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달의 분화구들이 풀밭으로 덮였다면 이런 모습이었을까. 들판에 불룩 솟았으되, 바람이 빠진 것처럼 윗부분이 평평한 아끈다랑쉬 오름, 왕릉처럼 부드러운 능선의 용눈이 오름, 멀리 바다 위로 아스라히 보이는 탁자 모양의 성산 일출봉, 들판 위로 천연덕스럽게 튀어나온 크고 작은 오름들….

힘겹게 정상까지 올랐더니, 푹 꺼진 굼부리(분화구)가 나타났다. 다랑쉬에 ‘오름의 여왕’이란 별칭을 안겨준 완벽한 원형 굼부리다. 한라산을 빚은 설문대 할망이 다랑쉬 오름을 만들어놓고 위가 너무 뾰족해 한 손으로 툭 쳤더니 이렇게 쏙 들어가버렸다는 전설이 있다. 설문대 할망이 너무 세게 쳤던 것일까. 굼부리 둘레 1.5km, 깊이 115m. 산굼부리(132m) 다음으로 깊고, 한라산 백록담과 깊이가 같다. 굼부리 모양이 보름달을 닮았다고, 또는 굼부리 위로 뜨는 보름달이 아름답다고 해서 ‘달’을 뜻하는 ‘달랑쉬’ ‘도랑쉬’ 등으로 부르다 ‘다랑쉬’로 이름이 정착됐다. 제주관광 안내지도엔 ‘다랑쉬’를 한자로 고쳐 ‘월랑봉(月郞峰)’으로 표기했다. 지금 굼부리엔 억새가 소금처럼 하얗게 피었다.
다랑쉬 오름에선 ‘오름 왕국’이 한눈에 들어온다. ‘둘째’란 뜻의 ‘아끈’이 붙은 아끈다랑쉬 오름, 땅끝이란 뜻의 지미봉, 두산봉, 윤드리 오름(은월봉), 문석이 오름, 용눈이 오름, 좌보미, 손지(손자) 오름, 동거문이 오름, 백야기 오름, 높은 오름, 아부(앞) 오름…. 수십개가 족히 넘는다. 제주 오름은 모두 368개. 북제주군 일대에만 151개다. 다랑쉬는 높은 오름(405.3m) 다음으로 이 일대에서 가장 높다.
오름은 10만∼2만5천 년 전 한라산의 후화산 활동으로 분출된 크고 작은 기생화산들이다. 사람보다 먼저 땅에 놓여있던 이것들을 제주 사람들은 ‘산’ ‘봉우리’를 뜻하는 ‘오름’으로 불러왔다. 사회과 교과서에 ‘기생화산’으로만 등장하던 오름이 뭍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불과 10년 안팎이다. 제주도 산악인 고 김종철씨가 오름 330여 곳을 답사해 제민일보에 138회에 걸쳐 답사기를 싣고, 1995년 ‘오름나그네’란 제목의 책으로 펴냈다. 이어 제주 사람들이 ‘오름오름회’ ‘오름오르미’ 등의 오름 답사단체를 만들어 하나 둘 오름을 오르기 시작했고, 이제는 뭍사람들까지 찾게 됐다.
‘다랑쉬’란 지명이 귀에 익은 것은 슬픈 역사 때문이다. 1992년 다랑쉬 오름 근처 굴에서 4.3항쟁을 피해 숨었다가 군경토벌대에 학살된 마을사람 11명의 유해가 발견됐다. 다랑쉬 오름 산불 감시원 고승사씨(64)는 오름 아래 구불구불한 고샅을 가리키며 “4.3 전만 해도 월랑동(다랑쉬마을), 가시남동의 2개 마을이 있었다”며 “5일장이 설 만큼 번화한 곳이었는데, 그 사건 후 모두 없어졌다”고 말했다. 옛 다랑쉬마을 자리엔 ‘잃어버린 마을’ 표지석만 남아 있다.
오름 밑에서 난을 피한 것은 4.3 때뿐이 아니었다. 일제강점기에도, ‘이재수의 난’으로 알려진 ‘천주교난’ 때도, 원나라의 침공 때에도 제주 사람들은 오름과 오름에 봉화를 올려 교신하고, 오름을 방패 삼아 항쟁했다. 평화로울 땐 오름의 초지에 말을 놓아 길렀고, 죽으면 돌아가 오름에 묻혔다. 아끈다랑쉬 오름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는 말들과, 용눈이 오름 자락의 돌무덤들은 제주 사람과 오름의 관계를 웅변하는 것일까.
아침 운동이라도 하는지, 한 부부가 막 오름에 올라 땀을 씻고 있었다. 그들은 “1주일에 한 번 다랑쉬에 오고, 나머지는 비자림에 가서 운동한다”고 말했다. 외지인에겐 ‘달의 분화구’처럼 낯선 자연 유적도, 수백년 된 아름다운 숲도 그들에겐 마을 뒷산과 다름없으니, 오름이 삶의 일부인 제주 사람들은 참 좋겠다.

