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남도에서 광활한 만주 벌판...우리 어찌 가난하리오.”
비행기는 ‘광야에서’라는 노래가 묘사하고 있는 만주벌판 위를 지난다. 간도로 갔다. 그곳은 지금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이다. 대부분의 한국인은 관광을 위해 이 곳에 간다.

암울한 일제시대에 간도는 생존의 땅이었다. 굶주리던 사람은 드넓은 평야가 있는 곳을 찾아 개간했다. 조국을 잃어 핍박받던 지식인들은 이 곳을 항일 투쟁의 중심지로 삼았다. 당시에는 강 하나만 건너면 됐다. 하지만 지금은 여권과 비자란 것이 필요하다. 그곳은 중국 땅이 되어 있다.
이제는 남의 땅이 되어버린 간도에서 한국과 중국의 현재 국경선인 두만강을 찾았다. 2004년 1월 8일 중국 도문에서 훈춘에 이르는 도로에서 취재팀이 본 강은 폭이 불과 15m도 되지 않았다. 흘러간 유행가에서처럼 ‘노젓는 뱃사공’이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한반도의 머리 위에 굵게 그어진 선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초라한 모습이다.
두만강에는 푸른 물이 흐르지 않았다. 북한과 중국의 경계는 회색빛의 얼음으로 창백하게 굳어있었다. 얼어붙은 국경선이다. 이 선이 지도를 가르고 국적을 갈라놓았다. 어느덧 한국인들의 머릿속에도 두만강은 얼어붙은 국경선이 되어버렸다.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위해 강을 넘어선 투사들도, 가난을 이기지 못해 간도로 넘어간 사람들도 강을 넘는다고 해서 결코 다른 나라로 간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두만강 너머에도 우리의 땅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 곳에서는 어느 누구도 두만강이 국경선이 아님을 말해주지 않았다. 얼어붙은 국경선 아래에서도 물은 흘렀다. 누군가 트여놓은 얼음 도랑으로 물이 세차게 흘렀다.
3명의 현지 취재팀은 중국 땅에서 과거와 현재의 국경선을 다녀왔다. 결코 묻을 수 없는 과거의 역사와 이를 슬쩍 묻어 버린 현재의 땅을 직접 눈으로 보고자 했다. 북한의 남양시를 바로 앞에 둔 중국 도문을 찾았다. 그곳에는 약 100m에 이르는 도문대교가 있었다. 다리의 가운데 빛바랜 흰 페인트 글자로 ‘변계선’이라고 적혀있다.
중국 측 강둑에는 국경을 표시하는 현란한 표식물이 다섯 개 세워져 있다. 그 중 하나는 ‘중조우의탑’이라는 표식이었다. 경계를 맞대고 있는 중국과 ‘(북)조선’ 양국이 서로 우의있게 지내자는 뜻이리라.
중국과 북한은 1960년대 초반 변경조약을 맺었다. 비밀조약이어서 내용은 완전히 공개되지 않았다.
현재의 국경선은 이 변경조약을 근거로 하고 있을 것이다. 중국이 양국 국경의 대표적인 상징인 도문대교 옆에 굳이 북한과의 우의를 강조하고 탑을 세워두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1909년 일본과 청 사이의 간도협약에 의해 간도는 중국 땅이 되었다. 하지만 한국의 주도권을 빼앗아 대신 맺은 조약이기에 원천적으로 무효라는 것이 국제법상 일반화된 견해다. 중국은 북한과의 ‘우의’를 내세워 국경선을 영원히 굳혀 두고 싶을 것이다.
‘중조우의탑’의 표식 밑에는 두만강의 중국식 표기인 ‘도문강’이 장백산(백두산의 중국식 표기)에서 발원, 총길이는 490㎞에 이른다고 표기돼 있다.
1712년 백두산정계비에 나타난 분수령인 압록강과 토문(土門)강을 중국 측은 압록강과 도문강(圖們)강으로 주장해왔다. 두만강의 중국식 표기인 도문강이 토문강이라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두만강은 백두산 천지 부근에서 압록강과 만나는 강이 아니었다. 정계비에 씌어진 토문강은 북쪽의 만주벌판으로 흘러가는 송화강의 지류였고 이 지류의 동쪽에 속하는 간도는 우리 땅이었다.
흔히 ‘간도는 우리땅’이라고 말하면 허무맹랑한 주장이라고 치부해버린다.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의 영토를 회복하자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간도는 15세기 이후 어느 나라의 땅에도 속하지 않는 곳에 우리 조상들이 건너가 벌판을 개척한 곳을 말한다. 주로 두만강 위의 지역이 간도에 해당된다.

