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후 피임약은 대표적인 응급 피임법이다. 성관계 시 피임하지 않았거나 실패한 모든 상황에서 고려할 수 있는 피임법으로, 배란을 막거나 난관의 운동성을 통해 정자가 난관을 통과하는 것을 방해한다. 또한 자궁내막을 변형시켜 착상을 막는다. 성관계 후 72시간 안에 한 번 복용하거나 12시간 간격으로 2회 복용한다.
한때 사후 피임약이 청와대 청원게시판을 떠들썩하게 했던 적이 있다. 응급 피임약을 약국에서 처방전 없이 살 수 있게 해 달라는 청원이었다. 사후 피임약은 응급 시에 복용하는 약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전문의약품으로 분류돼 의사의 처방을 받아야만 살 수 있다. 일반의약품으로의 전환을 검토한 적 있지만 의료계와 종교계의 반대로 무산됐다.
의료계의 반대 이유는 사전 경구피임약에 비해 10배 높은 호르몬 투여로 인한 부작용 때문이다. 반면 여성단체와 일부 시민단체는 “최대한 빨리 먹어야 하는 응급약인데, 의사의 진료가 필요하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여성을 임신의 주체로 보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다른 나라는 어떨까? 응급피임 국제컨소시엄(ICEC)의 자료(cecinfo.org)에 따르면 현재 전 세계 140개국 이상에서 응급 피임약의 이용이 가능하다. 그중 캐나다·호주·미국과 EU 국가를 포함해 60개국 이상에서는 의사의 처방전 없이 일반의약품(OTC)으로 구입할 수 있다. 보통 OTC는 편의점 진열대가 아닌 약국에서 구매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 19개국에서는 약국이 아닌 일반 상점에서도 구입이 가능하다. 그러나 일반의약품에 대한 규정은 한 국가 안에서도 주나 지역마다 상당히 다를 수 있다. 같은 일반의약품이라 하더라도 판매자의 권한이나 판매 장소에 따라 규정이 다르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많은 국가에서는 사후 피임약을 구매하는 데 처방전을 필요로 하고, 또 어떤 국가에서는 연령 제한을 두기도 한다. ICEC는 응급 피임약(ECPs)에 대한 여성과 청소년의 접근성을 높이고 복용 시기가 미뤄지는 것을 최소화하기 위해 처방전 없이 OTC로 판매하는 ‘비처방 접근’을 권고하고 있다. 피임하지 않은 성관계 후에는 응급 피임약을 빨리 복용할수록 효과가 높기 때문이다.
또한 여성이 약을 구하기 위해 처방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의사와 약사, 즉 두 번의 방문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통수단이 취약한 지역에서는 병원이나 약국의 접근이 어렵고, 피임약을 많이 필요로 하는 주말이나 밤에는 접근이 더욱 어려워진다.
ICEC는 금기사항과 부작용, 복용 시기와 방법이 제품 라벨에 이해하기 쉽게 설명돼 있기 때문에 응급 피임약의 사용이 안전하지 않다는 것은 이유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또한 응급 피임약에 대한 접근성이 증가할수록 청소년들의 무방비한 성관계가 늘어날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오히려 응급 피임약을 사용해 본 경험이 사전 피임법을 이용할 가능성을 높인다고 주장한다. 국내에서도 사후 피임약에의 접근성을 높일 수 있는 제도적 장치에 관한 검토와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