예술」(책세상)

[자전거로 찾아가는 문화기행 ]‘조각가들의 천국’ 이탈리아 피에트라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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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가 박은선은
경희대 미술교육과를 졸업하고 이탈리아로 유학을 와서 정착한 지가 17년이 되었다. 기존의 한 덩어리 재료로만 조각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거대한 기하학적 입방체들을 잘게 토막낸 조각들을 정밀하게 조립해 기념비적 조각 작품을 완성하는 새로운 개념을 선보여 이탈리아 조각계에서 크게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 여러 나라의 유명 미술관과 명문 갤러리들에서 초청을 받았으며 국내 전시까지 무려 20여 차례의 개인전을 가진 바 있다. 박은선 작가의 선미술상 수상 기념전이 오는 11월 11일부터 27일까지 선아트센터에서 열린다.

■글&사진 / 이재언(미술평론가) ■취재 협조 / 울프 라운치(WOLF LAUNCH), 여행과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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