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사베이
바쁜 일정을 앞두고 일부러 잠을 더 자두는 이른바 ‘수면 저축’이 실제로 도움이 될까. 해외 군대 연구소에서 시작된 실험이 이후 의료·스포츠 연구까지 이어지며 과학계에서도 꾸준히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고 최근 영국 BBC가 전했다.
‘수면 저축’ 개념을 처음 체계적으로 제시한 연구는 2009년 미국 월터 리드 육군 연구소에서 나왔다. 당시 연구를 이끈 수면과학자 트레이시 러프 교수 연구팀은 군인 24명을 두 그룹으로 나눴다. 한 그룹은 일주일 동안 매일 7시간씩 자게 했고, 다른 그룹은 10시간씩 잠을 자도록 했다. 이후 두 그룹 모두 일주일 동안 하루 3시간만 자는 극단적인 수면 제한 상황에 들어갔다.
결과는 분명한 차이를 보였다. 미리 잠을 늘려둔 그룹은 수면 부족 상황에서도 주의력과 각성도 저하가 덜했고, 정상 수면으로 돌아온 뒤에도 회복 속도가 더 빨랐다. 현재 유타주립대에 재직 중인 러프 교수는 이 연구를 통해 “수면을 어느 정도 미리 확보해두면 이후 수면 박탈의 충격을 완화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후 비슷한 결과를 보인 연구들도 나왔다. 미국 마이애미의 한 병원에서 진행된 연구에서는 의사들이 야간 근무 전 며칠간 수면 시간을 약 90분씩 늘렸을 때, 이후 2주간의 밤 근무 동안 집중력과 수행 능력이 더 안정적으로 유지된 것으로 나타났다. 일부 스포츠 연구에서도 선수들이 경기 전 수면 시간을 늘리면 반응 속도와 정확도, 신체 스트레스 지표가 개선되는 경향이 보고됐다.
하지만 모든 전문가가 수면 저축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 매사추세츠 종합병원이자 하버드 의대 교수인 신경과 전문의 엘리자베스 클러먼 교수는 “사람이 피곤하지도 않은데 더 많이 잘 수 있다는 근거는 부족하다”며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는 “수면은 저금통이 아니라 신용카드에 가깝다. 빚은 쌓을 수 있지만, 여분을 미리 적립해 두기는 어렵다”고 비유했다.
수면의 역할에 대한 해석도 엇갈린다. 미네소타대 신경과 교수 마이클 하월은 “수면 중에는 뇌에 쌓인 노폐물이 배출되고 에너지원이 회복된다”며 “수면 시간을 조금이라도 늘려두는 것은 이후 수면 부족 상황에서 버틸 여력을 키워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반면 일부 연구자들은 이런 효과가 ‘저축’이라기보다, 기존의 수면 부족을 미리 보충한 결과일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전문가들은 공통적으로 한 가지 점에는 동의한다. 수면 저축이 도움이 될 수는 있어도, 만성적인 수면 부족을 정당화하는 면허증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월 교수는 “중요한 일정이 있다면 1~2주 전부터 매일 30~60분 정도 더 자는 시도를 해볼 수 있다”면서도 “가장 중요한 건 장기적으로 규칙적인 수면 습관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수면은 미리 모아두는 자산이라기보다, 매일 꾸준히 관리해야 하는 기본 자원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