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생학과 ‘벅 대 벨’ 사건

우리는 피임을 모른다

우생학과 ‘벅 대 벨’ 사건

김선형|건강 칼럼니스트
댓글 공유하기
[우리는 피임을 모른다] 우생학과 ‘벅 대 벨’ 사건

인권은 모든 사람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게 하는 토대다. 인류의 역사는 곧 인권의 역사라고 할 만큼 인류는 인권 증진과 함께 진보해 왔다. 피임이 인권, 즉 ‘인간으로서의 권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1927년 ‘벅 대 벨 사건(Buck v. Bell)’이 가장 잘 보여준다. ‘벅 대 벨 사건’은 캐리 벅(Carrie Buck)과 당시 버지니아주 수용소장이자 의사인 존 벨(John H. Bell)의 이름을 따 불리게 된 소송으로, 미국 전역에 우생학이 확산되게 된 결정적 전환점이 됐다.

1880년 미국의 한 의사가 제왕절개수술을 하는 도중 나팔관을 묶는 시술을 처음 시행했고, 1894년에는 남성 불임시술로 정관절제술이 소개됐다. 우생학 프로그램의 실현 기반이 마련된 셈이다. 20세기 초반 미국은 우생학 프로그램을 세계 최초로 합법화했다.

우생학은 찰스 다윈의 사촌인 영국의 과학자 프랜시스 골턴이 1883년 다윈의 진화론에 영향을 받아 만들어 낸 개념으로, 어떤 계획적인 방법을 통해서 종의 생물학적 성질을 개선하려는 시도다. 인간에게는 유전적 우월성이 존재하고 선별적인 번식을 통해 인간 종을 진화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여기서 더 나아가 우수한 유전자를 보존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열등한 유전자를 모두 없앤다는 발상을 실행에 옮긴 것이 미국의 우생학 프로그램이다. 1912년 제1차 국제우생학대회가 런던에서 열렸고, 당대의 저명인사들은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아이디어로 우생학 프로그램을 적극 지지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 1927년 미국인 캐리 벅이 난관절제술을 당한 ‘벅 대 벨 사건’이 발생했다.

캐리는 양부모의 조카에게 17세의 나이에 강간을 당해 임신을 하게 되고 딸 비비안을 출산한다. 의사들은 캐리에게 간질발작과 정신박약 진단을 내려 지적장애가 있던 친모처럼 캐리도 아이를 돌볼 능력이 없다고 판단했다. 재판은 주법원을 거쳐 연방대법원까지 갔음에도 패소했고, 캐리는 친모가 있던 정신질환자 수용소로 보내져 불임수술을 당하게 된다.

의사들의 진단에 따르면 캐리 벅은 당시 정신보건법에서 규정하는 정신질환자인 지적장애인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캐리 벅의 학교 성적은 중간 이상이었고, 양부모가 집을 비운 사이에 성폭행을 당한 것이었다. 후일 나치가 인종 청소의 명분으로 이 판례를 인용하는 비극이 일어나게 된다.

이후 미국 전역의 32개 주에서는 정신질환자들의 수용시설을 대상으로 퇴소 전에 불임시술을 권장했다. 그중 노스캐롤라이나주는 사회복지사에게 불임시술을 할 대상을 가려내는 권한을 주었다. 이 때문에 1940년대 말에는 불임시술을 받는 일반인의 수가 꾸준히 늘어갔고, 그 대상도 ‘자손을 낳아 기르기 부적절한 사람들’이라는 포괄적 개념으로 확장됐다. 알코올 중독자, 시각장애인, 성적으로 문란한 여성, 범죄자, 정신박약자, 정부보조금으로 살아가는 사람, 강간 피해 아동 등이 마구잡이로 포함됐다.

더 나아가 흑인 인구를 억제하는 수단으로 악용되다가 1960년대에 이르러서는 대다수의 대상이 젊은 흑인 여성으로 국한됐다. 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는 7600건의 불임수술이 행해졌고, 미시시피주에서는 1933년부터 30년간 683명의 여성이 동의 없이 ‘미시시피 맹장수술’이라는 이름으로 불임수술을 당했다.

미국에서는 오늘날에도 인간 유전에 대한 관심이 많다. 보수주의자는 성인의 완성된 성격은 주로 선천적인 특질에 의존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진보주의자는 유전과는 무관하고 모든 것은 교육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우생학 사상의 기초는 인간이 동등하지 않다는 데 있다. 하지만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것은 인간 존엄의 기본이자 민주주의의 기초이기도 하다.

버트런드 러셀은 우수한 혈통을 조장하는 적극적 우생학과 열등한 혈통을 억제하는 소극적 우생학이 있다고 한다. ‘우수한 소수의 인간’과 ‘열등한 소수의 인간’으로까지 구분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거의 모든 가축과 식물의 품종을 개량해 왔다. 인간 역시 어떤 유익한 방향으로 개량하려는 우생학적 시도가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2018년 11월 중국에서 HIV(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 감염을 막기 위해 유전자 가위를 이용해 특정 유전자를 제거한 첫 유전자 편집 쌍둥이 아기가 태어났다고 발표됐다. 더 나은 삶을 충족시키는 도구로 위장한 우생학은 언제든지 부활할 수 있다. 인류의 길이 다시 좁아지고 있다.

[우리는 피임을 모른다] 우생학과 ‘벅 대 벨’ 사건

■김선형은 누구?

간호학을 전공하고 임상 간호사로 일하며 수많은 여성, 특히 일하는 여성들을 만났다. 그들이 처한 현실과 다양한 삶의 고충을 마주하면서 여성을 병들게 하는 것, 여성의 건강이 그들의 삶과 가정 그리고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갖게 됐다. 지금은 여성 건강과 인권에 관한 주제로 번역과 집필 활동을 하고 있다. 저서로는 ‘우리는 피임을 모른다’(도서출판 파람)가 있다.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Ladies' Exclusive

      Ladies' Exclusive
      TOP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