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폴로 신전과 알렉산더의 분노
지난봄 터키 서부 해안을 따라 역사의 고도(古都)를 훑은 적이 있다. 지중해에서 에게해를 거쳐 마르마르 해까지 이어지는 답사길. 신화시대부터 역사시대를 거쳐 현대에 이르는 이 길에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렸던 영웅들의 이야기가 구구하게 얽혀 있다.
이번 터키 이야기에선 딱딱한 문명사 부분은 접어두고 이들의 이야기나 해보자. 물론 터키에 대해선 할 말이 많다. 히타이트, 프리지아, 우라티아, 리디아와 로마문명 등 화려한 고대 문명이 지나간 곳이자 기독교와 이슬람, 유대교가 뿌리 내린 종교의 성지. 여기에 동양과 서양을 잇는 문화의 교집합 지역이란 것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터키는 결코 한 번에 맛을 알 수 있는 사과파이 같은 나라가 아니다. 그러므로 터키를 처음 접할 독자들에게 딱딱한 역사 이야기보다는 영웅호걸들의 삶을 통해 터키 여행의 즐거움을 조금이라도 전해주고 싶다.
지중해변의 고도 안탈랴에서 지진으로 수중에 잠겨버린 고도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게코바를 지나 북으로 올라가면 디딤. 그리스 델포이와 함께 고대에서 가장 크고 신성시 여겨졌던 아폴로 신전이다. 월드컵 경기장만큼이나 큰 신전은 부서지고 무너져 내려 폐허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어른 서너 명이 팔을 잡아야 안을 수 있는 하얀 대리석 기둥을 만지는 것만으로도 고대인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신전이 처음 세워진 것은 2600~2700년쯤 전이다. 처음부터 이정도 규모는 아니었지만 신전은 점점 더 커졌다고 한다. 현재의 신전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은 기원전 68년 전의 것이다.
이 신전에서 말하고 싶은 주인공은 알렉산더 대왕이다. 알렉산더 대왕 당시 이 땅의 주인은 이오니아인. 주민들은 신전에서 떨어진 곳에 살았으며 오로지 제사장만이 신탁을 받기 위해 신전을 지켰다. 시민들고 올림픽 같은 체전이 있을 때만 신전에 모일 수 있었다.
알렉산더가 이 신전에 들른 것은 기원전 330년 무렵이다. 세 차례에 걸친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다리우스 대왕을 물리치고 세계 정복의 깃발을 올렸던 그는 이 신전에서 아폴로상이 사라진 사연을 밀레투스인들로부터 듣고 대노했다.

이오니아인들이 아폴로상을 페르시아에 팔아먹은 것이다. 기원전 496년 이오니아가 라데 전투에서 페르시아에 패하자 디딤의 성직자들이 페르시아 정복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아폴로상을 바쳤다. 태양의 신 아폴로는 그리스 문화권에서 가장 신성하게 여기는 신 중 하나. 당시 군주는 바로 이런 신전에서 신탁을 받아 전쟁도 치렀고, 나라도 다스렸다. 당연히 알렉산더 대왕의 분노는 컸다. 알렉산더는 이오니아인들의 마을을 철저히 짓밟았다. 신상은 다시 세워졌으나 그 후 지진으로 신전은 많이 파괴됐다. 1백9개나 되던 기둥도 이제는 3개밖에 남지 않았다.
에페수스의 비극, 클레오파트라와 아르시노에
디딤에서 북쪽으로 60km 떨어진 에페수스도 이야기가 많은 곳이다. 전설에 따르면 에페수스는 세 곳이 있었다. 아마존 여전사들이 세웠다는 얘기도 내려오고, 아테네의 안드로클로스가 신탁을 받아 자리를 잡았다고도 한다. 지금 남아 있는 에페수스는 알렉산더 휘하의 장수였던 리시마쿠스가 기원전 3세기에 세운 고도다. 원래 에게 해 연안에 도시가 있었지만 주민들이 떠나기 싫어하자 리시마쿠스는 폭풍우가 치는 날 하수구를 막아 도시를 침수시키고 주민을 강제 이주시켰다. 이곳은 두 언덕 사이에 자리 잡고 있어 적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기가 쉬웠기 때문이다.
당시 수십 만 명이 살았다는 에페수스는 돌덩이 하나하나가 모두 역사다. 지금은 옛 건물의 잔해만 남아 있지만 수많은 얘기가 얽혀있다.
우선 에페수스에선 클레오파트라의 여동생 아르시노에와 예수의 제자인 사도들의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아르시노에는 언니 클레오파트라와의 왕권 경쟁에서 밀려나 결국 언니에게 죽임을 당하게 된다. 사연은 이렇다.

