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의 작은 마을 구경하기
유럽 여행의 재미 중 하나는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도시를 훑는 것이다. 유럽의 도시는 큰 도시든, 작은 도시든 어느 날 갑자기 신도시가 뚝딱 만들어지지 않았다. 아버지의 아버지 때부터 대대로 집을 짓고 세우고, 물려받아 도시를 만들어왔다. 해서 유럽의 도시에선 시간의 향기가 깊게 배어 있다. 실제로 고도(古都)란 이름이 붙지 않을 만한 도시가 없다.
스위스 생갈렌은 동부에 있는 중형급 도시다. 파리나 로마, 런던에 비해서는 작지만 스위스에서는 제법 큰 도시 중 하나다. 이 도시는 한때 유럽 학예문화의 중심지였다. 스위스가 학예문화의 중심지라고? 아마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맞다. 생갈렌은 스위스의 역사문화 도시다.
유구한 역사의 도시, 생갈렌
일단 역사부터 살펴보자. 아일랜드에서 온 성자 갈루스가 스위스를 찾은 것은 7세기다. 그는 선교사로서 스위스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했다고 한다. 당시 스위스는 변방이었을 게 분명하다. 세계의 수도는 로마였고, 로마의 힘이 전 세계에 미치던 때였다.
생갈렌은 아펜젤 알프스와 가까워서 휴양지나 산마을 정도였다. 어쨌든 갈루스를 기리기 위해 교회와 수도원이 세워진 것은 9세기 무렵이었고, 이어 스위스의 주요 도시로 주목받게 된다. 스위스는 전략적으로는 중요한 요충지였다. 과거 로마는 스위스가 자연이 만들어준 방어벽이라고 여겼다. 알프스를 넘어서 로마제국으로 쳐들어오는 침략군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카르타고의 한니발이 로마제국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이후 로마는 스위스를 눈여겨보게 된다. 스위스는 지금의 오스트리아와 독일로 가는 지름길이었던 탓에 외세의 침략도 많이 받았다. 헝가리인들이 침략했고, 이어 사라센이 엿보기도 했다. 이런 수많은 침략을 버텨낸 끝에 생갈렌은 14세기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도시로 승격하게 된다.
생갈렌이 유명해진 것은 이름난 수도사들 때문이었다. 토머스 아캠피스 같은 수도사들이 이곳에서 라틴어 성경을 한 장 한 장씩 필사하며 금욕생활을 했다. 그들의 삶은 평탄하지는 않았을 게 분명하다. 호이징가는 명저 「중세의 가을」을 통해 수도사들은 공부나 하고 묵상만 할 것이라는 생각과는 달리, 노동과 함께 잡일도 많이 했다고 밝혔다. 물론 필사본을 만드는 작업도 중요했다. 책 한 권을 실수 없이 마무리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팔만대장경을 새겼던 불자들처럼 그들도 성서 필사에 온몸을 바쳤을 게 분명하다.
해서 이 도시에서 꼭 봐야 할 곳은 생갈렌 도서관이다. 희랍어로 ‘영혼의 약국(ΨΥΧΗΣ ΙΑΤΡΕΙΟΝ)’이란 현판이 붙은 이 도서관은 영화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도서관과 영락없이 빼닮았다.
그렇다면 수도원이 왜 이렇게 커졌을까? 수도원은 중세의 유일한 교육기관이었다. 당시는 수도사나 일부 귀족을 제외하고는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도 드물었다. 동시대 프랑크(현 프랑스)왕국의 전설적인 왕 샤를마뉴 대제도 까막눈이었다고 한다. 귀족들은 자제를 수도원에 보내 가르쳤다.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형성하는 것도 중요했고, 글이라도 배울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라틴어도 수도원에서 읽혔다. 수도원은 중세 문화의 중심일 수밖에 없다. 인쇄기술이 발달하기 전에는 책도 필사할 수밖에 없었으니 수도사들의 역할도 중요했다.
도서관은 덧버선 같은 실내화를 신고 들어가게 돼 있다. 2층까지 책장이 층층 쌓여 있다. 매캐하고 오래된 책 냄새가 은은하게 퍼져 나오고, 천장은 화려한 벽화로 장식돼 있다. 장식장은 네모반듯하지 않고 휘어지고 굽이졌다. 장식도 화려하다. 이 도서관은 198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스위스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가장 오래된 수도원 도서관이기 때문이다. 해서 이 도서관을 보기 위해 전 세계에서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온다. 사실 책을 직접 꺼내 읽을 수는 없지만 도서관을 둘러본다는 것만으로 감동이다. 사진 촬영은 엄격하게 금한다.
아담하고 정갈한 도시
물론 도시도 아름답다. 대성당은 바로크 양식으로 멋을 많이 냈다. 벽화는 화려했다. 유럽의 주요 도시와 대표 성당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대성당 앞에는 푸른 잔디밭이 펼쳐져 있고, 오래된 건축물에선 학생들이 분주하게 오간다. 생갈렌이란 도시가 과거에도 제법 유명하고 컸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이 도시는 후대에 섬유 산업이 발달했다.
생갈렌은 어지럽지 않고 단아한 모습을 하고 있다. 마치 1분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고 제시간에 움직이는 스위스의 열차처럼 도시구획이 잘 돼 있다. 곳곳에 수백 년 묵은 건축물들이 늘어서 있지만 어지럽게 흩어져 있지 않고 어깨를 기대고 나란히 서 있다. 당시에도 이미 계획적으로 도시가 지어졌음을 짐작하게 한다. 대성당 앞 광장에서는 휴일이면 벼룩시장도 열린다. 알뜰하기로 이름난 사람들이 스위스인들인데, 우리 같으면 이미 쓰레기통으로 갔음직한 장난감도 가지고 나와 헐값이라도 받고 판다.
도시 중심에는 아름다운 식당도 많다. 400년쯤 된 오래된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면서 와인을 마시는 재미가 쏠쏠하다. 스위스 와인은 사실 수출할 물량이 많지 않아 스위스 국내가 아니면 맛보기 힘들다. 역사를 음미하며 와인 한 잔 하는 것도 여행의 즐거움이 된다.
스위스의 고도는 프랑스나 영국의 고도와는 약간 다른 분위기다. 알프스 산자락과는 약간 떨어져 있긴 해도 스위스는 여전히 자연적이다.
여행 길잡이
취리히에서 동쪽으로 1시간 거리에 있다. 직물, 섬유박물관이 유명하다.
■글&사진 / 최병준(경향신문 문화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