북제주군 구좌읍 송당리 건영목장 앞. 주변에 오름이 워낙 많아서 보고도 그냥 지나쳤다. 오름 입구 표지석엔 송당리 마을 앞이란 뜻의 ‘앞오름’으로 표기돼 있지만, 마을 사람들은 ‘아버지’나 ‘아버지처럼 존경하는 사람’을 뜻하는 제주방언인 ‘아부’를 따서 ‘아부 오름’이라 부른다. 위가 평평한 모습이 믿음직한 어른이 앉아 있는 것 같다는 의미에서다. 해발 301.4m이지만 지대 자체가 높아서 실제 올라야 할 높이는 51m밖에 안 된다. 한달음에 10분이면 오를 수 있다.
정상에 올라서면 탄성이 나온다. 서울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쯤 될까. 큼직하고 평평한 원형 분화구가 나타난다. 둘레 1.4km, 깊이 78m. 오름 자체의 높이보다 분화구가 더 깊다. 분화구 한가운데엔 삼나무를 둘러 심어놓았다. 공중에서 보면 ‘눈알’처럼 보일 것 같다. 이곳에서 영화 ‘이재수의 난’을 촬영했다고 한다.
주변 풍경은 황량하다. 아부 오름은 오름 특유의 여성적이고 고운 선을 느끼긴 어렵지만, 거칠고 황량한 남성적인 매력이 있다.
1112번 도로 구좌읍 대천 4거리에서 송당 방향으로 4.2km 달리다 건영목장 입구에서 우회전, 2km쯤 더 가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그곳에서 우회전해 1km 정도 가면 왼쪽으로 앞오름 표지석이 나온다. 주변 목장은 사유지이기 때문에 철조망을 2개 넘어야 한다.
용눈이 오름
전형적인 제주의 오름이란 평을 받는다. 고만고만한 오름들 사이 등성이에 돌무덤 10여 기가 놓여 있는 오름이 바로 용눈이 오름이다. 경사가 급하지만 10분이면 오를 수 있다. 해발 247.8m이지만 실제 올라야 할 높이는 88m. 등성이마다 조그마한 새끼 봉우리들이 봉긋하다. 용이 놀았던 자리라고도 하고, 용이 누워 있는 모습 같기도 하다고 해서 ‘용눈이’란 이름이 붙었다. 들판엔 자줏빛 꽃을 단 꽃향유가 지천이다. 1999년 식물학자 이영노 박사가 이곳에서 신종 ‘한라 꽃향유’를 발견하기도 했다.

정상에 서면 끊어질 듯 이어지는 능선이 눈을 끈다. 용눈이 오름의 굼부리는 모두 3개. 부드럽게 능선을 휘감아도는 굼부리와 봉우리들이 아름답다. 제주의 풍경을 렌즈에 담아오다 지난 5월 루게릭병으로 세상을 떠난 사진가 김영갑씨는 용눈이를 제주에서 가장 선이 아름다운 오름으로 꼽았다.
북제주군 구좌읍 종달리. 16번 도로 송당리에서 수산리 방향으로 4.6km 가면 왼쪽으로 하도리로 가는 삼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직진. 16번 도로로 1km 정도 더 가면 왼쪽으로 용눈이 오름이 나온다. 철조망 틈에 놓여 있는 돌계단이 입구다.