클레오파트라는 열다섯 살때 다섯 살 연하의 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결혼했다. 왕족은 서민들의 피가 섞여선 안 된다는 이집트의 관습 때문에 근친혼은 흔했다. 프톨레이마이오스가 열다섯 살이 될 무렵 남편의 측근들은 클레오파트라가 권력을 독점하려 한다며 쫓아버렸다. 클레오파트라는 용병을 사서 남편과 전쟁을 치르기로 마음먹고 펠루즈에 진을 친 뒤 때를 노리고 있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에 로마의 카이사르(시저)가 이집트에 나타나 두 사람의 전쟁을 말렸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사위이기도 했던 폼페이우스와 전쟁에서 승리한 뒤 이집트로 도망간 그를 잡기 위해 당시 이집트까지 달려간 것이다. 이집트는 로마의 식민지는 아니었지만 왕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이집트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결국 클레오파트라 부부와 여동생 아르시노에까지 알렉산드리아의 왕궁에 불려갔다. 이때 카이사르 몰래 궁을 빠져나가 이집트 군사를 몰고 카이사르에게 대적한 사람이 클레오파트라의 동생 아르시노에. 이집트 군은 2만2천 명, 로마군은 4천 명에 불과했지만 승자는 카이사르였다. 인질이나 다름없던 이집트 왕을 풀어주자 이집트 군대는 갑자기 두 명의 왕이 생긴 꼴이 됐다. 결국 이집트군은 자중지란에 빠졌고, 카이사르에게 무너졌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은 나일강에 빠져 죽었고, 아르시노에는 에페수스로 유배됐던 것이다.
클레오파트라는 다른 전략을 썼다. 당시 스무 살이었던 그녀는 쉰살의 카이사르를 유혹, 결국 그의 정부가 됐다. 로마까지 따라가 1년 반이나 머물렀던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의 아들을 가졌다. 아들 이름이 카이사리온. 어린 카이사르란 뜻이다. 하지만 어찌 세상일이 뜻대로 되는가? 카이사르가 브루투스에게 암살되자 이집트 여왕이던 그녀의 자리도 위태로워졌다. 카이사르 기마대장이었던 안토니우스와 양아들인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의 후계자가 됐다. 두 사람은 전쟁 대신 동방과 서방을 나눠 차지하기로 합의했다. 이집트는 안토니우스 차지였다. 클레오파트라는 다시 안토니우스와 담판을 지어야 했다.
클레오파트라의 초청으로 알렉산드리아에 갔던 안토니우스는 거기서 무려 1년을 머물렀다. 그 역시 클레오파트라에게 빠진 것이다.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에게 에페수스에 있던 여동생을 죽여달라고 부탁했다. 그녀가 또다시 이집트군과 결탁하면 자신의 여왕자리가 위험해질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에페수스 아르테미스 신전에 갇혀 지내던 아르시노에는 결국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그럼 클레오파트라는 행복했을까? 옥타비아누스와의 경쟁에서 안토니우스가 패한 뒤 그녀는 자살했다. 클레오파트라는 세 번이나 결혼했다. 남동생 두 명이 그녀의 남편이었으며, 카이사르와의 사이에서 난 아들과도 결혼했다. 그러나 그녀는 죽기 직전 자신의 시신을 안토니우스 옆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로부터 반세기의 세월이 흐른 뒤 에페수스에 역사를 남겼던 사람은 예수의 제자 사도 바울과 요한이었다.
에페수스에서 예수의 복음을 전파한 제자들
클레오파트라의 죽음 이후 알렉산드리아는 쇠락했고, 에페수스가 소아시아의 수도가 됐다. 당시 인구는 25만 명이나 됐다고 한다. 예수의 제자들은 이곳에서 복음을 전했다. 에페수스 한복판에서 사도 바울은 신은 하나뿐이라고 외쳤다. 그러나 아르테미스에게 바치는 은 제물을 만들던 은 세공장이들이 바울 때문에 장사가 안 될 지경이니 그를 가만두었겠는가. 바울을 죽이기 위해 음모를 꾸미지만 바울은 집정관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구했다. 어쨌든 제자들의 목숨을 건 선교운동으로 기독교는 빠르게 전파됐다. 사도 바울은 로마의 옥중에 갇혔을 때도 에페수스 교인에게 편지를 보낸다. 이 편지가 바로 성경의 ‘에베소서’다.

사도 요한도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에페수스에 머물며 요한복음을 썼다고 한다. 요한은 바울보다 더 심한 고통을 당했다.
당시 로마인들은 황제를 시민들의 주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주인은 오직 신뿐이라고 주장한 사람들이 기독교도. 초기 기독교도는 이 때문에 로마 황제로부터 엄청난 박해를 받았다. 에페수스에서 기독교도를 가려내기 위해 로마인들은 신전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절을 시키며 “황제가 주인”이라고 외치게 했다. 요한이 이런 명령을 거부하자 그를 끓는 기름 속에 던졌고, 요한은 목숨은 건졌지만 순교하지 못했던 것을 오히려 슬퍼했다고 한다. 요한은 파트모스 섬에 유배됐다가 결국 풀려났다. 사도 요한 기념 교회는 에페수스 인근에 있다. 유적지 내엔 성모마리아의 교회 등이 남아 있다.
이외에도 에페수스의 건축물 하나하나엔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얽혀 있다. 과중한 세금 부과에 반란을 일으킨 이오니아인들을 유혈 진압하고 세웠다는 메미우스의 석상, 평민과 귀족의 영역을 나눴던 헤라클레스가 새겨진 기둥 문, 돈을 받고 운영했다는 수세식 화장실, 대리석에 새겨진 발자국보다 발이 작으면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들어갈 수 없었다는 창녀의 집, 당시 세계 최고의 도서관이었다는 켈수스 도서관, 멀리서도 소리가 잘 들리도록 설계됐다는 원형경기장, 아케이드란 단어의 어원이 된 상가 거리 아카디언, 사도들을 기리기 위한 기둥…. 이곳에선 돌멩이 하나까지 모두가 역사다.
유럽과 아시아가 만나는 세계의 중심지 이스탄불

