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사계가 뚜렷한 비옥한 땅- 이란

길 떠나는 길

(14)사계가 뚜렷한 비옥한 땅- 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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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사의 땅’ 이란은 겨울도 없고 연중 뜨거운 태양만 내리쬘 것 같다. 하지만 이란은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다. 과거 화려한 페르시아 왕국을 일으켜 세계를 호령하던 이란은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이달의 ‘길 떠나는 길’에는 아직까지 이슬람 원리주의가 남아 있는 독특한 나라 이란으로 안내한다.


[길 떠나는 길](14)사계가 뚜렷한 비옥한 땅- 이란

[길 떠나는 길](14)사계가 뚜렷한 비옥한 땅- 이란

너무나 이슬람적인 나라
흔히 ‘이란’ 하면 열사의 땅으로만 생각한다. 겨울도 없고 연중 뜨거운 태양만 내리쬐는 사막으로 석유만 나오지 않는다면 살기 힘든 곳 으로 여기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이란은 사계절이 뚜렷한 비옥한 나라다. 이란은 페르시아 문명의 발상지다. 물론 사막지대도 있지만 비옥한 농토도 많다. 곡식과 과일을 자급자족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나라다.

지난해 겨울 테헤란에서 도착했을 때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산 정상은 하얀 눈으로 덮여 있었다. 가이드는 요즘 한창 스키철이라고 했다. 이란의 동부 쪽에는 스키장도 많다고 한다.

테헤란은 해발 1,700m의 고원도시다. 한때는 중동에서 가장 번성한 도시였으나 ‘쇄국정책’이 경제를 망쳐놓았다. 이란이 외부와 담을 쌓게 된 것은 종교 때문이다. 공항에는 호메이니의 어록이 붙어있다. 호메이니는 1979년 팔레비 왕을 쫓아낸 혁명 이후 회교원리주의를 강조해왔다. 국제공항 남자 화장실에는 남성용 소변기조차 없다. 현지인들은 ‘앉아서 용변을 보는 것이 더 이슬람적’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자동차 번호판도 아라비아 숫자가 아니다.

모스크의 야경

모스크의 야경

공항에서 만난 택시 기사에게 이만하면 살기 좋겠다고 했더니 정부에 대한 비난을 쏟아냈다. 팔레비 국왕 시절엔 환율이 1달러에 60리알 정도였다. 지금은 1달러에 9찬 리알이니 화폐가치가 1백50분의 1로 떨어졌다고 비난했다. 이란이 쇄국정책을 펴도 먹고 살 수 있는 것은 막대한 자원 덕분이다. 원유생산량은 세계 4위, 천연가스 매장량 세계 2위, 대리석 생산량 세계 2위다. 휘발유 값은 ℓ당 100원 정도에 불과하다. 광물자원도 풍부하다.

[길 떠나는 길](14)사계가 뚜렷한 비옥한 땅- 이란

[길 떠나는 길](14)사계가 뚜렷한 비옥한 땅- 이란

도심은 70, 80년대 서울과 비슷하다. 두바이엔 세계 최고의 건물과 화려한 건물이 늘어섰지만 중동의 파리로 불리던 테헤란은 이제 썰렁하다. 70년대만 해도 뉴욕과 파리, 런던의 고급 백화점이 부유층에게 카탈로그를 보냈을 정도였다. 지금은 상상조차 어렵다.

거리에서 눈에 띄는 것은 기아 프라이드 베타 자동차. 이란의 국민차나 다름없다. 부품을 한국으로부터 수입해 조립, 생산하고 있는데 연간 25만∼30만 대라고 한다. 이란 차 페이칸도 볼 수 있는데 1970년대 중반 현대 포니와 비슷한 시기에 나온 모델이다. 한국의 자동차산업은 비약적인 발전을 했지만 이란의 페이칸이 단종된 것은 불과 3년 전의 일이다.

거리만 보면 이란에 별로 볼게 없다고 생각하지만 역사와 문화를 접하면 묘한 매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페르시아의 몰락
이란은 한국만큼이나 외세의 많은 침략을 받았다.
기원전 7세기 페르시아 왕국은 당시 세계 최강이었다. 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킨 페르시아는 그리스(마케도니아)와 패권경쟁에서 패해 결국은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 페르시아에 결정타를 준 사람이 바로 알렉산더. 알렉산더는 다리우스 왕이 이끄는 대군을 격파했다. 알렉산더는 페르시아를 지나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인도까지 동방 원정길에 나섰다.