보는 방향에 따라 모양이 다채롭다. 다랑쉬 오름 쪽에서 보면 혹을 두 개 단 낙타 모양인데, 반대쪽에선 다리를 세운 거미 모양이다. 여러 개의 봉우리와 분화구가 거미집 같다고 해서 ‘거미’ 오름이라고도 하고, ‘신’을 뜻하는 ‘검’에서 이름이 유래했다고도 한다. 동거문, 거믄, 거미, 거문악 등으로 부르지만, 표지석에는 ‘동거문이 오름’으로 표기돼 있다.
눈앞에 보이는 2개의 봉우리 중 높은 봉우리를 택했다. 길은 가파르지만 야생화가 지천에 피어 심심하지 않다. 투구 모양의 보랏빛 꽃 한라돌쩌귀, 엉겅퀴, 마타리, 쑥부쟁이, 개망초, 여뀌, 꽃향유가 울긋불긋하다. 가시나무와 칡덩굴이 많으니 발을 조심할 것.
정상에 오르면 아찔하다. “분화구가 낭떠러지여서 바람부는 날 올라가면 사망한다”는 말이 엄살만은 아닌 모양이다. 굼부리와 등성이에는 물론, 봉우리 곳곳에도 돌무덤이 있다. 족히 30~40여 기는 된다. 높은 오름, 문석이 오름, 백약이 오름, 좌보미 등이 감싸고 있는 이곳은 예로부터 명당으로 이름 높았다고 한다.
봉우리가 여럿이니만큼 오르는 길도 다양하다. 16번 도로 송당리에서 수산리 방향으로 4km쯤 달려 오른쪽 구좌읍 공동묘지 표지판을 보고 들어갔다. 삼나무길과 비포장도로가 차례로 이어진다. 2km쯤 달리면 표지석이 나타난다. 입구는 표지석 삼거리에서 오른쪽 길로 500m쯤 가면 나온다. 철조망 사이에 사다리가 놓여 있다.

오름은 북제주군 구좌읍 종달리와 송당리 일대에 모여 있다. 16번 도로와 1112번 도로가 만나는 구좌읍 송당 4거리가 오름관광 기점이다. 다랑쉬 오름에 가려면 16번 도로 송당 4거리에서 수산리 방향으로 4.6km를 달린다. 하도 3거리가 나오면 좌회전, 하도리 방향으로 20m 들어가 왼쪽 농로를 따라 2km 정도 가면 오름 표지석이 나온다. 산행로는 나무계단과 폐타이어로 잘 닦아 놓았다.
송당 4거리 주변에서는 숙소나 식당을 찾기 어렵다. 인근 하도리나 성산리에서 민박을 할 수 있다. 편안한 숙소를 찾으려면 서귀포, 중문 일대로 나가야 한다. 중문관광단지 옆 재즈마을(02-738-9300)은 지난해 문을 연 4개 동의 펜션단지. 15∼30평의 다양한 방과 바비큐 시설 등이 있다. 1박 10만∼15만원. 남제주군 성산읍 삼달리 C&P리조트(064-784-7701)는 지난해 7월 문을 연 펜션풍 리조트. 12∼35평형 객실 11개, 노천온천 분위기의 발코니 온천 등이 있으며, 1박 19만∼37만원이다.
성산 일출봉 근처 오조 해녀의 집(064-784-0893)은 전복죽이 맛있다. 오조리 해녀 90여 명이 20년째 공동 운영한다. 순번을 정해 매일 10명이 식당을 지키고, 80여 명은 물질을 나간다. 전복죽 1만5백원. 소라, 해삼, 멍게 등은 1kg에 1만원이다.
각 오름 정보는 제주도 오름답사회 ‘오름오르미’ 홈페이지(www.orumi. net), ‘오름오름회’ 홈페이지(www. ormorm.com), 제주종합관광안내소(064-742-8866) 등에서 얻을 수 있다. 오름오르미는 지난해 5월 오름 100개를 가려뽑아 「오름길라잡이」란 책도 펴냈다.
오름 산행은 하루 2곳 정도가 적당하다. 우회로가 없이 비탈을 똑바로 올라야 한다. 평소엔 운동화면 무난하지만, 비가 온 뒤엔 땅이 미끄럽기 때문에 등산화가 낫다. 정상에 올라서면 바람이 거세다. 덧옷을 준비하는 게 좋다.
글 / 최명애 기자 사진 / 정지윤 기자(glauku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