마지막 종착지인 이스탄불. 유럽과 아시아가 만나는 이스탄불은 서기 32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수도로 정한 뒤 19세기 말까지 세계의 중심이었다. 이스탄불에 수많은 영웅이 있지만 딱 두 사람만 거론하면 메흐메드 2세와 케말 아타튀르크다.
메흐메드 2세는 콘스탄티노플을 이스탄불로 만든 술탄. 1453년 5월 그는 난공불락이라던 이 도시를 무너뜨렸다. 선왕이 살아 있을 때 왕위에 오른 그는 왕실 정예부대인 예니체리의 견제를 받아 술탄의 자리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그는 뛰어난 전략가였다. 당시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려면 골든혼에 진입해야 했다. 하지만 그곳은 좁은 해협에 쇠사슬을 묶어놓아 배가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 메흐메트 2세가 낸 아이디어는 배를 산으로 끌고 올라가 골든혼으로 넘어가는 것이었다. 이 작전은 성공했다.
메흐메트는 정복 전쟁을 끝낸 뒤 하기야 소피아에서 신께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그는 종교가 달랐지만 성당을 파괴하지 않았다. 성당에는 기독교의 벽화가 그려져 있었지만 흰 천을 가린 뒤 이슬람 사원으로 썼다.(후대에 와서 벽화에 회칠을 했지만.) 11세기에 같은 기독교도지만 도시를 약탈했던 십자군과는 대조되는 모습이다. 그가 성당을 파괴했으면 세계의 8대 불가사의로 불리는 위대한 아야 소피아도 잿더미로 변했을 것이다. 높이 56m짜리 4개의 기둥이 거대한 돔을 떠받치고 있는 아야 소피아를 완성했을 때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감격한 나머지 “솔로몬이여 내가 너를 이겼노라’라고 외쳤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현대 터키를 이해하려면 케말 아타튀르크를 알아야 한다. 그는 터키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초대 대통령이다. 1차 대전 당시 독일 편에 섰던 터키는 연합군에게 분할통치 됐다. 이에 저항해 독립 전쟁을 펼쳤던 그는 1923년 왕정을 종식시키고 공화국을 출범시킨 뒤 초대 대통령이 됐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종교학교를 없애고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는 등 터키를 근대화시킨 것이다. 터키가 이슬람 국가지만 길거리에서 포옹하거나 스스럼없이 키스하는 연인을 볼 수 있는 것도 다 그의 덕택인지 모른다. 터키 어느 도시를 가나 그의 동상이 서 있을 정도로 국민들의 존경심도 대단하다. 돌마바흐체 궁에는 그의 집무실이 아직까지 존재한다. 집무실의 시계는 지금도 그가 업무를 보다 사망한 9시 5분에 멈춰 있다. 타임지는 그를 20세기의 위대한 인물 두 번째로 선정하기도 했다.
신화시대부터 현대까지 문명의 기록이 남겨진 터키. 이곳에서는 역사를 보고 만질 수 있어 좋다.

서울∼이스탄불 직항편은 터키항공(02-777-7055)이 일주일에 월·목·토요일 세 차례 뜬다. 현재 전세기를 띄우고 있는 대한항공(1588-2001)도 올봄 항공운항권을 얻어 주 3회 정식 취항하고 있다. 이스탄불까지는 11∼12시간 소요. 올해 초 화폐개혁을 통해 터키 리라를 예테르(YTL)로 바꿨다. 1US달러에 1.25 YTL 정도. 1유로는 1.45YTL. 우리 돈으로 8백50∼9백원쯤 된다. 달러와 유로 모두 통한다.
터키 디저트인 로쿰은 선물로도 좋다. 영화 ‘나니아 연대기’에서 여왕이 터키시 딜라이트를 줄 테니 형제를 모두 데려오라고 유혹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바로 터키시 딜라이트가 로쿰이다. 이스탄불 스파이스 바자와 모스크 샛길에 있는 알리 무히딘 하지 베키트란 가게(212-512066)는 2백28년 된 로쿰집이다. 그랑바자르는 4천5백여 개의 상점이 몰려 있는 유서 깊은 시장이다.
글·사진 / 최병준(경향신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