이후 페르시아는 여러 왕조가 불꽃처럼 일어섰다 연기처럼 사그라졌으나 페르시아 같은 대제국을 건설하지는 못했다. 아프간의 가즈니왕조, 징기스칸, 셀주크터키 등 주변의 강국이 실크로드의 통행로이던 이란을 침범했다.
오스만투르크도 이란의 사파비 왕조를 짓밟았다. 현대에 와서는 터키와 영국군의 대립으로 전쟁터가 되기도 했다. 이렇게 숱한 침략을 받았으니 이란인들이 ‘죽어도 핵을 갖겠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수도 테헤란의 역사는 그리 깊지 않다. 1천년 전에는 테헤란에서 조금 떨어진 레이가 수도였다. 레이는 몽골군의 침략으로 도시 자체가 사라졌다. 이후 레이는 방치돼 있다가 약 4백 년 전부터 레이 근처에 테헤란이란 도시가 생성되기 시작했다. 테헤란에 사람이 모여든 것은 바로 바자르 때문이다. 당시 상인들은 바자르에 모여서 물물교환을 하거나 물건을 샀다. 바자르가 커지고 유명해지자 테헤란도 저절로 커졌다. 결국 2백 년 전에 수도로 정해졌다.

지금도 바자르는 남아 있다. 바자르는 마치 남대문시장처럼 생겼다. 구불구불한 골목을 따라 수도 없이 많은 가게가 들어차 있다. 야채가게, 물담배가게, 금은방, 영화 포스터, 티셔츠…. 수없이 많은 가게가 흩어져 있다. 이스탄불의 그랜드 바자르와 비슷하다. 외국인 관광객이 많지 않은 탓에 이란인들은 동양인을 신기하게 바라본다.


목숨을 걸고 사랑을 나누는 이란의 청춘
[길 떠나는 길](14)사계가 뚜렷한 비옥한 땅- 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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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헤란 여행의 재미는 독특한 차이하네 문화다. 차이하네는 우리말로 하면 찻집 정도. 이란인들에게 차이하네는 사교장이다. 찻집에선 간단한 음료와 함께 물담배를 피울 수 있다.

물담배는 호리병 모양의 통에 호스를 박아 담배연기를 빨아들일 때 연기가 물속을 지나게 돼 있다. 이때 타르가 감소돼 담배맛이 순해진다. 그런데 이 물담배는 우리식 담배와는 맛이 다르다. 과일 향, 박하 향 등 수없이 많은 향을 가미했다. 차이하네마다 보통 20여 개 이상의 다른 물담배를 판매한다.

차이하네는 남녀가 엄격히 구분된 곳이 대부분. 하지만 시장통의 차이하네에선 대학생들이 은밀히 데이트를 즐기는 곳도 있다. 이란에서 성인남녀라도 데이트를 하려면 당국의 허가가 있어야 한다. 두 사람이 결혼을 약속한 사이라는 것을 양가 부모들이 경찰서에 가서 증명을 하면 데이트 허가증이 나온다고 한다. 이 허가증 없이 데이트를 하다간 큰일 당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젊은이의 열정을 법으로 묶을 수 있겠는가? 구석지고 은밀한 차이하네에서 데이트하는 연인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이들은 사진촬영을 하겠다고 했더니 펄쩍 뛰었다. 젊은 연인들은 목숨을 걸고 사랑을 하는 것이다. 그들의 순수함이 부럽기만 하다.


천혜 관광자원 ‘캔도번 석굴집’
테헤란의 또 다른 상징은 아자디(이란문)이다. 아자디는 건축적으로 아름답다. 테헤란을 상징하는 일종의 랜드마크다. 아자디를 만든 것은 팔레비 국왕의 왕비. 전세계 건축가로부터 공모를 해서 받은 작품이다.

테헤란 시내

테헤란 시내

이슬람 사원을 들여다보는 것도 좋다. 예의만 갖추고 미리 허락을 요청하면 예배 도중 플래시를 터뜨리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사진촬영을 허용해준다. 이슬람 사원에는 순교자들의 얼굴 사진이 붙어 있는데 전쟁터에서 죽은 사람들이라고 한다.

[길 떠나는 길](14)사계가 뚜렷한 비옥한 땅- 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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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헤란을 벗어나면 독특한 유적지가 많다. 이란에서도 가장 특이한 마을 중 하나는 캔도번. 캔도번은 터키의 카파토키아와 영락없이 닮았다. 카파토키아처럼 바위에 구멍을 뚫고 사람들이 생활한다. 카파토키아는 이미 관광지로 변했지만 캔도번은 아직도 사람들이 토굴집에서 그대로 살고 있어 더 정겹다.

[길 떠나는 길](14)사계가 뚜렷한 비옥한 땅- 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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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도번은 1백50여 가구가 몰려 있는 마을로 8백 년 전부터 석굴 속에서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마을주민 마지드 자바니는 “몽골의 침입으로 석굴집을 만들어 요새처럼 몸을 숨겼다”고 했다. 반면 학자들은 대지진으로 주택이 파괴되자 석굴에 살기 시작했을 것이란 설을 제기한다. 주민들은 현대식으로 집을 바꾸려 하고 있다. 전봇대도 세우고, 전기도 끌어들였다. 반면 정부는 문화재로 지정, 이 일대를 관광지로 만들려고 하고 있다. 주말이면 관광버스가 두어 대나 온다는 마을이지만 외국인은 거의 없다. 천혜의 관광자원을 두고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게 이란의 현실이다.