1월 9일 취재팀은 새로운 국경선이 되어야 할 송화강의 지류를 찾아 나섰다. 정계비 상의 토문강이 흘러나오는 물줄기를 찾고자 하는 바람이었다. 연길에서 백두산으로 가는 길 속에 지류들이 놓여 있었다. 백두산 인근에서 발원하는 송화강의 지류는 서쪽에서부터 두도백하(頭道白河), 이도백하, 삼도백하, 사도백하, 오도백하이다. 학계에서 주목하고 있는 토문강은 이도백하 또는 사도백하이다.
백두산 천지의 동남쪽에서 발원하는 토문강은 잠시 땅으로 스며든 건천이 되었다가 다시 땅 위로 솟아 송화강 본류로 흘러들어간다. 1855년(고종22년) 조선과 청나라 간에 정계비로 인한 회담당시 감계사 이중하는 조정에 이렇게 보고했다.
“토문 주위의 형편으로 보아도 (정계)비의 동쪽으로 건천이 있고 100리 지나서 비로소 물이 나오는데 동북쪽으로 흘러 다시 북으로 꺾이며 송화강으로 유입합니다. 송화강은 흑룡강 상류의 한 줄기입니다. 길림, 영고탑 등의 땅은 모두 그 안에 있습니다.”
토문강 발원지는 현재 북한 지역에 있다. 그러나 토문강은 중국 지역으로 흘러들어 간다. 중국 송강진을 지나 이도백하진으로 가는 길에서 사도백하를 만났다. ‘사도백하교’라는 빨간 표식이 15m 길이의 다리위에 새겨져 있다. 6m정도의 폭을 가진 하천은 얼어 있었고 그 위로 눈이 쌓여 있었다. 발자욱이 어지럽게 이어져 있다. 하천옆에는 잡목들이 군락을 이루었다. 백두산 정계비를 세우던 3백년전 이 곳에서도 토문강물이 바로 이 곳을 흘렀을 것이다. 간도 지역에는 태풍이나 장마가 거의 없어 하천의 범람이 아주 드물게 있을 뿐이라고 한다. 그 만큼 수로가 크게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토문강이 사도백하의 한 줄기라면 백두산 천지 옆에서 발원해 약 60㎞를 달려 이 곳에 이르는 셈이다. 사도백하 위에서 백두산 쪽을 바라보았으나 백두산은 보이지 않았다. 중국 쪽에서는 천천히 고지대를 오르기 때문에 백두산 바로 앞에 이르기 전까지 정상을 볼 수 없다. 하지만 물줄기를 따라 올라가면 금방이라도 토문강을 만나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도백하는 조선족들이 많이 거주하는 이도백하진에 도착하기 바로 전에 있었다. 3m정도의 폭을 가진 하천이 잡목 사이로 흘렀다. 이도백하진을 지나 백두산으로 접어들면서 다시 이도백하를 만났다.

눈이 덮인 도로 옆을 흐르고 있었다. 이도백하에는 청둥오리 떼가 영하 20도에 이르는 추운 날씨에도 유유히 물위를 노닐고 있다. 천지폭포로 다가가자 천지에서 흘러내린 이도백하는 김을 뿜어냈다. 온천수였다. 취재팀의 발길은 천지폭포 앞에서 멈추었다. 백두산 정상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토문강 동쪽인 간도의 길 위에서 만난 조선족은 우리 말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땅 뿐만 아니라 사람들도 우리와 닮아 있었다. 연변조선족 자치주 안에서 한국인은 외국인이 될 수 없었다. 한국말로 하면 바로 대답하거나 옆의 사람을 불러왔다.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모두 조선족이었다.
도시 이름도 연길·용정·화룡·도문·훈춘, 모두 한국식이었다. 도로 간판에는 한자로 적혀있었지만 조선족들은 모두 한국식으로 읽었다. 한족(漢族)들까지도 한국식 표기로 부른다고 한다. 거리의 간판에는 항상 한국어가 한문 위에 씌어 있도록 되어 있다.
지붕만 보아도 조선족과 한족의 집을 구분할 수 있다고 한다. 한족의 집지붕은 앞과 뒤가 있는 밋밋한 ‘맞배지붕’형태 였지만 조선족의 지붕은 기와집처럼 ‘팔작지붕’ 형태를 갖고 있었다. 간도 2·3세대들은 자손들에게도 이 문화를 고집했다. 자녀들에게 조선족과의 결혼을 종용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이곳이 중국이라는 현실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도문시 남시장에서 만난 조선족 김 모씨는 아들을 한국에 유학보냈다고 했다. 아들이 한국에서 계속 살기를 원하냐는 취재팀의 질문에 김 씨는 “이 곳에 나서 자랐는데 어디를 가겠어요”라고 말했다. 연길의 한 조선족 지식인은 “이 곳은 한국 땅이 아니라 조선족이 살고 있는 땅”이라고 선을 그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인정해준 조선족의 땅’이라는 것이다. 이 지식인은 “대한민국 정부가 간도가 우리땅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반대한다”고 잘라 말했다. 중국 국민이란 신분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조선족은 일제시대 일본과 중국, 그이후 공산당과 국민당의 틈바구니에서 자생적으로 살아 남아야 했다. 1945년 해방이후에는 남한과 북한으로부터 사실상 버림을 받았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면서 억지로 중화인민공화국의 ‘인민’이 될 수 밖에 없었다. 1960·70년대 문화대혁명 당시에는 ‘민족주의 타파’라는 이름아래 또 한번의 고난을 당해야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한국의 문화와 전통을 고집스럽게 지켜왔다. 땅은 잃어버렸지만 사람을 잃지는 않았던 것이다.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조선족은 위기를 겪었다. 수만명의 조선족이 한국으로 왔다. 불법 체류, 취업 사기, 처녀들의 결혼 이민 등으로 혼란을 겪었다. 조선족 자치주 안에서 과반수를 넘던 조선족도 40%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줄어들었다.
최근 조선족은 또다른 위기를 겪고 있다. 중국 정부는 고구려사를 중국사에 편입시키려는 동북공정에 조선족 학자들을 동원하고자 하고 있다. 한국에서 조선족을 해외동포로 인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중국정부는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간도 영유권 주장은 이들에게 또 한번 ‘목숨을 건 선택’을 강요하는 셈이 될 것이다.
한 조선족 지식인은 “우리도 같은 마음이지만 이미 현실은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조선족과 취재팀 사이에는 문화의 국경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인민이었고, 취재팀은 대한민국 국민이었다. 누가 이렇게 갈라놓았을까. 얼어붙은 국경선이었다. 눈길 위에서 취재팀은 ‘닫힌 국경선’이 아니라 두만강을 넘어서는 ‘열린 국경선’을 꿈꾸었다.
글/윤호우(뉴스메이커 기자/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 현지 취재) 사진/김석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