[길 떠나는 길](14)사계가 뚜렷한 비옥한 땅- 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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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은 원형이 잘 보존돼 있다. 창문만 하나 달랑 달려 있는 집 안에서 주민들은 카펫을 짜서 팔거나 관광객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며 생계를 잇는다. 한쪽 토굴에는 주방, 한쪽 토굴에는 마구간이 있다. 주민들은 아직도 자동차나 트럭 대신 노새로 짐을 나른다. 한 주민은 “옛날에는 카펫만 짜도 먹고 살 만했는데 요즘은 들이는 공에 비해 수입이 너무 적다”며 “경제가 자꾸 어려워진다”고 한숨을 쉬었다.

마을사람들은 그래도 순박하다. 동양인이 많지 않은 탓에 신기한듯 차나 음식을 권하기도 한다.


2천 년 이상 방랑한 유랑민족 아르메니아인
이란과 터키 등 근동지역은 다양한 인종과 종교 문명이 일어났다 사라진 곳이다. 이란과 아제르바이잔의 국경지대인 조르파도 이런 문화를 엿볼 수 있다. 조르파에서는 그리스 정교회 유적지인 성 스테파누스 성당도 볼 수 있다.

아르메니아계와 아제르바이잔계 등 중앙아시아 민족들이 제법 많이 몰려 산다. 문이 잠긴 성당은 문화 유적지이지만 관광객은 찾을 수 없었다. 문을 두드려 불러낸 교회 종지기는 이란인이 아닌지 조심스레 확인을 한 다음 말문을 열었다. 지금도 아르메니아인들만이 한 달에 한 번 정도 성당에 와서 예배를 본다고 했다. 이란 정부가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고 있긴 하지만 이교도들은 이슬람에 대한 두려움이 크다고 했다.

사실 아르메니아인들은 2천 년 이상 방랑한 유랑민족이다. 고대 아르메니아는 로마 제국에 대항할 정도로 강성했다. 바빌로니아와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진 뒤 아르메니아인들은 나라를 잃었다. 페르시아와 오스만투르크, 몽골 등 강대국들로부터 엄청난 박해를 받았다.

[길 떠나는 길](14)사계가 뚜렷한 비옥한 땅- 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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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메니아인들이 기독교가 된 것은 AD 3세기다. 십자군 전쟁 때 아르메니아인들은 종교적인 이유로 유럽 편을 들었다. 십자군이 물러간 뒤 이슬람교도들은 아르메니아인들이 첩자 노릇을 했다는 것을 기억했고 이후 이들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아르메니아인은 비교적 자치 권한을 갖고 잘 살아왔지만 정국이 불안할 때는 희생양이 됐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러시아와 싸운 오스만투르크는 아르메니아인들이 전쟁을 틈타 독립을 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잔혹하게 짓밟았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소련연방에 편입된 뒤에는 러시아인들이 아르메니아인을 박해했다. 터키와 아제르바이잔, 이란과의 국경지대에 흩어져 살고 있는 아르메니아인들은 아직도 고통스럽게 살고 있다. 1천 년의 세월을 이슬람교도 사이에 끼어 살았지만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만 해도 놀랍다.

한때 페르시아 왕국을 일으켜 세계를 호령한 이란. 이란은 묘하다. 페르시아에 대한 향수, 엄청난 자원, 독특한 문화, 이슬람 원리주의…. 역사, 지질, 문화적으로 독특한 나라다.


여행 수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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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에서는 외국인 여자도 차도르를 써야 한다. 머플러를 준비, 공항 입국장부터 머리에 두르는 것이 좋다. 매주 월요일 이란항공이 테헤란으로 떠나는 직항편을 운행한다. 소요시간은 9시간 35분이다. 긴 바지를 입는 것이 좋다.

다리를 내놓고 다니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이란으로 여행을 가려면 이란대사관에서 비자를 받아야 한다. 사진 3장이 필요한데, 여성은 반드시 스카프로 머리를 가리고 찍은 사진이어야 한다. 교통편은 기차보다 버스가 잘 발달되어 있고, 야간 버스를 이용하면 쉽게 도시 간 이동이 가능하다. 우리나라처럼 사계절이 분명하다. 겨울에는 두툼한 옷을 준비해야 한다. 시차는 우리나라보다 5시간 30분이 늦다. 3월부터 9월은 4시간 30분 늦다.


글·사진 / 최병준 기자(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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